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런 발병으로 수개 월간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치료하다 고향에 있는 요양 병원으로 옮기신지 며칠 만의 일이었다.
처음 발병했을 때 엄마와 언니들은 임신한 나를 배려해 뒤늦게 그 사실을 알렸다. 부산의 대학 병원에서 서울의 대학병원까지 앰뷸런스로 아빠를 옮겨가는 상황에서도 내게는 그 심각함을 최대한 덜 느끼겠끔 말을 전했다.
나는 아빠보다, 병 때문에 더 괴팍해지고 말도 안되는 고집을 부리며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게 된 아빠를 돌아가며 간병하는 엄마와 언니들에 대한 걱정과 미안함이 더 컸었다.
아빠가 떠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엄마가 마음을 굳게 먹으라는 전화를 걸어왔을 때였다. 돌아가시기 전날이었다. 아빠는 요양 병원에서 부산의 대학 병원 응급실로 옮겨가 계신 상황이었다.
나는 ‘고백의 순간(북큐브, 2023)’ 수정 작업 중이었다. 사실 엄마는 그때도 아빠가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정확한 워딩으로 전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느낌이 전해져왔다. 아빠가 돌아가실 수도 있고, 이후의 일을 위해 빨리 수정작업을 끝내야겠단 생각이 들었지만 집에서는 도저히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남편과 카페로 나갔다. 임신성 당뇨를 앓고 있어 수정 작업을 하다 혈당 체크를 했는데 수치가 높았다. 남편에게 좀 걷고 오겠다고 했다.
카페는 바닷가와 번화가 주변에 있었다. 주말 밤, 왁자지껄한 술집과 흥겨운 사람들의 소음을 들으며 부른 배를 잡고 뒤뚱거리며 걷다가 울다가, 걷다가 울다가를 반복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둘째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는 아빠를 보러 병원으로 오라고 했다. 그때도 둘째 언니는 침착했고,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아빠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불과 전날 밤만 해도 병원으로 가겠다는 내 말에 둘째 언니는 어차피 임산부는 중환자실 면회가 되지 않으니 오지 말라고 했었으니까.
자고 있는 남편을 깨웠다.
“지금 병원에 가야해. 혹시 모르니까… 여벌 속옷이랑 검은색 양말도 챙겨.”
우리는 세수도 하지 않고 출발했다. 병원은 한 시간 반 정도 거리였다. 병원에 도착하기 10여 분을 남겨두었을 때, 언니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아빠 돌아가셨어. 아직 귀는 열려 있대. 들으실 수 있대.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도 돼.”
“진짜 아빠 돌아가셨어? 진짜 돌아가신거야? 아빠! 아빠 나 지금 가고 있어. 아빠 나 지금 가고 있어.”
지금 생각해보면사랑한다고 고맙다고, 말을 했어야 하는데 나는 그저 가고 있다는 말만 반복했다.
이후로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병원에서 울고 있던 둘째 언니, 1시간 거리의 고향 병원 장례식장에서 보내온 차를 기다리며 앉아 있던 부산의 대학 병원 앞 편의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던 가을 햇빛이 비치는 일요일 아침의 편의점 창밖 풍경, 떨리는 손길로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 보낸 메시지, 앰뷸런스에 모시기 전에 보았던 아빠의 모습, 그저 잠든 것 처럼 평온하게 입을 살짝 벌리고 있던 아빠, 장례식장에서 만난 첫째 언니, 부른 배로 뒤뚱거리며 걸어오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오열했던 언니.본인은 아빠 병구완에 깡마를 정도로 고생했으면서 내게는 항상 ‘아빠 목숨이 오고가는 그런 병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라고 이야기했던 언니들이었다.
딸 밖에 없는 아빠에게 누구보다 훌륭하게 아들 역할을 했던 사위들은 고통스러워하는 아내들을 대신해 꿋꿋하게 장례를 치렀다.
장례 후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내 인생은 달라져 있었다.
아빠가 그리웠고, 아빠가 아픈 동안 간병 한 번 하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내 인생에서 소중한 누군가가 어느 순간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그리고 삶 자체에 슬픔을 느꼈다.
럭키가 태어났을 때, 외할아버지를 너무 닮은 그 얼굴에 또 눈물이 났다. 딱 두 달만 더 사셨더라면 손자들 밖에 없는 아빠의 유일한 손녀인, 그것도 본인을 쏙 빼닮은 럭키를 보실 수 있었을 텐데….
시간이 흐르면서 시도 때도 없이 울게 만들었던 그리움과 슬픔은 잦아 들었다. 출산과 육아, 그리고 또 다시 시작된 해외 생활 때문에 이제는 아빠의 부재를 잊고 지낼 때도 많아졌다.
하지만 문득 문득, 잠을 자다가 밥을 먹다가도 아빠 생각이 났다. 특히 남편이 럭키를 안아 얼러주고 있을 때 불현듯 아빠가 떠올라 목이 메이곤 했다. 어릴 적 아빠가 업어주었던 기억이 나면 며칠은 그 추억을 되새기며 슬퍼졌다.
가라앉은 내 기분을 눈치 챈 우리 집 내니 N에게 아빠의 이야기를 한 적 있다. 그러자 그녀는 내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오빠도 작년 10월에 죽었어요.”
미얀마와 태국의 접경지역에 N의 언니와 오빠의 가족들이 살았다. 아주 어릴 적 엄마가 돌아가시고 형제들은 친인척의 집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모양이었다. 아빠는 몇 년 전 돌아가셨다고 했다.
“오빠는 총에 맞았어요.”
총이라니.
말문이 탁 막혔다. 일흔이 넘은 아빠가 병으로 돌아가신 것도 기가 막힐 노릇인데, 창창하게 젊은 오빠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길 들었을 때 얼마나 마음이 무너져 내렸을까.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총을 쐈고, 다른 사람들이 죽었어요. 언니가 죽은 오빠의 사진을 보내줬어요. 나는 보고 지워버렸어요.”
N은 담담히 말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무슨 연유로 누구의 총에 맞았는지 차마 묻지 못했다. 양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화롭지만 미얀마는 여전히 내전 중이었다. 정부군, 시민군, 소수민족반군, 그 어느 쪽의 총이었는지 모르겠다.
형제들 중 그나마 형편이 제일 나은 편에 속한 N은 내년쯤 죽은 오빠의 아이 한 명을 데려와서 학교에 보내고 싶다고 했다. 다른 가족들에게서 돈을 보내달라는 요청 전화를 수시로 받으며 속앓이를 하면서도 오빠가 남긴 아이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애틋했다.
내가 혼자 살고 계신 엄마를 걱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겠지.
가까운 사람을 잃는 경험은 누구나 겪게 되는 일이다. 그저 조금 빠르거나, 늦는 것일뿐.
가슴에 그리움과 죄책감을 묻고, 다른 가족들을 더 소중히 챙기며, 묵묵히 남은 삶을 살아가다보면 또 웃고 지내는 날들이 많아진다.
내일은 아빠의 첫 기일이다.
다른 가족과 함께 아빠를 추억할 수 없어 슬프지만 내 삶은 또 내 삶대로 살아가야하니까 힘을 내야지.
하늘에 있는 우리 모두의 가족들이 안녕하길 바라며, 내일은 양곤 현지마트에서 발견한 캔 막걸리 -우리 아빠 참 막걸리 좋아하셨는데...-한 잔 마셔야겠다.
아직 태어나기 전이었지만 아빠의 묘비에 하나밖에 없는 손녀딸을 새겨주고 싶어서 태명인 럭키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