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고슬고슬한 밥을 좋아했다. 돌솥에 모자란 듯 물 붓고 지어, 적당히 찰기 나는 밥을 푸고 나서 누룽지까지 왕관 모양으로 만들어 냈다. 밥알 동동 뜬 숭늉까지 마시고 나면 한 끼 식사가 푸짐하게 마무리되었다. 꼬들꼬들한 밥만 좋아했는데, 나이를 더 먹고 나니 입맛이 순해져 죽이나 누룽지를 끓여 먹는 일이 잦아졌다.
더구나 나는 해산물 맛을 아는 사람이다. 생선은 구이든 조림이든 일주일에 두 번은 먹어줘야 하고, 진도 꽃게 맛도 알고, 새우는 머리 떼서 먹고, 몸통은 남편 준다. 전복이 싱싱할 때는 씻으면서 게우를 슬쩍 먹어 치우기도 한다. 그러니 해산물 죽은 몸이 기뻐하는 음식인 거다.
망장포, 공천포로 가면서 서귀포의 해안가는 고즈넉해진다. 전형적인 바닷가 마을의 좁은 옛길에 새로 난 카페와 밥집 몇이 있다. 소문난 집엔 대기도 있지만, 그 시간대를 피해 가면 그저 바당에 딱 붙어있는 작은 마을일 뿐이라, 홀로 걷기 좋다. 걷다가 정자 앞에 있는 벤치에서 한가히 오후의 담소를 나누시는 동네 할아버지들 곁에 슬그머니 앉는다. 바다를 마냥 바라보기 좋은 장소와 시간이다.
공천포는 물맛이 좋기로 유명했다. 마실 식수가 귀했던 제주에서 드물게 해안 용천수가 충분했다. ‘맛이 좋은 샘물을 바친다 ‘는 뜻인 ’ 공샘이‘가, 포구가 생기면서 공천포로 바뀌었다. 고려시대에는 현청 및 관청의 제사에 공천포 물을 사용했다.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공천포의 용천수에는 영등물(영등할망물)이라는 특별한 이름이 있다. 사람들은 검은 모래 해변에서 모래찜질하고, 영등물로 씻었다. [visitjeju]
바다를 보면서 걷다가 검은 모래 위로 물이 콸콸 솟는 것을 발견했다. 곁의 동네 할머니에게 묻는다.
"저 물은 짠물이 아니라, 샘물인 거지요?"
"그럼. 그냥 마셔도 돼요. 물이 더 많이 나오는데, 지금은 적어."
그 바닷가에는 으리으리한 고깃집이 없다. 전복 물회나 뿔소라 물회, 전복죽, 보말죽, 전복 보말죽, 톳보리밥, 보말 칼국수와 톳 칼국수를 파는 집들이 몇 있을 뿐이다. 그러니 당신이 조그만 바닷가 마을에서 물회나 보말죽을 먹으려면 들러야 하는 마을이다. 작아서 아름다운 곳이다.
1. 바당길 서귀포점
어제 비바람 치는 사나운 바다를 마주하고, 보말이 듬뿍 얹어진 보말죽을 먹었다.
“보말죽은 어떻게 끓이나요?”
“내장을 떼어내서 갈아서 육수를 만들어요.”
“아하, 녹색이 거기서 나온 거군요.”
톳보리밥을 맛보라고 먼저 준다. 죽의 색감이 낯선 이는 선뜻 손이 가지 않을지 모른다. 첫맛은 고소하다, 씹히는 보말을 즐기다 보면 훌쩍 죽그릇을 비우게 된다. 따뜻한 죽 한 그릇을 먹고 나니 몸이 데워지고, 걸을 힘이 솟았다.
2. 카페 게리가
바당길 바로 옆집이다. 게리는 주인 부부 남편이다. 지난 일요일 아침 게리가 준비해 주는 브런치를 먹었다. 바다를 향한 탁자 위에는 작가 게리 Gery의 책들이 놓여 있었다.
“저녁은 따로 주문할 수 있다는데 요리는 무엇이 있나요?”
