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선을 긋고 불편함 마주하기
YOLO(You Only Live Once). 요즘 여기저기서 심심찮게 접할 수 있던 단어다. 어디 세상살이 힘들지 않은 날이 언제였겠느냐마는, 자기 삶 없이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팍팍한 삶을 뒤로한 채, 한 번뿐인 인생 좀 더 즐겨야 된다며 사비를 털어 훌쩍 떠나버리는 그런 로망들을 많이 꿈꾸는 것 같다. 꼭 여행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반면에, 불필요할 지출을 관리하고 절약과 적재적소를 강조하며, '돈은 안 쓰는 것이다'라는 슬로건을 내건 프로그램도 따라서 화제다. 진행자는 청취자들의 영수증을 받아 점검을 해보고는, 낭비라고 생각한 곳에서 'Stupid!'를 외치고 처방을 내린다.
전자는 나를 억압하는 스트레스로부터 당장에 탈피하고 싶은 욕구가 반영되어 있다. 후자는 내가 내일도 살아있다는 전제 아래서, 내 의지와 관계없이 돈이 없어서 어떤 일을 하지 못하거나 해야만 하는 상황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담겨있다.
얼핏 보면 정반대로 보이는 두 방향의 삶의 방식은 사실 그 지향점이 같다. 자유다. 내가 외부로부터 휘둘리고 싶지 않다는 것. 마음먹었을 때 마음먹은 일을 할 수 있고 싶은 것. 내가 부여받은 삶의 시간을 내가 지배하고 싶다는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잘못한 일을 하길 마련이다. 아니 셀 수도 없을 만큼이겠다. 이건 자신을 제어하지 못했거나, 능력이 부족해서 혹은 의도치 않은 실수 등으로 인해 벌어진다. 그리고 이 잘못의 대상이 사람이라면, 대게 당사자로부터 한 소릴 듣게 된다. 이때 잘못한 이의 기분을 결정하는데 큰 기준이 되는 것 중 하나는 혼을 내는 사람의 태도다.
누구나 미숙할 수 있다는 걸 알고는, 어떤 잘못에 대한 판단 과정의 착오를 점검하고, 그것이 불러온 피해, 대처 방안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며 찬찬히 피드백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 내 행동에 대한 통찰을 제시하는 사람 말이다. 이런 방식으로 꾸중을 듣게 되면 마음에 큰 저항 없이 납득 하기가 더 쉽고, 그 사람에 대한 원망도 그렇게나 들지는 않는다. 나도 얼마든지 잘못을 할 수 있다는 걸 알고는 매사에 좀 더 겸손해질 수도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말 곳곳에 인칭 대명사를 넣어서 '네가 잘못한 거야', '너는 그래서 문제야'라는 식으로 말하며 책임과 대상을 주로 언급하고, 조언을 빙자한 감정풀이를 하는 사람도 있다. 더러는 인신공격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생긴다. 잘못한 이는 이때 할 말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게 된다. 상대방의 지적은 피드백이라기보다는, 송곳 같은 공격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 때때로 이를 견디지 못해 법원의 힘을 빌릴 정도로 문제가 커지기도 한다.
한 집안 내의 자녀들을 보면, 겉으로는 성격도 비슷한 것 같았는데, 알고 보면 정말 제각각인 경우가 태반이다.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도 어찌나 그렇게 다른지 참 신기할 따름이다. 이렇게 되는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인상 깊은 이야기가 있다.
동물의 세계로 빗대어 보자면, 둥지의 새끼 새들이 어미가 가져온 먹이를 자기에게 달라고 서로 목청껏 외치는 것처럼, 사람 역시 같은 행동들을 한다는 거다. 가족 내 자녀들끼리는 다른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부모에게 관심을 호소한다. 말 잘 듣고 정돈도 잘하는 아이가 있는 반면, 반항하고 더 어지럽히길 좋아하는 아이도 있다. 아이들은 나름의 전략으로 가족 내에서 다른 이와 구분되는 자신을 부모에게 계속 알리려고 한다. '제게 더 관심을 주세요' 라며.
