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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탄 Sep 23. 2019

때로는 이토록 쉽게 풀리는 불쾌

오늘의 행인1 : 유쾌한 개와 주인



반년도 훌쩍 지난 수치를 꺼내어 곱씹으며 걷던 중이었다. 왜 그때 난 내 할 말을 다 하지 못했나, 왜 바보같이 웃으며 당하고 있었. 아직도 바득바득 이가 갈리는 기억이었다.

후회는 (실행 가능성이 거의 없는) 작정으로 이어졌다. 언젠가 다시 마주치게 된다면 그래서 딱 한 마디 던질 수 있다면 뭐라고 해야 최대한 열 받게 할 수 있을까. 그녀가 가장 불쾌해할, 이 수치를 그대로 돌려 수 있는 말을 고르고르는 거다.


그런데 그때, 골목길에서 웬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쌩-하고 달려 나왔다. 목줄은 있었지만 잡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줄을 땅에 질질 끄어가며 강아지가 저토록 헐레벌떡 달려온 이유는 낙엽이었다.

바람이 좀 강해지나 싶었는데 낙엽이 날릴 정도였구나. 그제야 고개를 들어 바람을 좀 느껴봤다. 낙엽이 바람 따라 휙 하고 날아오르니 강아지도 같이 휙 하고 날아올랐고, 그걸 무슨 부메랑처럼 입으로 낚아챘다. 그 발랄함이 너무 웃겨 순간 웃음이 났다.

낙엽을 입에 문 채 어디론가 후다닥 뛰어가서 보니, 목줄을 놓친 주인이 골목에서 뒤따라 나오고 있었다. 강아지는 제 주인의 손에 낙엽을 전해줬는데, 그 손엔 이미 이걸 엄청 반복하고 있었다는 증거의 낙엽 수십 장 보였다. 저걸 가지런히 받아주고 있는 주인도 웃겨서 또 웃어버렸다. 이번엔 소리까지 내고 푸학, 웃었다가 실례인 것 같아 얼른 웃음을 풀고 무표정을 만드는데 주인 이미 내 얼굴을 본 듯했다.


“아유~ 얘가 낙엽을 너무 좋아해서.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난리네요.”


물 만난 물고기의 진수를 보여주려는지 강아지가 또 한 번 펄쩍 날아올라 낙엽을 낚아챈다. 무표정을 만드는 데 실패하며 슬쩍 웃었더니 강아지 주인 활짝 웃는다. 그 웃음이 너무 활짝이라  또 푹 소리를 내며 무방비로 웃었다. 모르는 사람이랑 말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이 저절로 나오고 있었다.


“네. 강아지 너무 귀엽네요. 저기서부터 보고 웃으면서 왔어요.”


내가 모르는 사람하고 웃으면서 말을 하다니! 그것도 방금까지 세상에서 가장 못된 말을 찾고 있던 중이었는데! 그리고 그 순간, 그녀를 위한 못된 말 찾기도 이쯤에서 관둘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아주 갑자기였다.



나간 일을, 그러니까 불쾌하게 지나간 일을 자주 생각하는 편이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수치나 억울, 후회에 이불킥을 하느라 늦은 잠에 들기도 한다. 이미 지난 일을 곱씹으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이런 행동이 좋은 습관이 아닌 걸 알긴 하지만, 머릿속의 기억을 물리치는 게 쉽지는 않다. 


렇게 질기게 떠오르던 게, 되게 어이없고 이상한 계기로 풀리기도 한다. 종종 그랬던 것 같다. 더 지나고 나면 별일 아닐 것을 작디 작은 마음으로 오랫동안 전전긍긍하고 있으면, 이 유쾌한 강아지와 주인처럼 내 인생에 전혀 영향력없는 사소한 존재가 짠하고 나타나 상냥한 조언을 건네는 거였다. 렇게 사소하고 어이없는 웃음에도 밀려날 수 있는 기억이니 이제 그만하면 어떻겠냐고. 

그러고 보니 오래도 되었다. 이제  케케묵은 불쾌를 완전히 보내줄 때 됐. 곱씹고 곱씹느라 너덜 해진 나나 좀 돌봐줘야지. 어금니 사이에 질기게 끼어있던 시금치 같은 게, 아무리 해도 안 빠지던 게, 우연한 물 한 모금에 쓱 하고 기어 나 느낌이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한참을 실없는 사람처럼 었다. 마침 그 시간에, 그 길을 걸어, 낙엽 무는 개와 낙엽을 받아주고 있는 개 주인의 무안하고 환한 웃음을 만날 수 있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101개의 얼굴에 대한 보고서>

매일 옷깃 스쳐 보내는 사람들에 대한 사소한 기록입니다.

낯선 얼굴들이 건네는 안 낯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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