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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탄 Sep 24. 2019

환상 속의 구름

오늘의 행인1 : 한낮의 달을 궁금해하던 아이


"선생님! 음, 근데에에에, 낮에 왜 달이 떠있어요?"

"그러게. 달도 낮이 궁금해서 그런가."

"아아! 달은 낮을 잘 못보니까?"

"응. 그런가 봐."


파란 하늘에 초승달이 하얗게 걸려있다. 그 아래로 어린이집 아이들이 선생님 손을 잡고 나란히 걸었다. 에 달이 떠있는 걸 처음 본 건지 아이가 신기해하며 질문을 던졌고, 선생님은 당황하지 않고 노련하게 대답했다. 낮이 궁금했던 달이 고개를 내밀었나 보노라고.


하지만 초등교육을 마친 우리는 모두, 저 노련한 선생님의 말이 '정답'이 아닌 걸 안다. 과학 시간에 다 배웠다. 달은 언제나 지구 주위를 자전하며 '떠있는' 상태고, 낮동안 달이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건 태양의 강한 빛 때문이며, 태양이 구름에 가거나 고도가 낮아졌거나 하는 이유로 그 빛이 약해졌을 때 우리 눈에도 달이 보인다는 걸. 그러니까 달이 낮을 궁금해하고 자시고 하는 건 다 뻥이라는 걸.

환상이라는 걸.



구름이 수증기의 응집이라는 걸 몰랐던 시절이 있다. 구름은 솜사탕처럼 폭신폭신한 거고, 앉으면 방석처럼 편안한 거라고 알고 있었다. 나중에 비행기를 타게 되면 창문을 열어 구름을 손으로 잡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언니, 오빠들처럼 저기 구름이 좀 덮이는 만큼의 높은 산으로 소풍을 갈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올라가서 구름을 한 움큼 다가 가지고 내려올 계획도 세웠었다.

그래서 과학 시간에 선생님이 구름은 앉을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목욕탕 수증기 같은 거라 때 나는 적잖이 당황했고 좌절했다. 믿을 수 없었다.


환상에 인격이 부여되면, 그 사실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을 때의 좌절은 더욱 커진다. 나는 '인격이 부여된 환상'꽤 많이 가진 채 유년기를 보냈다. 주범은 엄마였다.

초등학 때였. 학교에 갔다가 피아노 학원에 갔다가 집에 오면 피아노 숙제를 마친 후에 노는 게 그 시절 내 평범한 하루 일과였다. 그날은 마당에서 동생과 내 친구가 땅따먹기를 하며 놀고 있었다. 연습곡을 열 번 치는 숙제가 있었지만 얼른 마치고 땅따먹기에 합류하고 싶어서 대충대충 손가락을 굴려서 횟수 채우는 데 의의를 두던 중이었다. 부엌에서 가만히 피아노 소리를 듣던 엄마가 다가와 한 마디를 하고 갔고, 나는 그 말에 울먹거리며 깊이 반성했다.


"여기 그려진 음표는 니가 쳐주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그렇게 대충 치고 넘어가면 얼마나 슬프겠노."


음표가 슬퍼한대. 나를 기다렸대. 그런 사정이 있었다니. 악보에게 너무너무 미안했고 그 뒤로는 한 음 한 음 정성껏 연주해 주었다. 이 충격은 꽤 오래갔는데, 나중엔 공부할 때나 책을 읽을 때 글자 하나하나에도 신경이 쓰여서 성의를 다해야 했다. 정말 피곤했다. 신경 주어야 할 글자가 너무 많았다.



환상이 깨질 때의 트라우마를 잔뜩 겪어야 했던 나는, 아이에게 막무가내로 동화 같은 얘기만 해주는 건 좋지 않겠단 생각이 먼저 든다. 근데 그렇다고 사실만 알려주자니 너무 어릴 때부터 동심을 밟아버리는 건 아닌가, 좀 잔인한가 싶기도 하다. 게다가 환상에서 깨어날 때 겪는 저 과정들이 꼭 나쁘기만 한 건지도 잘 모르겠다.


친구의 친구의 아이가 빨간 파프리카와 친구가 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친구의 친구는 파프리카가 곧 썩을 것을 걱정했단다. 맞다. 우리는 파프리카가 곧 썩을 것을 안다. 썩어서 냄새를 풍길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파프리카는 곧 썩을 거라고, 썩기 전에 먹어야 한다고 냉정하게 말할 수 있는 어른은 많지 않다. 아이가 스스로 알게 되기까지 약간의 거짓말로 환상에 동조하는 게 일반적이다.

파프리카가 썩는 걸 보고 아이 사실을 알게 될 거고, 깨닫고 느끼는 그 과정은 아이의 성격과 가치관에 작든 크든 영향을 미친다. 악보의 음표들이 나를 기다린 게 아닌 걸 알게 된 후로도, 괜히 책이나 신문의 글자들까지 신경썼던 나처럼. 혹은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선생님! 근데에에, 그럼 해는 왜 밤에 안 나와요? 해도 밤이 궁금할 수도 있잖아요."

"글쎄..."


아이가 또다시 질문을 했다. 이번엔 선생님도 조금 난감해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 다른 선생님이 어 밥을 가지고 나타나 아이들은 어가 있는 냇가로 우르르 달려갔고 더 이상의 질문 공세는 없었다.

글쎄... 나라면 어떤 말을 골라 대답했을까. 문득 입 벌려 나오는 모든 언어가 새삼스러워진다.






<101개의 얼굴에 대한 보고서>

매일 옷깃 스쳐 보내는 사람들에 대한 사소한 기록입니다.

낯선 얼굴들이 건네는 안 낯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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