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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리 Jan 02. 2021

한-일 인식에 영향 끼친 중화 사상

 


 중국, 일본, 한반도 나라 등의 국제 관계를 역사적으로 규정할 때 큰 영향을 끼친 ‘번(蕃)이라는 용어가 있다.     

  

‘번’은 본래 천자의 번병(藩屛)이란 의미로,  중국이 일반적으로 '이민족'을 가리키던 말이다. 

한(漢)대부터 사용되었고 실제로는 위진(魏晉)시기를 거치면서 본격 사용되어 당(唐)대에 일반화 되었다. 

전근대 시기, 중국이 하나의 세계 무대의 중심을 형성하면서(pax sinica), 중국 밖의 다른 나라를 가리키는 용어로 정착한 것이다.


자국이 '중화'라는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번’국= 타국은 ‘오랑캐’였다. 인륜이 행해지지 않는 '이적(夷狄)'으로 인식했다.  ‘인면수심(人面獸心)’(『자치통감』 권193 貞觀4(630)년조) 이란 표현처럼, 오랑캐라 천시하고 차별한 것이 중국적 화이관(華夷觀)이었다.


 이처럼 중국에서 사용된 ‘번’국 개념은 자국 우위와 상대국 비하를 의미하는, 국제관계상의 자국 중심적, 고정적 시선을 나타내는 표현이었다.      

 그 속에서 "번이(蕃夷)의 이민족 지배를 전제로 하는 일종의 제국법(帝国法)"인 중국의 율령법이 만들어졌다(吉田孝<隋唐帝國と日本の律令國家>). 



 문제는, 그 중국의 율령법이 일찍이 만주,  한반도,  일본 지역 등에 보급되면서 ‘중화, 화하(華夏)’나,  ‘번’, ‘이적’과 같은 개념도 동시에 전파되었다는 점이다. 자국은 우월하며 주변의 나라들은 ‘야만국’이라고 규정짓는 배타적 세계관이 동아시아에 확대된 것이고, 적어도 천년 이상의 세월을 거쳐 존속되었다.  


몇 년 전이었던가. 중국의 화북 지방을 답사하는데, 가이드의 중국 여성이 '중국이 세계 최고'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것을 들으며 가슴이 철렁했던 기억이 난다.




이러한 ‘번’용어를 일본이 고대국가 때부터 받아들였다. 

중국의 자국 미칭인 ‘화하(華夏)’란 용어를 일본은 자국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였다 (『續日本紀』靈龜원년9월庚辰, 延曆9년5월庚午 등).

그리고 당시의 상대국, 즉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 신라나 발해에 대해 (뒤의 고려, 조선에 대해서도) ‘번국’이라 칭하였다((賦役令16外蕃條의 穴記,  賦役令15沒落外蕃條의 古記, 公式令1詔書式條의 古記, 選敍令11散位條의 古記, 雜令29蕃使往還條의 義解, 延喜慰勞詔書式,延喜大藏省式 賜入蕃使條).     



일본 학계에서는 이것이 곧 "한반도에 대한 적대의식 또는 우월감의 표현"이었다고 해석해 왔다.

기록에 보이는 한반도와의 외교적 관계에 대해서도 이 같은 '율령적 인식'을 실재의 현상으로 강조하면서, 일본중심의 입장에서 대외 관계를 설명하였다. 

 '화이사상(華夷思想)'의 관점에서 논의하면서, 일본은 고대국가 시절부터 스스로를 '제국(帝國)'형 국가로 표방하였으며, 주변의 나라들을 '번국(蕃國)'이나 '이적(夷狄)'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石母田正<天皇と諸蕃>,酒寄雅志<華夷思想の諸相>,石上英一<古代東アジア地域と日本>등).


     

                        

과연 그러했을까.     


살펴보면 일본의 경우, 애초 ‘번(국)’ 에 대해서는 중국과는 달리 사실상 ‘도나리노 구니’= ‘인국(隣国)’정도로 인식했다는 점이 발견된다.  


<일본서기>에는 ‘번(국)’을 ‘도나리노 구니(隣国, 옆나로)’로, ‘번인(蕃人)’을 ‘도나리노구니노 히토(옆나라 사람)’ 로 훈독하는 것이 발견된다. 

또 그들이 당시 절대적 가치를 두었던 당에 대해서조차 ‘번’으로 규정하며(<엔기시키(延喜式)>大蔵省式 蕃使条ㆍ賜客例条), 당과 발해를 구별 없이 ‘원번(遠蕃)’이라 부르기도 하였다(『日本三代実錄』貞観15(873)년5월27일条; 『日本紀略』延暦14(795)년7월辛巳条).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서도 “대한(大漢, 중국), 삼한(三韓, 한반도)의 족(族), 이를 제번(諸蕃)이라 한다”고 기록하는 등, 중국,  한반도 각국 간의 명확한 구별 없이 ‘번국=옆 나라(隣国)’란 정도의 의식에서 혼용되고 있었음이 확인가능하다(『続日本紀』宝亀9(778)년10월乙未条, 『類聚三代格』延喜3(903)년 8월1일 太政官符 등).