“전날까지만 요청하시면, 거래하는 선장에게 부탁하여 그날 잡은 생선을 바비큐해 드립니다.”
일인당 3만 원대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다니, 연말연시에 아이들 다 오면 한 번 오자고 남편과 대화를 나누었다.
3. 탐나는 식당 몸국 고사리해장국
공천포에서 돌아오는 길, 검색해서 몸국집을 찾아 한 그릇 사 왔다. 국수나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하루에 두 끼쯤 잇달아서 먹어도 만족하듯이, 나는 하루에 두 끼를 해물 식사로 해도 좋은 사람이다. 저녁에는 몸국을 데워, 익지 않아 맛이 좋은 파김치랑 또똣하게 먹었다.
몸국은 제주에서 십여 년 전 처음 맛을 알았다. 서귀포는 이중섭 거리에서 하는 봄맞이 축제 때도 돔베고기와 몸국을 낸다. 그렇게 대량으로 설설 돼지고기를 끓여내야 육수 맛이 우러난다.
제주 동문시장에는 나만 아는 몸국 단골집이 있다. 아이폰 고치러 제주시에 갔다가 밥때가 되어 시장 안에 있는 허름한 몸국집에 갔다. 그날 몸국의 베지근한 맛에 눈이 번쩍 떠졌다. 자주 갈 일은 없지만, 그 부근에 가면 반드시 먹고 온다.
4. 바람섬 갤러리
공천포에서 망장포까지 올레 5길을 걷다 만난 갤러리. 강길순의 조형 작품들을 전시하고, 작업하는 공간이다. 작업실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며 작품을 다 보고, 인사라도 하고 가야겠다 싶어 안을 향해 기척을 내었다. 꽤 긴 시간 동안 그녀는 작품들이 담은 의미를 풀어 주었다.
서명숙이 글을 쓴 책 <숨, 나와 마주 서는 순간>은 해녀들의 이야기이다. 그 책에 오랫동안 해녀를 찍어온 사진가 강길순의 작품들이 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_w.aspx?CNTN_CD=A0002159453
이제 그녀는 조형 작품들을 만든다. 뒤늦게 자신에게 잘 맞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여전히 그녀는 해녀들을 주제로 작품을 만들고, 그 갤러리에 전시하고 있다.
"바다가 우는 소리를 아세요?"
그녀는 그 울음을 작품 '절울'에 담았다.
* 이 글의 문지방 사진에 강길순의 <테왁>을 실었습니다.
4. 공천포 식당
물회를 하는 유명한 식당. 공천포에 있는 식당에 가려면 반드시 사전에 전화를 해보고 가야 한다. 폐점 시간이 이르고, 그나마 재료가 떨어지면 ’ 재료 소진, 임시 휴업’을 내걸기 때문이다. 두 번 갔는데, 다 못 먹었다.
거리거리마다
온갖 생고깃집 주물럭집 수산횟집이 난장을 치는 사이로
가만히 가만히 끼어서라도
죽집을 냈으면 한다
찬으로는 나박 물김치
단 하나지만 제일 어울리는 걸로 준비해 놓고
고소하고 삼삼하게 죽 냄새 종일 풍겨
내 죽집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하리
이진명 <죽집을 냈으면 한다> 일부
바당길 옆에 작은 공터가 있었다. 거기 서서 꿈을 꾼다. 젊어서 계속 혼자 살았다면, 바다 곁 마을 한 구석에 이추륵 작은 죽집을 내며 살지 않았을까. 바다에서 나는 싱싱한 해산물들로 전복죽이나 보말죽, 뿔소라죽을 끓이며 테이블 두세 개로 먹고살 수 있었을까?
오늘 아침 ‘서귀포 신문’에서 한 작가는 말했다.
"제주가 사람들의 숨은 감성을 일깨우는 곳이며 특히 예술가에게는 영감을 얻을 수 있는 보물섬이지만, 아무나 살 수 있는 만만한 땅이 아니다."
나는 이제는 새로운 일을 벌이거나, 모험에 나서지 않는다. 그저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다독이고 다지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