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라인을 매일 넘기며 살아남기

편집기자의 편지_7

by 기림



저녁 라디오에 있는 평온한 일상성이 참 좋더라. 하루를 마무리할 때 특유의 그 시시콜콜한 느낌. 부담스럽지 않은 웃음과 정보와 수다가 있는 곳. 자꾸 듣고 자꾸 봐도 괴로워지지 않는 그 이야기들.




나도 어제 출근을 했어. 평일 공휴일은 우리같은 사람들에게는 휴일이 아니라 '대휴가 발생하는 근무일'에 불과해서 사실 별로 감흥 없지ㅎㅎ 어쨌든 적잖은 사람들이 여유를 즐기고 있을 날이었지만, 우리 신문은 아프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엑소더스, 아이티의 참혹한 지진 현장, 정치권에서 또 다시 벌어지는 옥신각신한 싸움들을 이렇게 실을지 저렇게 실을지 온종일 고민하는 날이었어.


신문도 참 일상성이 강한 매체야. 저녁 라디오와는 달리, 대부분이 즐겁지 않은 일들로 채워졌다는 게 차이점일까? 무언가가 문제고, 무언가가 끔찍하고, 무언가가 화가 나며, 무언가가 황당하다는 그런 내용들이 8할을 차지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은 미담기사를 좋아하지만, 그런 것만 발굴하는 건 우리네의 역할이 아니라서겠지.




편집부의 시간은 공장처럼 흘러가. 하루에 정해진 세 번의 시간에 세 번의 판을 완성해야하거든. 오후 5시, 오후 9시, 오후 11시. 매일 데드라인이 다가올 때마다 긴장의 피치가 올라가. 진작 출고됐어야 할 기사들과 제목들은 늘 제때 오지 않아. 시간은 째깍째깍 가는데, 각 부 당번 기자들과 부장, 부국장들은 와서 이건 느낌이 좀 안 맞는다거나 이런 단어가 하나 들어갔으면 좋겠다거나, 미안한데 이 기사 지금 고쳐도 되느냐 같은 요구사항들을 계속해서 전달해와.


"완성된 면들은 빨리빨리 강판(제작 마감)해주세요!!"같은 외침이 어디선가 들리면 이미 많이 늦었다는 뜻인데, 나는 여전히 "이 부분 이상한데 어떻게 바꿀까요" 같은 고민들을 붙잡고 여기 뛰고 저기 뛰어다니지. 명색이 데드라인인 걸 매일같이 어기는데도, 왜 우리는 죽지않고 잘들 버티는지 모르겠어. 남들은 이미 침대에 누워있을 밤 11시가 넘어서도 우리는 머리에 '스팀'이 식지를 않아서, 귀가해도 곧바로 잠이 오지도 않아. 많이들, 퇴근후에 한 두 잔 하고 새벽 두세시가 되어서야 잠든다고 하더라고.




공정 자체만 해도 참 사람 피를 말리는데, 그 내용들마저 피를 말리는 날이면 참 피로하지.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다들 스트레스 역치가 높아졌는지 웬만한 것엔 눈도 깜빡 안해. "저 사람 원래 툭하면 말 뒤집는거 몰라서 난리야?" "지들끼리 치고박고하다가 MB때 처럼 둘 다 뻑나겠지" "뻔히 알면서도 모르고 당한 척하는거야"... 웬만한 충격적인 뉴스들도 얘기(기사 거리) 안되고, 때 되면 반복되는 예전의 그것과 비슷하다며 덤덤하게 여겨.


근데, 결국은 다 생존을 위한 것 같아. 머리로는 예민하고 이해하고 눈으로도 섬세하게 읽어야해. 하지만 마음으로까지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도저히 하루하루를 멀쩡히 보낼 수가 없거든. 그런 자세가 꼭 스스로를 위한 것 만은 아니야. 누군가에겐 목숨이 달린 절박한 이슈가 남들에게는 폭포처럼 쏟아지는 또 하나의 뉴스에 불과할 때가 많거든. 매일 쉼 없이 들이닥치는 모든 뉴스에 당사자처럼 공감하는 게 아니라, 핵심이 뭐고 어떤 부분이 문제인지를 한두걸음 옆에서 짚어주는 정도가 편집자의 역할인 것 같아.


그러니까, 우리는 너무 덤덤해도 안되고 너무 심각해서도 안 되는 거야. 정해진 공정 속에서 정신 붙잡고 뛰어다니며 제 때를 지켜 물건을 만들어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그리고 누군가를 울리거나 감동시키겠다는 이상한 목표가 아니라, 정확하되 인상적인 제목과 편집으로 기사를 포장해 올린다는 목표. 내 일상을 굴리는 건 이런 것들이야.


남들의 일상을 고요하고 행복하게 유지시키는 일은 언니를 비롯한 누군가가 해주고 있을테니, 우리는 세상의 단맛 짠맛 매운맛을 MSG 자제하며 적당하게, 제 때 확실하게 그 일상에 공급해야지. 내일자 신문은 너무 맵고 쓰지 않길, 오늘의 일은 너무 다급하지 않길 기원하며 오늘도 이만 출근해볼게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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