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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나팔

by 민진

꽃송이가 흔들린다. 고개를 숙인다. 빗방울이 그대로 부딪혀온다. 밤새 시달린다. 바람 앞에 등불이다. 꽃등이 되어 그네를 탄다. 향기를 실어 보내는 것은 잊지 않는다. 이파리가 푸스스 몸을 뒤챈다. 꽃인들 바람비를 피할 수 있으랴. 비 머리 하며 파르르 떤다. 춤사위가 달라진다.


그이는 봄이면 널찍한 수레에 아무렇게나 키운 자금자금 한 화분들을 가지고 나온다. 어미닭이 병아리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구경하러 오는 양. 이제 갓 깨어나 물기 마르지 않는 병아리들처럼 예쁘지 않은 화초들이 어설퍼 보인다. 시장에 갈 때마다 나는 그 앞에 쭈그려 앉는다.볼품은 없지만 봄소식을 가져온 병아리 한 마리 품고 와야만 할 같은. 조무래기 같은 야생화가 기지개를 켠다. 이리저리 살핀다. 집에 없는 것들로 두어 개 고른다. 젖은 몸처럼 달라붙어있어 별 볼일 없어 보이지만 땅심을 받아 자라기 시작하면 병아리 떼 종종종 봄나들이 가는 것처럼 곱상해진다. 거기다 꽃까지 꺼내서 척척 몸 이곳저곳에 붙이기 시작하면 아기를 보는 듯 꺼벅 넘어간다.

“신랑 가고 집에 혼자 있으면 뭐하노”

“심심해서 나온다 아이가”

입술이 빨간 중년의 아줌마는 남편 먼저 떠나보내고 집에 있기 적적하다. 아이들은 다 객지로 떠나고. 겨울을 지난다. 어서어서 물을 올리라고 꽃 싹들을 재촉한다. 여기저기서 모은 화분들은 모가 난다. 이가 나가거나 찌그러지거나 개중엔 아무렇지도 않은 것도 있다. “내한테서는 인물이 이래도 즈그 집 찾아가면 모두 꽃 각시가 될텐데 뭘.” 돈도 사야겠지만, 시간을 팔러 나온다. 사람들이 지나는 볕 좋은 곳에 앉아 이 사람 저 사람 바라본다. 한 사람 다가와서 꽃 키우는 방법을 물어본다. 아주머니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도 궁금해한다. 일부러 말을 덧대고 싶어서다. 사면 좋고 안 사도 괜찮다. 꺾꽂이가 잘 되고 잘 자라는 것들로만 얼굴을 내민다. 옹색한 그릇에 얹혀있는 작은 꽃들은 초라하다. 수줍다. 날이 흐른 뒤에 발갛게 피어날 이쁨만 가지고. 그렇게 채워진 식구들이 몇. 골목 어귀를 지키고 있는 아지매가 꽃처럼 보여 온다. 이참에는 무슨 꽃이 나올까. 어떤 이야기가 묻어올까. 비에 애기들은 잘 있는지 궁금해진다.


작년에 아는 언니와 함께 지나다 그 앞에서 멈췄다. 엔젤 트럼펫이 자그마하다. 기회가 되면 한 그루 들여야지 하고 있던 차에. “이거 얼마예요.” “삼천 원” “내가 사 줄게” 빰빠라 빰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전에 살던 곳에서는 빛이 옅어서 잎만 무성했었다. 볕 바라지에 오니 꽃을 실컷 키울 수 있다. 천사의 나팔이 울려 난다. 냉골을 싫어하는 것이 아쉽다. 삽목 한 것과 자란 것을 아담하게 잘라 거처하지 않는 방에 둔다. 봄은 온다. 분갈이를 해주니 자라기 시작한다. 내 키를 훌쩍 넘었다. 원래 뼈대가 저렇게 컸었던가 싶게. 작은 것은 꽃을 선물해 준 언니네 집으로 보낸다. 승합차인데도 겨우 들어간다. 향기를 흩날리고 있으리라.

언니네에서 핀 천사의 나팔


지난해 서리가 내려 얼까 봐 잎 지고 꽃 세 송이 안쓰럽게 매달려 있기에 거실로 들였다. 사흘쯤 됐을까. 가슴이 두 근 반 세근반 한다. 무슨 일일까. 생각을 더듬는다. 꽃향기 때문인 것 같다. ‘핀’이라는 사이트에 집안에 들이면 안 되는 식물군에 들어 있었다. 환각작용을 일으킨다고. 꽃 때문에 내 목숨이 위태로울 뻔했나. 밖으로 다시 내쫓았다. 꽃 다 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들였다.

마당 한편이 환하다. 수도 없이 피고 진다. 해 질 녘 꽁꽁 싸매고 있던 치마를 풀어놓듯 살포시 꽃잎을 연다. 꽃 국기가 흔들리는 것처럼. 그늘이 푸짐하다. 그 그늘 아래 제라늄을 옹기종기 앉혀놓는다. 향기주머니는 아침과 저녁시간에만 뽐낸다. 현관문을 열어놓으면 울렁증이 난다. 꽃이 있던 자리를 바꾸어준다. 일찍 생장점을 꼬집어 주었으면 저렇게나 크지 않았을 텐데. 식물을 키운다는 것은 늘 새로운 일들과 마주하게 된다. 스물 세 송이. 왜 스물 세 송이를 피울까. 꽃송이를 세워보면 그 정도일 때가 가장 많다. 다음날 더하여 서른다섯 송이가 넘어가기도 하지만. 오월 차를 타고 길거리를 지나다가 천사의 나팔꽃이 수도 없이 피어있었다. 왜 우리 집은 꽃이 피지 않을까 의아했다. 집에 와서 너는 왜 꽃 안 보여주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말을 알아들었나. 그래서 저렇게 많이 피어 올리는 것은 아니리라. 그때는 둥치를 불리고 잎을 키우느라 꽃을 내밀 처지가 아니었던 게지.


긴 계절에 스물 세 송이의 꽃은 연달아 피어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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