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디오피디의 편지_8
요새는 가볍거나 밝은 콘텐츠에 손이 자주 가더라. 피곤한 하루에 다른 누군가의 슬픔, 어두움, 심각함, 우울, 분노를 얹을 엄두가 나지 않더라구. 이렇게 이기적인 현대인이 되어가는 것인가 씁쓸하면서도 여전히 나를 지키기 급급해.
기사를 읽는 독자로서, 한때는 썼던 전 기자로서, 기사들을 살펴보고 고민하는 과업을 네가 매일 해내는 모습이 대단하다고 생각해.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의료인들을 보면서도 비슷한 느낌이었거든. 생명을, 지켜보는 수많은 얼굴들을 내 작은 몸으로 어떻게 감당하지? 그런데 네 말대로 '정확히', '목표'를 갖고 그냥 해내는 거였어. 그저 매일매일.
라디오 피디도 누군가의 일상을, 수많은 귀들을 지켜야 하니 비슷한 입장일 거야. 일상과 나란히 걷는 라디오... 저마다의 일상은 다르겠지. 시사 프로그램까지 가지 않더라도 말이야.
MBC 표준FM '여성시대' 조연출을 했었어.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사연이 쏟아지더라. 평범한 하루를 이야기하는 편지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편지는 더 많아. 일평생의 한을, 끝이 보이지 않는 삶의 고난을, 병마와 싸우는 순간을, 하늘을 향한 애절한 그리움을, 어둠 속 희미하지만 잡아야만 하는 희망을 꾹꾹 눌러쓴 이야기들과 매일 만나게 돼.
지금 하고 있는 '꿈꾸는 라디오'에서도 그래. 저녁 8시에 시작하니 저녁 먹고 산책하고 있다는 평화로운 이야기도 물론 많지. 가정 폭력으로 슬픔이 마음에 고여 있지만 씩씩하게 꿈을 좇는 청소년, 돌아가신 아버지의 아이디로 로그인해 문득 덮쳐오는 그리움을 남긴 딸, 코로나19로 장사가 안 된다는 자영업자, 비 오는 날에도 세 식구 먹여살리려고 배달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가장의 이야기도 '꿈꾸라'에 담기는 일상이야.
라디오가 일상의 친구라면, 우리의 '일상'이라는 것은 어떤 걸까? 편집기자인 네가 신문에 기사를 어떻게 배치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피디인 나도 사연을 채택할 때마다 고민을 거듭하곤 해.
마냥 한가로운 이야기를 하자니 어쩐지 위선 같고, 현실의 깊은 단면을 들추자니 지친 하루를 마치는 이들의 시름을 깊게 하는 것 같고. 실제로 우울한 사연을 방송하다 보면 항의 문자도 가끔 와. 가뜩이나 힘든데 남의 힘든 이야기 듣고 싶지 않다고. 정답은 없겠지. 어름사니처럼 그때그때 느껴지는 균형을 애써 맞추는 게 최선일 거야.
올해엔 개인적으로 어두운 동굴을 지나와서 그런지 유독 살아가는 게 참 고단하다고 자주 되뇌어. 그 고단함을 좋은 이야기로만 다독이고 싶다가도, 나만 고단한 게 아니라는 다정한 포갬이 더 위로가 될 때도 있음을 지나치지 못해.
이러나 저러나 오늘의 저녁 8시에도 청취자들이 보내오는 이야기를 가만 들으며 비슷한 고민을 하는 게 최선이겠지. 신청곡으로 옥상달빛 노래가 자주 들어오는 게 다 그런 마음 때문인가봐. 스스로를 포함해서 모두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일 거야. '수고했어, 오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