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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양 Sep 18. 2024

그녀의 도시락 냄새




“점심부터 먹어.”



N이 우리집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때는 집안일을 해주는 파트타임 헬퍼인 딴딴을 고용하기 전이라 N이 오전에는 집안일을 하고 오후에는 아이를 돌봐주고 있었다.



N을 고용할 때 업무 중 요리는 제외 시키는 대신 그녀의 점심도 제공이 어려우니 도시락을 싸오는 것으로 협의를 했었다.



집안일을 끝낸 N에게 먼저 점심을 먹으라고 말하긴 했지만 새벽부터 이어진 육아에 이미 몸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N이 거실 한쪽의 식탁에 앉을 때 마지막 체력을 쥐어짜내 럭키를 안아 달래고 있었다.



크리스찬인 N이 짧은 기도를 끝내고 집에서 싸온 도시락 뚜껑을 열었을 때였다. 그 순간 콧속으로 파고드는 강렬한 냄새 때문에 고단함마저 싹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숨이 턱 막혔다.



혹시 N이 눈치챌까봐 숨을 참고 속으로 열까지 숫자를 센 뒤 최대한 자연스럽게 침실로 들어갔다. 재빨리 문을 닫았다. 어쩐지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아서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었다.



도대체 점심으로 뭘 싸온 거지?



비리면서 썩은 냄새가 뒤섞인 악취였다. 다시 거실로 나가는 게 두려울 정도였다. 굳이 묘사해보자면, 대만 지우펀 좁은 골목길에서 맡았던 강렬한 취두부 냄새에 요령없이 비전문가가 삭힌 생선 젓갈을 섞은 듯한 느낌이었다.

  



낭패감에 휩싸인 내 사정을 알 리 없는 N은 점심을 먹고 도시락통을 설거지하고 이를 닦은 뒤 침실을 노크했다. 그녀는 아이를 안아서 거실로 데리고 나갔다. 열린 문틈으로 냄새의 여운이 방안으로 스며들었다.



나도 점심을 먹어야 했고, 배가 무척 고팠지만 한참을 방 안에 머물다가 거실에 나갈 수 있었다.



다음 날 점심, N이 도시락을 꺼낼 때 살짝 긴장하긴 했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인도 음식에서 맡을 수 있을 법한 향신료 냄새가 조금 날 뿐이었다. 냄새에 민감한 타입이지만 전날의 고약한 악취에 비하면 그 정도는 참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안도는 잠시뿐 고민에 빠졌다.



전날 반찬으로 싸온 음식이 무엇인지 물어봐야할까.



냄새 때문에 힘드니 그 반찬은 싸오지 말라고 부탁할까.




아니면 최소한 밥 먹을 때 베란다 창문이라도 열어달라고 할까.



맛있게 식사를 하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한참 망설였지만, 결국 나는 N에게 어떤 부탁도 하지 못했다. N은 흔쾌히 노 프라블럼 하고 내 부탁을 들어줄 수도 있을 것 같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며 만들어진 내 예의의 기준으로 그런 부탁은 당연히, 아주 많이 무례한 일이었다.



다행히 N은 자주 그 음식을 싸오지 않았다. 혹시 냄새 때문에 묻는 거라고 눈치챌까봐, 난 그 이후로도 그 반찬에 대해 묻지도 못했고 아직도 무슨 음식인지 정체를 알지 못한다.

 




얼마 전 남편이 콘도 단체 채팅방에 음식을 할 때 복도 쪽으로 난 주방 창문을 닫아 달라는 공지가 올라왔었다고 말해주었다.



양곤 얀킨 타운십에 위치한 콘도에는 외국인들이 많이 살았다. 일본, 중국, 인도인 뿐만 아니라 정확한 국적은 알 수 없었지만 서구권 사람들도 엘리베이터나 헬스장, 로비에서 종종 마주쳤다.



다양한 국적만큼이나 다양한 음식들이 아침저녁으로 요리되고, 각가지 냄새들이 주방으로 난 창밖으로 퍼졌을 것이다. 서로 다른 문화만큼이나 이질적인 냄새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역이었을 게 분명했다.



나는 한 번도 주방 창문을 열고 요리한 적 없었지만 (창문이 높아서 손이 안 닿는다), 종종 된장 찌개를 끓였던 것을 기억하며 괜히 마음이 움찔했다.



그러다 문득, 온종일 우리 집에서 온갖 냄새를 맡았을 N을 떠올렸다.



한국 식당에서 김치나 김치 볶음밥을 잘 먹는 걸 봤으니, 다행히 가장 기본적인 김치 냄새를 힘들어하진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감자와 양파, 두부를 잔뜩 넣고 오랫동안 끓인 된장찌개는 외국인으로서 냄새 난이도가 꽤 높았을 것이다. 가끔 남편이 한국 식당에서 내가 좋아하는 청국장을 포장해오곤 했는데, N이 있는 자리에서 먹은 적은 없지만 포장한 상태에서도 냄새가 꽤 났다. 냉장고 문만 열어도 진한 청국장 냄새가 코끝을 맴돌 정도였다.



도대체 한국 사람들은 뭘 먹는건지 의아해하며, 내가 N의 도시락 냄새를 맡았을 때처럼 숨을 간신히 참고 주방이나 냉장고 청소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도시락 냄새에 대해 내가 그녀에게 핀잔이라도 주었다면, 청국장 냄새를 맡을 때마다 그녀가 속으로 얼마나 흉을 봤을까!



최근 들어서 N은 충격적으로 강렬했던, 그때같은 냄새의 음식을 싸온 적은 없다. 물론 여전히 도시락 통을 열 때 조금 거슬리는 낯선 냄새들이 날 때가 있긴 하지만 숨을 참아야 한다거나 인상이 찌푸려지는 정도는 아니다.



내가 적응이 된건지 아니면 그녀가 너무 센 냄새의 반찬을 가져오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가끔은 아주 맛있는 냄새도 난다. 그럴 땐 럭키를 안고 서성이는 척하며 식탁에 앉은 N의 도시락을 흘깃 훔쳐 보기도 한다. 모양새는 조금 다르지만 한국의 생선 조림이나 고기 볶음, 절임 채소와 비슷한 느낌의 반찬이 보일 때면 반갑다.



N이 먹고 나면 아이를 그녀에게 넘겨주고 나도 점심을 먹는다.



전날 먹고 남은 찌개나 국을 데워 먹거나, 달걀밥을 만들거나, 한국에서 사 온 조미 김에 현지 마트에서 산 어색한 맛의 김치를 먹을 때도 있다.




뜨거운 날씨 때문에 에어컨은 24시간 돌아가고, 청소기를 돌리는 시간을 제외하면 베란다나 창문을 열지 않는다. 집안의 공기는 늘 조금씩 정체되고, 방금 전 N이 먹은 미얀마 음식과 나의 한국 음식 냄새가 뒤섞인다.



N의 3단 도시락통. 길가다보면 똑같이 생긴 도시락을 들고다니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아마도 그게
미얀마 여자 두 명과 한국 아줌마 한 명,
그리고 한국보다 미안먀에서 산 기간이
훨씬 긴
9개월 짜리 아기가 북적이는
우리 집 오후의 냄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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