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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낀느 Apr 03. 2024

멀리 있는 딸에게 주는 편지


요즘 우리 집 뜰은 은행잎 낙엽으로 덮여 있다. 엄마는 이 길을 걸을 때마다, 너만 할 때 자주 갔던 해인사 삼선암의 입구 길을 떠올린다. 그 조붓한 오솔길의 낙엽에 발이 푹푹 빠지던 그 기억에 막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 같아진다. 우리의 젊음은 대체 어디 갔을까. 너는 젊음을 진정으로 만끽하길 바란다. 한 번 뿐이란다. 젊음은.

     

아침에 시장에 갔었다. 감의 계절이라 과일가게마다 때깔 고운 감들이 지천이다. 작은 소쿠리에 담긴 감들을 잠깐 뒤적여 보고 있는데, 낯선 손이 돌연 내 손목을 딱 때린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성난 목소리의 가게 아주머니였다.

“아침부터 재수 없게.”

어리둥절하다가, 아침에 여자가 와서 물건을 뒤적이면 재수가 없어진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건가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억울했다. 물건을 사려면 그 물건이 괜찮은 지 제대로 보아야 하고, 너도 알다시피 엄마가 남의 물건을 훼손할 만큼 거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 않니. 다만 소쿠리 안에 담긴 물건 중 아랫것들은 어떤지 살그머니 들어보았을 뿐이었다.


아줌마는 자신의 행동이 과하다고 여겼던 지 딴청피고 있다.

어쩔 바를 모르고 잠시 서 있다가 낮게 아줌마에게 말했다.

“사과하세요.”

아줌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방법은 틀렸기에 나는 사과만 받고 싶었다. 그러면 바로 웃으며 돌아설 수 있었다.

하지만 아줌마는 날 모른 체했고, 나는 그저 구경하는 사람처럼 마냥 서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곁에서 장사하는 나이 지긋하신 분이 내게 와서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해하소.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아침에 물건을 뒤적이면 하루 장사를 망친다 싶으니 그런 거요.”

그분의 말씀과 태도가 진지하다.

“네. 아주머니 말씀 들을게요.”

하고 비로소 돌아섰다.     


“딸,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넌 어떻게 풀지?”

“먹는 거나 잠으로 풀었는데 요즘은 수업 많아 못하니까, 노래방에서 소리 지르기.”

“노래 안 하고 소리 질러?”

“소리 지를 수 있는 노래를 부르죠. 메탈이나 락 신나는 거. 아님 대빵대빵 슬픈 노래 부르면서 펑펑 울거나. 혼자 청승맞게 잘 그래요. 기본적으로 단순해서 거의 먹을 거 먹고 잘 거 자고 울 거 다 울면 풀려요. 정말 오랜만에 아이스크림 먹고 행복의 여운에 빠져 있던 참. 280엔이나 하는 하겐다즈 기간 한정 호박 푸딩맛. 눈물 날 뻔했어요.”     


엄마는 혼자 끓어 제 몸 안의 물을 말리는 가장 어리석은 타입이다. 너처럼 소리 지르지도 않고, 미친 듯 노래할 줄도 모르고, 호박 푸딩 맛의 아이스크림을 먹고 행복해지지도 않는다. 그저 아무 말 않고 서 있다가, 그게 풀리지 않으면 나중에 앓아서 구해줘 하고 외치게 되는 미련한 사람이지. 너는 나와 달라서 신기하기도 하면서 안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딸아.

앞으로 네가 살아갈 길에는 노래방에서 소리 지르는 것만으로는 풀리지 않을 설움이나 억울함, 슬픔도 닥치게 된단다. 

     

요즘 나는 심리학책을 많이 찾아 읽으려고 한다. 심리학을 공부하신 분의 이야기에 따르면, 한 가지 방식으로 집요하게 생각하면 신경회로가 잘 뚫린 고속도로처럼 길이 들어, 어떤 상황도 그렇게 비추어지고 비슷하게 반응하게 된단다. 거의 자동반응이 되는 거래. 그러니 어떤 특정 방식으로 고정된 채 사고를 하는 것에서 탈피해서 달리 생각해 보는 것은 많은 노력이 필요하대. 자신의 뇌 건강을 위하여.     


엄마가 요즘 읽은 리처드 칼슨의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라는 책의 한 구절은 이에 대한 답을 준다.

[다른 사람 때문에, 더군다나 자신의 인생에 전혀 중요하지 않은 사람 때문에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 것은 스스로 행복을 가로막는 짓이다. 정 불쾌하면 그 상황을 변화시키든가 그곳에서 나오면 그만이다. 단지 짜증만 내고 있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또 그 책은 이런 제목으로도 이야기하고 있다.

[13. 행복해지려거든 건망증 환자가 되어라.]     


부정적인 생각은 긍정적인 생각보다 더 자극이 강하대. 그래서 그것은 일종의 쾌감이 되어 긍정적인 생각보다 더 사람의 뇌를 차지하기 쉽대. 그러니 우리는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 반드시 그것을 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

중요한 것은 바로 너의 뇌 건강이란다.


앞으로 무수히 많은 어려운 시간들을 만날 때, 엄마처럼 가만히 서 있지만 말고, 소리를 지르든, 단것 먹고 푹 자든, 아니면 상대와 해결책을 모색하든, 좀 더 적극적인 자세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그게 바로 너 자신을 위하는 길이고, 네 뇌가 아프지 않고 살아가는 길이니까.     

몸도 정신도 건강한 젊음을 보내거라, 딸.        

  

2011년 11월 8일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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