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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잠 Apr 04. 2021

인생의 끝자락에서 미리 쓰는 글

열심히 잘 살았다.

누구에게나 삶의 끝은 존재한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꺼내는 것도, 혼자 생각하는 것도 두려운 일이라 굳이 생각하고 살려하지 않았다. 평범하게 산다면 살아갈 날이 많이 남은 30대 중반이지만, 요새는 젊은 날의 시간이 하루하루 빠르게 흘러가는 것이 더욱 아쉬운 느낌이 든다. 시간이 흐르는 속도는 점점 빨라져 갈 것 같은 생각에, 지금부터 인생의 마지막에 대해서 미리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아쉬운 하루가 휘발되지 않도록 기록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 삶의 마지막이 올 때쯤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게 들춰보고 싶었다.


얼마 전 <뉴 필로소퍼>라는 잡지를 읽었는데, 해당 호가 마침 <삶과 죽음은 하나>라는 주제였다. 삶의 유한함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것이 삶의 불안감을 줄이고, 좋은 죽음을 맞이 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좋은 죽음이라는 것은 곧 올바른 삶을 살아나겠다는 다짐이라고 했다.


"삶과 죽음은 하나"우리는 대부분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매우 두려워한다.
하지만 누구나 예전에, 즉 태어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어느 누구도 자기가 한때 존재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겁을 먹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들이 겪은 상실의 아픔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리죠. 그 이유는 타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 자신의 죽음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네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우린 모두 죽을 운명이니까.
다만 내가 직접 하고 경험하고 깨우친 바에 따르면, 삶의 유한함을 의식하며 사는 것이 놀랍게도 어떤 불안함도 만들지 않더라는 것이다. 오히려 해방감을 준다.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치울 수 없고. 어떠한 야망도 온전히 채울 수 없으며, 때로는 어떤 사람들에게 실망을 줄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싶은 위안을 줄 수 있다.
죽음은 삶의 결말이자 인생의 자연스러운 일부예요. 죽음이 없으면 삶도 없죠. 우리는 인간이 아주 짧은 순간 지상에 머물다 가는 존재라는 걸 깨닫고 인정해야 해요.
<뉴 필로소퍼 '삶과 죽음은 하나' 편에서>


나는 어떻게 삶을 마무리하고 싶을까?

우리 삶은 인생게임처럼 끝을 향해 달려간다. 여러 가지 선택의 순간이 수시로 찾아오며 때로는 가시밭길이 가득하고 가다 보면 향기로운 장미를 만나기도 한다. 그렇게 단맛과 쓴맛을 오가는 인생을 지나 마지막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도 나 열심히 잘 살았지? 수고 많았어"

인생게임
인생게임, 삶은 유한하다.


다 때려치우고 드러누워서 대충 살고 싶다는 생각이 수시로 찾아온다. 때로는 이 정도의 능력으로 무슨 성공을 꿈꾸나 싶었다. 그럼에도 신기하고 재밌었던 건 뭐라도 열심히 하니까 삶이 점점 나아지는 것이었다.

가정환경이 빈곤해 평생 꿈꾸지 못할 줄 알았는데, 부자는 아니지만 충분히 풍족하게 먹고살 정도의 경제적 여유도 누리며 사는 날이 온 것은 눈물나게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어디선가 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때는 뛸듯이 기뻤다.

그렇게 나는 노력 중독자가 되어 살아갔다. 항상 체력이 약해서 몸이 피곤했고 그 시간이 괴로울 때도 많았지만, 고통 후에 찾아오는 쾌감은 마약처럼 날 중독시켰다.

열심히 살았던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조금 더 내 생각을 하며 살았으면 몸과 마음이 덜 힘들었을 텐데.


삶의 고통과 슬픔은 필연적이라고 했던가.

가끔씩 소소하게 기쁨이 찾아오는 날이면 눈물 나게 행복했다.

아침에 먹은 따뜻한 빵, 오후 2시 햇살이 비치는 창가와 살랑거리는 커튼, 내 유일한 현실 도피처가 되었던 록 페스티벌, 아침에 마시는 시원한 아이스 카페라떼..


생각과 잡념이 많아 잠 못 이루고 몸을 혹사시키는 날도 많았다. 내가 뱉은 말이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 집에 돌아오면 항상 괴로워했다. 그런 날 찌질한 못난이라고 미워했지만, 사실 내가 마냥 밉지만은 않았다는 것도 잘 안다. 솔직히 가끔은 내가 자랑스러울 때도 있고, 어떤 면에선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수고했는지 나는 잘 안다. 정말 고생 많았다.


사랑하는 가족을 만난 것은 가장 큰 행운이었다. 비록 경제적으로 풍족하진 않아 남들이 항상 부러웠지만 그랬다고 마냥 불행한 것은 아니었다. 가족들과 5천 원짜리 돈가스를 먹는 특별한 날이 지금도 생각난다. 맛있다고 인당 하나씩 나오는 엄마의 수프까지 다 내가 먹었었다.


중학교 땐 사춘기가 와서 엄마를 부끄러워 한적도 있었다. 엄마가 창피하다는 말에 내 뺨을 때리고 뒤돌아 울던 엄마 모습이 생각난다. 쌀쌀맞고 따뜻한 말 한마디 못하는 딸이지만, 엄마는 궁상맞게 살면서 나한테 최대한 해줄 수 있는 건 잘해주려고 했었다. 내가 커갈수록 약해지는 엄마는 내 마음속의 근심이었지만, 항상 힘차게 홀로서기할 수 있기를 응원했다. 엄마가 즐거워할 때면 나도 즐거웠다.


아빠한텐 특히나 어색한 마음에 무신경했었다. 한번 도박으로 크게 실수한 이후로 눈치 보면서 지내는 것이 안쓰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랬던 것 같다. 아빠가 행복한지 항상 마음이 궁금했는데 그런 말을 못 하는 사람이라 물어보지 못했다. 그래도 항상 아빠가 행복하길 바랬다.


나랑 반대로 다행히 긍정적이고 밝았던 동생. 내가 결혼해서 집에 없을 때 항상 엄마랑 주말마다 함께 시간을 보내줘서 고마웠다. 나랑 엄마가 예민한데 비해 동생이라도 밝아서 우리 집 분위기가 많이 나빠지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함께 중요한 순간에 이야길 나눌 동생이 있어 좋았다.


평생 함께해준 남편. 매일 반응이 영혼 없다고 투덜대고 괴롭혔지만, 어떤 방식으로 나에게 최선을 다해주었는지 사실 모르지 않았다. 20대 때 우울증으로 고생할 때 나를 받아줄 의무가 없는 사람인데, 많이도 괴롭혔다. 고독한 내가 되려고 인생의 방향을 나도 모르게 정한 채 많은 사람들을 떠나게 하려고 할 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어도 계속 자리를 지켜준 것에 대해 평생 감사하고 있다. 퇴근하고 산책을 하고, 함께 집에 들어가는 사소한 일상들이 평범하지만 이것이 진짜 행복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어 고마웠다.


인생이 고통스럽고 힘든 순간엔 항상 예상치 못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함께 해준 모든 사람들이 고맙고 보고 싶다. 언젠가 다 같이 만날 수 있을까?


어릴 땐 내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살아갈수록 좋은 날도 많았다.

이렇게 좋은 것들이 많은 세상 속에서 멋진 어른이 되고 싶었다.

과연 나는 그 꿈을 이루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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