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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낀느 Mar 26. 2024

엄마의 책상



일요일 오전, 아는 화가가 전화 왔다.

“뭐해요?”

“김치 담아요.”

“상상을 못 하겠네.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글이나 쓰는 사람일 거 같은데.”

“몸뻬 입고 부엌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김치 치대는 중이요.”

글 같은 거 안 쓸 때 잘하는 게 밥밖에 없던 여자였다.


짧은 대화를 끝낸 후 섬광처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 앉은뱅이책상. 그것도 접어지는 상을 사면 되겠구나.


내 책상은 식탁이고, 부엌은 엄마방이다. 공용시설을 공부방으로 쓰다 보니, 식구들이 식탁에서 식사나 간식하려면 어질러 놓았던 책들을 주섬주섬 치워야 한다. 식탁에서 거실에 놓인 컴퓨터 테이블 위에서, 혹은 이불에 엎드려 책 보기도 한다. 책 들고 왔다 갔다 하는 하루이다.

‘내게도 책상이 있으면.’

하는 바람이 절로 생겼다.

하지만 서른 평 아파트에 사니 아이들 공부방은 있어도 엄마의 공부방까지 바랄 염치가 없다. 엄마의 책상조차 둘 자리가 없다.           


아침에 시장에 갔다. 대형마트에서 건조하게 장 보기도 하지만, 넉넉히 시간을 두고 재래시장에서 장 보는 것은 알찬 즐거움이다.

아이가 두드러기가 한 번 생긴 후 여간해서 고등어를 사지 않는데, 오늘 생선차에서 갓 내린 고등어는 진짜 등 푸른 생선이다.

“고등어 두 마리 찌개거리로 해주세요.”

김치를 미리 헹구어 놓았다가, 저녁에 김치 위에 얹어 고등어찌개를 해야겠다. 그런 짭짤하고, 걸쭉한 반찬을 식구들이 즐긴다.


정구지(부추)가 짤막하니 맛있어 보인다. 한 단을 산다. 시어머니는 늘 그러셨다.

“이 맘 때 정구지는 약이다.”

채소 파는 아주머니도 한마디 거든다.

“이런 정구지는 보약보다 낫소.”

내가 좋아하는 미나리도 생생하여 푸짐하게 산다. 이른 아침의 장 물건은 모두 살아있는 것 같다.

꼬맹이는 담치(홍합)와 매운 고추 잘게 다져 넣고, 정구지 부침개를 해주면 코를 킁킁대며 냄새 맡곤 행복해한다.


해산물 가게로 간다. 젊어서는 고기 맛밖에 몰랐는데, 나이 들며 환장하게 미각을 돋우는 것은 대부분 바다에서 온 것들이다. 굴 씻다가 그 냄새에 도저히 참지 못하고, 반을 생으로 먹어 버린 적이 있다. 굴, 미역들이 나오는 철이 되면 그래서 입맛이 좋아진다. 이제 굴도, 미역도 별반 재미가 없다. 대신 게장이나 좀 살까.

멍게도 샀다. 시장 구루마에서 파는 멍게가 싸다. 상품 2kg에 4천 원.

“아지매, 이런 멍게는 식당에도 없소. 내가 아침에 직접 산지에서 가져오는 거니까. 이것 보이소. 껍질 까니 탱탱하게 오므라든다 아닝교, 이기 싱싱하다는 표십니더.”

총각은 멍게 3kg를 까며 열두 번도 더 그 말을 반복한다.


재래식 시장에 가면, 소고기나 비싼 조기를 사지 않는 한 돈 만 원으로도 푸짐하다. 그득해진 시장바구니를 들고 한참을 걸으니, 약간 시장기가 느껴져 구루마에서 파는 떡볶이를 사 먹는다. 무슨 고춧가루나 고추장을 쓰는지, 유달리 선홍색을 띤 떡볶이가 약간 수상쩍긴 하지만, 아주 맛있었다. 200 ×5=1000원어치 간식을 한다.


드디어 오늘 목표가 되는 집을 발견했다. 그릇 파는 큰 가게이다. 오늘 내가 찾는 것은 접어지는 작은 상이다. 원목으로 된 세련되고, 자리 많이 차지하는 그런 탁자가 아니라, 젊었을 적 자취하던 시절 쓰던 자그만 상을 사러 온 것이다.

“상 얼마예요?”

“9,000원이요. 에누리는 없소.”

너무 싸서 속으로 좀 놀란다.

“에이, 아저씨, 까만색은 없어요? 책상으로 쓸 건데.”

“아, 책상으로 쓸 거면 푸른색이 눈도 안 아프고, 최고지요.”

그러면서도 물건을 뒤적이다 까만색 상을 찾아내 준다.


짐작보다 가벼운 상과 묵직한 장바구니를 들고 귀가했다. 장 본 것을 대충 간추려 놓고, 깨끗한 수건을 적셔와서 구석구석 상을 닦는다. 그리고 꼬맹이 방 한 귀퉁이에 상을 놓고, 내 책이랑 사전들을 몇 개 올려놓았다. 바로 곁 책장에 빼기 쉽게 내 책들을 꽂아 놓았다.


와하하! 우리 집에 내 책상이 생겼다.

엄마의 책상이.

드디어 책 들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생활 끝이다. 이제 여기서 공부도 하고, 논문도 써야지. 책상을 자꾸 쓰다듬어 본다. 


(1997년 봄)     


지금 나는 공부방도 있고, 바깥을 향한 창가에 2m 길이의 붙박이 책상을 쓰고 있다. 구천 원짜리 접어지는 상이 이렇게 거대한 책상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책상이 훌륭하다고 더 만족하고, 더 많은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미국에 한달살이 가기 전 내가 동생에게 사달라고 부탁한 것은 접이식 책상이었다. 그 작은 상에 앉아 글도 쓰고, 학생들 수업도 했다. 나는 어디 가나 그 작은 책상 하나만 있으면 족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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