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도 그렇다
“엄마, 마트!”
아이가 하원해서 차에 타자마자 하는 말이다. 언젠가부터 하원하면 동네 마트에 가서 간식을 하나 사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루틴이 되었다. 마트에 가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 그때그때 아이가 꽂혀 있는 무언가를 입고 가거나 들고 가야 한다. 한동안은 어린이집에서는 부끄럽다고 안 입는 근육 슈퍼맨 옷으로 갈아입기도 했고, 배트맨 옷으로 갈아입기도 했다. 어린이집에서 만든 물고기옷으로 변장하기도 하고, 자기가 만든 기타를 메고 가기도 한다.
마트에 간식만 사러 가는 것이 아니라 마트에 있는 계산원 이모와 인사하고 놀기 위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아이에게는 이모에게 무언가를 자랑하는 것이 제일 중요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마트를 빠뜨려서는 안 되고 반드시 그 마트여야만 한다.
아이가 좋아하는 계산원 이모는 원래 알던 분이 아니었다. 아이와 마트에 갈 때마다 인사하고 예뻐해 주셨고 낯 많이 가리는 우리 아이 마음에 이모가 들어와 버렸다. 차 안에서 슈퍼맨 복장으로 갈아입고 위풍당당하게 마트로 들어서서 시선을 집중시키고 이모를 찾는다. 이모가 “어, 슈퍼맨이다!”하고 아는 척을 하면 뿌듯하게 웃으면서 이모와 장난을 치고, 간식을 고르고, 계산하면서 다시 숨기 놀이를 하고 “안녕”이라며 인사하고 집으로 간다. 다 합쳐서 10분 남짓한 이 시간을 위해 왕복 20분, 차 타고 마트에 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시골에 살아서 어딜 가나 어린아이가 많지 않은 편이다. 도자기 카페 한 곳을 제외하고는 노키즈존을 본 적이 없다. 아이가 구토를 잘해서 여러 카페, 식당 등에서 토를 하며 민폐를 끼쳤는데 누구 하나 얼굴 찡그리지 않았고, 오히려 안타까워하며 치우는 걸 도와주셨다. 아이 구토를 안 하게 하는 민간요법을 한참 설명해 주신 사장님도 있었다.(실제 그 방법으로 많이 나아지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어딜 가나 어린아이가 왔다고 주목하고 예뻐하며 말을 건넨다. 마트에서 처음 보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과자 사준다며 골라라고 하기도 하고, 아이 얼굴을 만지기도 하며(아이는 기겁하지만), 인사만 하는 동네 어르신이 만원을 주시고, 동네 만물상에서는 비눗방울을 아이 선물로 준다. 어떤 날은 가는 곳마다 사탕을 받아서 아이의 이가 걱정될 때도 있다. 꼭 말을 걸거나 어떤 행동을 하지 않아도 모두가 눈을 하트로 만들어 아이를 쳐다본다. 일행끼리 속닥이기도 한다. “저 아이 좀 봐. 너무 귀엽지?”
이런 일을 자주 겪으면서 ‘나도 어렸을 때 이런 사랑의 눈길을 받으면서 큰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알아서 잘 큰 것 같은데, 부모님과 조부모님만 나를 키워주신 줄 알았는데 그게 다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른인 나도 가는 곳마다 이렇게 환대의 눈빛을 받는다면 덜 삐뚤어지고 세상을 더 좋아하게 될 것 같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이런 뜻인가 싶다. 어딜 가나 자신의 존재 자체로 환대받고 사랑받으며 큰 아이는 이 세상을 좀 더 따뜻하게 인식하지 않을까.
노키즈존도 부족해 노시니어존까지 생긴다고 들었다. 요즘은 금쪽이가 너무 많아 교사하기가 힘든 세상이라고들 한다. 동시에 인구가 부족해서 나라의 미래가 걱정된다고도 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어느 날 갑자기, 한 가지의 이유 때문에 약자 배제, 저출생, 교권 침해 등등의 문제가 생긴 건 아닐 거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어린이든 어른이든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서로를 격려하며 따뜻한 눈빛을 보내는 곳이라면 어땠을까?
문제가 발견됐을 때 한 집단을 악마화해서 그들을 처단하는 것으로 퉁치고 넘어가려 하지 말고 우리 모두가 각자 무엇을 잘못한 건지 찬찬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나는 과연 우연히 만난 어린이를 따뜻한 눈빛으로 존중해 줬는지, 이 사회가 힘든 시간을 보냈을 교사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진 적이 있는지 돌아봐야 할 때이다. 아이는 마을 사람들의 눈빛이 키운다. 그리고 사실 어른도 마찬가지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