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의 나이 40 중반이 되었을 때, 아내는 갑자기 교사 임용시험을 보겠다고 했다. 늘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성격인 아내이기에 이번에도 뭔가 진짜 해낼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내가 부담을 느낄까 봐 되도록이면 아내가 마음 편하게 시험을 준비할 수 있게 해 주려고 애썼다. 아내가 교사 임용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J는 덩달아 뛸 듯이 기뻤다. 아내가 공부에 진심으로 전념하고 있는 건 알았지만, 새삼 대단해 보이고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직장동료들에게 슬쩍 자랑을 하자 모두들 축하해 주면서 부러운 마음을 드러냈다. 사실, 남편들은 아내가 집안 일도 빈틈없이 해주고 돈도 벌어오기를 바라는 두 가지 마음을 갖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단순히 돈을 벌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기보다는 아내가 당당하게전문가로서 일을 한다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아내는 J에게 늦은 나이에 시작하는 만큼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집안일을 병행하기 어려울 테니 자신이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당분간 가사 일을 전적으로 맡아달라고 부탁했고, J는 흔쾌히 수락했다. J의주부로서의 삶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사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두 사람에게는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J와 아내는 결혼한 후 J의 원가족이 살고 있는 집의 방 한 칸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첫돌이 지난 어느 날, J의 아버지는 J에게 식구들을 데리고 나가서 살라고 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아직 집을 구할 만큼 큰돈을 모아두지 못한 두 사람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서 17평짜리 아파트를 세로 얻어 분가를 하게 되었다.
이사를 하던 날, J는 다른 공간은 안중에 없고, 주방을 자기 공간으로 여기며 정리하고 주방 살림을 배치하는 것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때부터였다. J가 가진 주부로서의 재능을 눈여겨본 아내는 J의 재능을 맘껏 펼치도록 돕기로 마음먹었다.
J는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 아내와 아이와 셋이서 오붓하게 살 수 있게 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3남매 중 외아들이자 맏이인 J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로부터 유독 핀잔을 많이 들으며 자랐다. 벽에 못을 박거나 집을 수리하는 일 같은 남성스러운 일에 그다지 재능이 없었던 J는 무섭고 호통치기 좋아하는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느라 마음이 편한 날이 없었고, 잔뜩 주눅 들어있는 아들이 못 미더운 아버지는 J를 볼 때마다 이맛살을 찌푸리며 퉁명스러운 말투로 야단을 치기 일쑤였다.
J가 가진 여성적이고 섬세하며 세련된 감각을 알아보고 좋아해 주는 아내를 만나게 된 것이 J에게는 행운이었다. 진취적이고 도전하기 좋아하는 남성적인 매력을 가졌지만 늘 위축되고 우울한 삶을 살아오기는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타고난 성별과는 어울리지 않는 정반대의 기질을 타고난 두 사람은 아버지의 기세에 눌려 청소년기를 초라한 기분으로 살아가다가 마침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며 비난하지 않고 좋아해 주는 서로를 만나게 된 것이다.
아무튼, 아내의 부탁을 받은 그날 이후 J는 지금까지 집안일을 책임지며 살고 있다. 업무 성격상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아내가 집에서는 긴장 풀고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 이런 마음을 아내는 짐작하고 있을까? J는 문득 아내의 속마음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