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뭐? 여행 가는데 문제집을 가져간다고?
by joyfulmito Jan 29. 2022
겨울에 장기 여행을 하려니 아무래도 짐이 너무 많다. 상자 하나에 쌀, 채소, 김, 카레 등의 식재료를 넣고, 또 한 상자에는 멸균우유와 차에서 먹을 간식, 아이스박스에는 김치 등 냉장 보관이 필요한 식재료를 넣었다. 필요한 것들은 여행하면서 그때그때 살 계획이라 집에 있는 것들만 대충 챙겼는데도 먹거리만 벌써 3박스라니. 그날그날 필요한 식재료만 골라서 숙소에 갖고 들어가기 위해 장바구니도 하나 넣었다. 숙소를 옮길 때마다 짐을 내리고 싣는 것도 힘들 듯해서 매일 쓸 물건은 각자 배낭에 넣고 여분의 옷들은 트렁크에 챙겼다. 짐을 줄인다고 줄여도 차가 꽉꽉 들어찼다. 짐을 너무 줄이면 여행 중에 생활하기가 불편해지고, 짐이 많아지면 여행 중에 들고 다니기 불편해지니 짐을 꾸릴 때마다 빠지게 되는 딜레마다.
짐을 싸면서 “문제집도 들고 가고 일상이랑 최대한 비슷하게 할 계획인데, 잘 될까?” 하니 남편이 “여행 가서 문제집은 무슨….” 한다. 꼭 수학여행 갈 때 문제집 들고 가는 애들 있다? 재수 없게. 뭐 이런 분위기다. 하하하
3년 전 3주간 제주살이를 할 때는‘마음껏 놀아라. 실컷 놀아라.’하는 마음이었다. 상 차릴 때 수저 놓는 일 외에는 해야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밥 먹고 나면 마당에 나가 놀고, 지겨워질 때쯤 바다나 관광지를 들렀다 오곤 했다. 아름다운 자연을 마음껏 누리며, 온 가족이 함께 부대끼고 함께 웃으며 참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었지. 그렇게 평화로운 3주가 끝나갈 때쯤 이상한 현상 하나를 발견했다. 제주에 와서 너무 좋다며 신나게 잘 놀던 9살 딸의 징징거림과 짜증이 급격하게 늘어난 거다.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부리니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나면 마음이 더 풍요로워질 거라 기대했는데, 갑작스러운 퇴행이 웬 말인가. 집에 돌아가기 싫어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해 봤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사람이 너무 하고 싶은 것만 하다 보면 하고 싶은 것은 점점 더 많아지고, 하기 싫은 것들을 해내는 힘은 줄어든다. 하고 싶은 것을 실컷 한다고 욕구가 다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거다. 너무 하고 싶은 대로 하며 3주를 보내다 보니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도 참아내지 못하게 된 거였다. 3주간의 여행 결말로는 다소 허무했지만, 그것 또한 큰 깨달음이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는 최소한의 의무 몇 가지를 지워줄 생각이다. 집안일-이 아니라 숙소일이라 불러야 하나-을 돕게 하고 문제집도 몇 권 들고 가서 ‘너도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은 인지시켜 줄까 싶다. 여행을 하다 보면 문제집까지는 못하는 날도 있을 테고, 해 봐야 하는 양도 얼마 되지 않겠지만 긴 여행을 단단하게 유지시켜 줄 힘이 될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문제집 2권이 차가 터지도록 실린 여행 준비물에 당당히 자리를 차지했다.
빠질 수 없는 또 한 가지 준비물은 그림 도구다. 새 스케치북을 가지고 가고 싶어서 그전에 쓰던 스케치북을 열심히 채웠지. 덕분에 뿌듯하게 새 스케치북을 한 권 꺼내고, 드로잉 펜 몇 자루와 고체 물감, 물붓을 챙겼다. 겨울 여행이고 아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이라 현장에서 그리는 어반스케치는 하기 힘들겠지만, 여행 중에 그림을 그릴 생각만 해도 설렌다.
다 챙기고 나니 짐이 많다. 차에 차곡차곡 쌓으며 추억의 게임 테트리스를 한 판 벌인다. 아무래도 테트리스 실력은 남편이 한 수 위다. 어릴 적 놀이들도 다 사는데 쓸모가 있다며 미소 한 번 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