 또 일본에서는 중국이 ‘번’ 밖의 지역에 대해 불렀던 ‘절역’의 개념도 들어와 사용되었다. 

 이를 실제 정사의 기사 속에서 확인해 보면 ‘절역’이란 당, 또 때로는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에 대한 지칭이었다(『續日本紀』慶雲元(704)년11월丙申條, 慶雲4(707)년5월壬子條, 寶龜7(776)년4월壬申條, 養老元(717)년11월甲辰條,『三代實錄』貞觀3(861)년8월庚申條 등). 


 당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는 ‘번역(蕃域)’ 밖의 ‘절역(絶域)’이었던 일본은, 또한 자국을 중심으로 두고 한반도의 제 국(고구려, 백제 등)과 당을 마찬가지로 ‘절역’으로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번국’과 ‘절역’을 구분하려는 명확한 의식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당의 세계관 속에서는 ‘번’과, ‘번’밖 지역인 ‘절역’이 구별되어 인식되었던 것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동 개념을 들여와 사용하기는 하였으되, 실제적으로는 중국과 같이 개념적 차이를 인식하지 않고 혼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당의 율령 상에는 ‘번인(蕃人)’과 ‘이적(夷狄)’이 동일하게 인식되었는데 비해, 일본의 율령 하에서는 양자가 구별되었다.  일본 국내의 미정복민 에미시(毛人)・하야토(隼人)를 ‘번’과 구별된 ‘이적(夷狄)’으로 인식하였다(賦役令集解15没落外蕃条 古記).


즉 당의 율령에 있어서는 혼용되었던 ‘번(蕃)=이(夷, 오랑캐)’의 개념을, 일본이 수용하면서 ‘번’과 ‘이’라는 개념으로 구별하여 사용하였던 것이다.     


 일본에 있어서의 ‘번’이란 개념이, 국제 정치적 상하관계의 표명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는 단순한 ‘옆 나라’정도의 개념으로 활용되었던 것처럼, ‘이적’의 개념 역시 열도 내의 미정복 민족을 가리키는 한정된 개념으로 사용되어 사실상 중국과는 달랐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일본의 율령이나 정사의 기록 속에 보이는 ‘번국’에는, ‘인국(隣國)’즉 단순히 '옆 나라'라는 정도의 인식이 있었다. 중국의 율령적 개념을 들여왔어도 당시의 일본인들이 이를 이해하고 활용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었음을 유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조정에 의한  ‘화이(華夷)의식’, 또는 ‘제국 질서의 관철’이라는 측면을 중시하는 관점에서 종래의 일본-한반도 관계는 우월 의식의 강조와 거듭된 긴장과 충돌에 중점을 두어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그 긴장이라는 것도, 전란의 시기를 제외하고는, 당시의 양국 관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정도의 것은 아니었다는 점은, 오랜 세월을 통해 이어진 양국 교류의 사실이 이를 증명해 준다.           



문제는 상대에 대한 그 ‘인식’인 것이다.


각각의 필요성에 의해 교류를 하면서도, 여차한 경우에는 습관처럼(기록의 글자만 보고, 배운대로, 들은대로) 상대국을 ‘번국’ 즉 ‘야만국’‘오랑캐’라 부르며 비하하였다. 

일본에서는 옛 한자 기록에 근거하며 한반도가 예전부터 일본의 ‘번국’ ‘조공국’이었다는 주장을 반복해 왔다. 이런 인식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확인된다.   


고대 이후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해 온 중국적 화이(華夷) 이념 – 국가간 상하 관계를 따지며, 자국 우월을 앞세우고 상대국을 낮게 보던 세계관.      


이런 이념에 영향 받아, 이를 뿌리 깊게 유지하며 재생산 해 왔던 것이 한일 관계에 대한 이해의 틀이었다.




그 먼 옛날부터 중국이 자국을 중심으로 보며 주위 나라들을 얕보던 이런 인식을, 아직까지도 우리가 논의하며 더 들고 갈 필요가 있을까.


미래 시대에 걸맞는 멋진 세계관을 공유하며 훌쩍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진다.


어떤 세계관이 되어야 할까?


문뜩, 우리 단군의 ‘홍익인간(弘益人間)’ 이념이 떠오르는데, 이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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