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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가가일 Sep 12. 2023

우울해서 시작한 단축근무 중 임신을 하고 살 맛이 난다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들을 맞닥뜨릴 때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들

우울증으로 참 힘들었던 3, 4, 그리고 5월 초반을 보내고 시작한 50% 단축근무.

6, 7월은 참 무난했고 단축근무에 적응하며 다시 일을 잘하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7월 첫째 주말...


5월부터 시도했던 임신에 대한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 임신 테스트기에 뜬 두 줄.


사실 많이 망설였다. 5mg 소량이지만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기도 하고 단축근무 후 11월부터 다시 100% 풀타임 원계약으로 자동으로 돌아갈 텐데 다시 열심히 일해서 단축근무로 깎인(?) 열일하는 이미지를 다시 되돌려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고민도 많이 했었다. 하지만 숱한 고민 후 내린 결론은 내가 너무나 원했던 임신 무엇보다 내가 사랑하는 남편의 아이를 갖는 일을 너무나 오래 커리어란 이름으로 미뤄왔고 그게 우울증의 여러 원인 중 top 3안에 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극 P답게 5월부터 2세 만들기 프로젝트에 돌입했었다.


첫 달 실패하고 마음을 조금 놓아서 오히려 마음이 편했어서 일까 두 번째 달에 바로 성공해버렸(?)다.


입덧으로 6-7주 차에 조금 힘들었지만 다행히 독일은 입덧약이 무료로 보험처리가 되어 부담 없이 입덧약을 의사에게 처방을 받아 복용할 수 있었고 7월 그리고 8월 내내 임신 초기를 행복하게 잘 보낼 수 있었다.


우울증으로 시작된 단축근무였지만 단축근무하는 김에(?) 입덧등으로 체력적으로 힘들다는 그리고 유산의 위험으로 조심해야 한다는 임신 초기를 보내기 위해 7월 안에만 임신하면 참 좋겠다는 마음이었는데, 정말 다행히 6월에 임신이 되어서 10월 말까지인 단축근무 기간 동안 초기와 중기 일부분을 일에 대한 부담을 최대한 줄인 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입덧약 덕에 입덧은 사라졌지만 병든 닭처럼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졸음과 내 컨디션의 기본값으로 설정된 피곤함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하지만 정말 놀라운 변화는, 단축근무 후 좋아지고 있던 우울증이 더더욱 좋아졌으며 이제는 우울함이 사라진 것도 모자라 남아도는 시간에 최근 몇 년 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인 심심함을 느끼는 정도에 이르렀고 무엇보다 놀라운 변화는 일이 쉬워졌다는 사실이다.


정말이다. 일이 쉬워졌다.

내 커리어 레벨에 비해 큰 책임감과 난이도를 요구하는 일 때문에 그리고 영어와 독일어로 일한다는 부담 때문에 번아웃이 다시 왔고 코로나는 그 번아웃을 우울증으로 키우는 트리거 역할을 해서 세 번째로 재발한 우울증 이건만 임신을 하고 일이 쉬워졌다.


드디어, 이제야 일보다 중요한 무언가가 내 인생에 생겼기 때문일까?


그동안 사랑하는 남편의 존재도 물론 있었지만 모성만큼 강한 감정은 아니었는지 남편의 케어와 사랑이 아무리 지극정성 지고지순이었어도 나는 그 케어와 사랑에도 불구하고 내리 독일에서의 학업과 회사생활로 우울증을 겪어왔었다.


임신을 하고 초음파를 보며 작은 심장이 별처럼 반짝이는 내 뱃속의 아기를 마주한 그 순간부터 나에게 일은 독일어로 egal이 되어버렸다. Egal, 에갈은 doesn't matter 같은 뉘앙스로 상관없는 정도의 형용사인데, 정말 일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임신 사실을 안 그 순간부터 egal이 되었다.


그 결과, 일이 쉬워졌다.

VP든 누구든 이메일을 보내는 것이 쉬워졌고, 대여섯 번 다시 읽고 수정하던 내가 딱 두 번만 읽어보고 그냥 보낸다든지, 일을 우선순위에 맞춰 그냥, 막, 한다든지. 일을 일로 보고 좀 짜증 나면 쉬면서 할지언정 일에서 마음이 상하거나 다치는 경우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50% 단축근무를 하다 보니 월급도 그만큼 줄어들었는데 (독일 소득세는 파트타임에 대한 혜택을 줘서 따지고 보면 풀타임대비 60% 조금 안되게 번다) 그러다 보니 1분도 더 일하고 싶어지지 않았다. 100프로를 일할 때 100프로의 월급을 받으며 조금 더 일을 하는 느낌과 회사와 약속한 내 근무 시간을 반으로 줄이고 임금도 그에 따라 삭감되었는데 추가근무를 하는 것은 느낌이 아예 다르다. 내가 이럴 거면 60% 단축근무를 해서 돈을 더 받았지, 이런 기분.


임신을 하고는 더더욱 쉬어가면서 중요한 것부터만 크게 크게 끝내자, 뭣이 중헌데, 내 컨디션 안 좋으면 사장이 불러도 나는 병가 낸다, 나는 임산부다 못 자른다, 지금 아무리 열심히 해도 어차피 나는 단축근무를 한 사람이고 풀타임으로 전환하고 두세 달 있다가 2년 육아휴직으로 공백이 생기기에 열심히 해봤자 인사고과에 반영도 안 된다 그러니 욕 안 먹을 정도로 가장 중요한 일부터 끝내는 식으로 일하자.라는 마음들이 쌓여 일을 아주 효율적으로 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버렸다. 물론 내 생각이지만 말이다.


가치라는 것이 모성이라는 것이 참 내 무의식의 영역에서 나의 사고와 행동의 중추역할을 한다는 것이 신기하고 반갑고 낯설어서 무섭기도 하다.


며칠 뒤 팀장에게 임신사실을 말하려는데, 참 민망하다.


우울증이 걸려서 단축근무를 시작했는데, 단축근무하면서 좋아져서 임신했어요. (회사보다 내 인생이 먼저지요) 연초에 조직개편되면서 업무도 많아지고 스트레스받을 텐데 미리미리 사람 뽑으세요. 그때까지 (중요한 것만) 열심히 할게요.


그래도 회사보다, 내 인생이 먼저다. 너무 잘했다. 너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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