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하늘에 초승달이 하얗게 걸려있다.그 아래로 어린이집 아이들이 선생님 손을 잡고 나란히 걸었다.낮에 달이 떠있는 걸 처음 본 건지 한 아이가 신기해하며 질문을 던졌고, 선생님은 당황하지 않고 노련하게 대답했다. 낮이 궁금했던 달이 고개를 내밀었나 보노라고.
하지만 초등교육을 마친 우리는 모두, 저 노련한 선생님의 말이 '정답'이 아닌 걸 안다. 과학 시간에 다 배웠다. 달은 언제나 지구 주위를 자전하며 '떠있는' 상태고, 낮동안 달이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건 태양의 강한 빛 때문이며, 태양이 구름에 가렸거나 고도가 낮아졌거나 하는 이유로 그 빛이 약해졌을 때 우리 눈에도 달이 보인다는 걸. 그러니까 달이 낮을 궁금해하고 자시고 하는 건 다 뻥이라는 걸.
환상이라는 걸.
구름이 수증기의 응집이라는 걸 몰랐던 시절이 있었다. 구름은 솜사탕처럼 폭신폭신한 거고, 앉으면 방석처럼 편안한 거라고 알고 있었다. 나중에 비행기를 타게 되면 창문을 열어 구름을 손으로 잡아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언니, 오빠들처럼 저기 구름이 좀 덮이는 만큼의 높은 산으로 소풍을 갈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올라가서 구름을 한 움큼 집어다가 가지고 내려올 계획도 세웠었다.
그래서 과학 시간에 선생님이 구름은 앉을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목욕탕의 수증기 같은 거라고 했을 때 나는 적잖이 당황했고 좌절했다. 믿을 수 없었다.
환상에 인격이 부여되면, 그게 사실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을 때의 좌절은 더욱 커진다. 나는 '인격이 부여된 환상'을 꽤 많이 가진 채 유년기를 보냈다. 주범은 엄마였다.
초등학생 때였다. 학교에 갔다가 피아노 학원에 갔다가 집에 오면 피아노 숙제를 마친 후에 노는 게 그 시절 내 평범한 하루 일과였다. 그날은 마당에서 동생과 내 친구가 땅따먹기를 하며 놀고 있었다. 연습곡을 열 번 치는숙제가 있었지만 얼른 마치고 땅따먹기에 합류하고 싶어서 대충대충 손가락을 굴려서 횟수 채우는 데 의의를 두던 중이었다. 부엌에서 가만히 피아노 소리를 듣던 엄마가 다가와한 마디를 하고 갔고, 나는그 말에 울먹거리며 깊이 반성했다.
"여기 그려진 음표는 니가 쳐주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그렇게 대충 치고 넘어가면 얼마나 슬프겠노."
음표가 슬퍼한대. 나를 기다렸대. 그런 사정이 있었다니. 악보에게 너무너무 미안했고 그 뒤로는 한 음 한 음 정성껏 연주해 주었다. 이 충격은 꽤 오래갔는데, 나중엔 공부할 때나 책을 읽을 때 글자 하나하나에도 신경이 쓰여서 성의를 다해야 했다. 정말 피곤했다. 신경써 주어야 할 글자가 너무 많았다.
환상이 깨질 때의 트라우마를 잔뜩 겪어야 했던 나는, 아이에게 막무가내로 동화 같은 얘기만 해주는 건 좋지 않겠단 생각이 먼저 든다. 근데 그렇다고 사실만 알려주자니 너무 어릴 때부터 동심을 밟아버리는 건 아닌가, 좀 잔인한가 싶기도 하다. 게다가 환상에서 깨어날 때 겪는 저 과정들이 꼭 나쁘기만 한 건지도 잘 모르겠다.
친구의 친구의 아이가 빨간 파프리카와 친구가 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친구의 친구는 파프리카가 곧 썩을 것을 걱정했단다. 맞다. 우리는 파프리카가 곧 썩을 것을 안다. 썩어서 냄새를 풍길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파프리카는 곧 썩을 거라고, 썩기 전에 먹어야 한다고 냉정하게 말할 수 있는 어른은 많지 않다. 아이가 스스로 알게 되기까지 약간의 거짓말로 환상에 동조하는 게 일반적이다.
파프리카가 썩는 걸 보고아이는 사실을 알게 될 거고, 깨닫고 느끼는 그 과정은 아이의 성격과 가치관에 작든 크든 영향을 미친다. 악보의 음표들이 나를 기다린 게 아닌 걸 알게 된 후로도, 괜히 책이나 신문의 글자들까지 신경썼던 나처럼. 혹은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선생님! 근데에에, 그럼 해는 왜 밤에 안 나와요? 해도 밤이 궁금할 수도 있잖아요."
"글쎄..."
아이가 또다시 질문을 했다. 이번엔 선생님도 조금 난감해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 다른 선생님이 잉어 밥을 가지고 나타나 아이들은 잉어가 있는 냇가로 우르르 달려갔고 더 이상의 질문 공세는 없었다.
글쎄... 나라면 어떤 말을 골라 대답했을까. 문득 입 벌려 나오는 모든언어가 새삼스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