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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낀느 Jun 19. 2024

초등학교 1학년 딸의 그림일기

1997년 7월 10일 

       제목 : 심부름

       나는 심부름을 했다. 발에서 ‘짝짝짝 소리가 났다.’

       즐거운 심부름을 한 것 같다.     

 

7월 15일

       제목 : 엄마가 마늘 깐 모습

       엄마가 마늘을 깐 것을 보았다. 참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7월 16일

       제목 : 비가 온 모습

       비가 왔다. 빗방울들이 날 보고 웃어서 나도 웃는다.     


긍정적이었던 아이. 집에 손님만 와도 신나던 아이. 여행 가면 어느새 없어져서 찾아보면, 낯선 사람 곁에서 주위를 뱅뱅 돌며 얘기 걸어주기를 기다리던 아이였다. 그렇게 밝았던 아이인데, 사춘기를 거치며 엄마가 아이를 점점 더 말 수 없는 아이로 만들었다. 그게 평생 미안했다.   

  

7월 20일

       제목 : 두드러기

       두드러기가 났다. 어지럽고 머리가 아팠다. 어머니는 뚝 그치라고 말하였다. 나는 꾹 참았다.     


7월 23일

       제목 : 할머니가 이사 간 것

       할머니는 오빠와 나의 방을 만든다고 이사를 가셨다. 나는 할머니가 이사 가는 것이 슬퍼서 울 뻔했다.

     

아이의 글에선 내 삶이 보인다. 시집살이 17년. 그 후 아이들의 할머니가 이사 가던 날. 지금도 선하게 그날의 내 모습이 보인다.      


7월 31일

       제목 : 엄마의 생신

       엄마 생신은 즐거운 날이죠!

        “엄마의 생신을 축하합니다.”      


8월 1일

       제목 : 빵

       빵을 먹다. 오빠는 빵을 구워서 탄 빵을 먹었다. 준비물은 쨈, 빵, 우유, 컵이다. 나는 오빠가 탄 빵을 먹어서 걱정이 됐다. 배탈이 안 나서 다행?     


8월 6일

       제목 : 잠자리

       잠자리를 잡았다. 어떤 아이가 잠자리를 보면서 말했다. 누나 잠자리 세  마리 잡았나? 내가 말했다. 그래.     


8월 8일

       제목 : 맛있는 저녁밥

       밥은 정말 맛있다. 반찬은 김치찌개, 물김치, 파김치이다. 내가 좋아하는 반찬은 김치찌개이다. 맛있다.     

큰애가 시시때때로 반찬을 갖춰서 먹여야 겨우 밥을 먹는데 반해, 딸은 이유식을 따로 해줄 필요도 없을 만큼 잘 먹는 아이였다. 많이 먹지는 않아도 늘 맛있게 먹던 아이. 덕분에 열 살이 되도록 병원에 가본 적이 거의 없었다. 효녀, 내 딸.      


8월 10일 

       제목 : 얼음

       얼음을 먹었다. 얼음 하나를 먹으면 입이 꽁 얼어서 시원하다. 얼음이 나를 보고 말을 하는 것 같았다.


8월 16일

       제목 : 노래와 춤

       춤을 춘다. 카세트를 틀어서 춤을 추었다. 할머니가 춤을 추는 것을 보았고, 정원이 언니랑 신나게 춤을 추고 있는데 지원이 언니가 자다가 깨었다.     


8월 18일

       제목 : 코디스티커 놀이

       정욱이가 코디스티커를 사자고 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코디스티커가 무엇이야.”

       “응 옷을 떼었다 붙였다 하는 거야.” 

       “그렇구나.” 

       그렇게 신기한 게 있다니.     


8월 24일

       제목 : 미녀와 야수

       엄마와 할머니와 이모 둘과 이모부랑 미녀와 야수를 보러 갔다. 나는 처음에는 가기가 싫었다. 그런데 나중에 끝날 때는 재미있었다. 이모의 결혼식, 자유의 여신상, 그리고 미녀와 야수가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8월 29일

       제목 : 오랜 친구 민주

       나는 미국과 서울을 갔다 왔다. 미국을 갔다 돌아올 때 비행기에서 가족과 좌석이 틀려서 좀 속상했다. 이 이야기를 민주에게 조금씩 말해 주었다.  

   

8월 31일

       제목 : 팥빙수

       팥빙수를 먹었다. 엄마가 만들어 주었다. 준비물은 젤리, 얼음, 떡, 연유, 기계, 초코시럽, 그리고 숟가락이다. 나는 너무 많이 먹었다. 엄마가 웃었다.  

   

9월 3일

       제목 : 꿈

       무서운 꿈을 잠깐 꾸었다. 그때 나는 집에 있었다. 날 잡아서 마녀가 예쁘게 될라고 할 때 슈퍼 K에 나오는 하늘이가 날 구해주었다. 정말 멋있었다.     


9월 7일

       제목 : 잠자는 집 속의 엄마

       엄마가 아침 10시부터 저녁 7시까지 잠을 잤다. 그런데 엄마가 1시에 깨워 달라고 해서 깨웠는데, 안 일어났다. 그때 오빠가 왔다. 그래서 6시 45분에 오빠와 엄마 귀에 대고 기상!     


1997년은 내가 마흔 살에 들어간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였다. 딸은 이맘때 늘 내 등을 보고 살았다.
딸이 등뒤에서 말했다.
“엄마, 미안한데 내가 물어볼 게 있어.”나는 돌아서서 딸을 안으며 말했다. 
“딸,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미안하다고 말 안 하는 거래. 그런 말 할 필요 없어.”
내가 늘 딸에게 미안했다.    

 

9월 11일

       제목 : 오빠의 눈물

       오빠가 학교를 마치고 오면서 울고 왔다. 그런데 엄마에게 오빠가 학교를 안 가고 차라리 친구, 선생님, 가족을 놔두고 산다고 했다. 그때 나도 눈물조차 나올 뿐이었다.     


6살 차이 나던 오빠의 친구들이 집에 오면 어린 딸은 수줍은 표정으로 문간에서 오빠들의 놀이를 지켜보았다. 중학생 남자애들은 어린 여자아이에게 관심도 없었다. 나이 차 많이 나는 남매란 어린 시절에는 친구가 될 수 없었다.     


9월 13일

       제목 : 뷔페

       가족 모두와 뷔페에 갔다. 처음 와서 너무 편안했다. 그런데 접시가 너무 컸다. 엄마가 여기는 3번 이상 먹어야 된다고 했다. 오빠는 너무 많이 먹었다. 돌아올 때 달을 보았는데 추워서 감기가 들을 것 같았다.  

   

9월 20일

       제목 : 갈비탕

       갈비탕을 먹었다. 처음 먹었을 때는 뜨거웠지만, 나중에는 속이 따뜻했다. 그래서 빨리 밥을 말아서 깨끗하게 먹었다.     


지금은 내게 없는 딸의 그림일기. 내게는 혹독한 세기말이었지만, 그 속에서도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잘 자라주어 늘 고맙고, 미안하다. 내 딸.     

      

Pixabay로부터 입수된 Jill Wellington님의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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