사람들은 생존이나 생활에 필요한 소비만 하지는 않는다. 명품을 사서 두르고는 남들 앞에서 과시를 하려 한다. 그게 노골적이든 은근하게든 무관하게 혹은 이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큰 사람이든 아니든, 명품을 지녔다는 걸 보여주는 것으로 자신의 부나 능력을 입증해 보이려고 한다. 그렇게 남들과는 다르다는 우월함을 느끼려고 한다. 때로는 현재의 재정 상황에 무리인 걸 알지만 구매를 하고는 그 효용을 얻어내려 한다. 적어도 꼭 명품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처지에서 체면이 깎이지 않을 정도는 구비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사람들은 자유를 찾아 나서고, 자기가 부정되기를 싫어하며, 남들에게서 더 인정이나 존중받기를 갈구한다.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이런 여러 가지 모습에는 교차점이 하나 있다. 바로, 나를 지키려고 한다는 거다.
사람은 배우고 경험하며 생각을 형성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간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구나', '내게는 저게 맞지 않는구나', '이 정도까지는 내가 버틸 수 있구나.' 이런 생각들이 오늘 이 순간까지 퇴적되어 지금의 내가 구축된다.
내 안의 세계관은 계속해서 그렇게 변화와 발전이 반복해서 이뤄진다. 이 속도는 점차 더디게 되고,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의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것을 주저하는 경향을 보인다. 지금까지 쌓아온,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계속해서 세상을 이해하려고 한다. 물리 세계에서 인정되는 관성의 법칙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물론 객관적인 기준에서는, 변화를 여전히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도 있고 소극적인 이도 있겠다. 하지만 그 개인을 가까이서 살펴보면, 나이가 들어갈수록 젊은 시절의 나보다는 어느정도 더 보수적으로 바뀌어 가는 면이 보일 거다. 이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가지게 되는 보편적 성향이다.
익숙한 방식으로 이해를 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은 신경을 덜 쓸 수 있다. 반면에 이 방식을 벗어나면, 그때부터 에너지를 많이 쓰게 된다. 에너지를 쓴다는 건, 스트레스다. 힘들거나 귀찮다는 것. 나와 다른 방식을 마주하는 건 그렇게 수고로움과 불편함을 함께 동반한다.
예컨대, 컴퓨터를 처음 배우는 사람은 '안녕하세요'라는 글자를 치기 위해서 자음과 모음이 어디에 위치했는지를 찾고, 누르고, 오타가 났는지 점검을 하는 데 온 집중을 다 한다. 그러다 어느 정도 숙련이 되면, 타이핑에 필요한 손가락은 자동 반사적으로 그 위에 위치해 있게 되고, 동시에 머릿속으로는 저녁을 뭘 먹을지 고민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타이핑의 습관이나 자세를 바꾸는 건 쉽지 않다.
내가 어떤 요인으로부터 억압받지 않고 자유롭게 일을 처리하고 싶은 것에서, 내 안의 세계로 향하는 저항에 대한 스트레스를 확인할 수 있다. 내 존재가 부정되는 것 같을 때 느껴지는 쓰라린 패배감은, 내게 익숙한 방식은 틀렸으니 내 외부의 기준에 나를 맞춰 바꿔야 한다는, 에너지를 써야 되는 작업에 들게 만든다. 짜증 난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더 챙겨 봐주면 좋겠고, 우월감을 느껴보고 싶다는 것에서 특별히 힘을 들이지 않고도 사람들이 자기 세계에 대한 무한 긍정, 동의를 해줬으면 하는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기 안의 세계에서 항상 왕이 되고 싶어 한다. 그 자리를 계속 지키려고 노력한다.
웹서핑을 하다가 재밌는 글을 발견했다. 상담이나 질문 같은 걸 올리는 유명 커뮤니티 사이트 게시판에 예전에 올라왔었던 글을 누가 캡처해서 다시 올린 거였다. 질문자의 상황은 이랬다. 국내에서 나름 유명하고 갓 20대가 된 여성들이 많이 이용하는 화장품 브랜드였는데, 질문자의 나이가 좀 더 들어서도 여전히 이 브랜드를 애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직장 동료가 이를 보고는 '아직도 그걸 쓰세요? 그 나이에 그 브랜드를 쓰는 사람 보기 드문데... 검소하신가 봐요'와 같이 말했다고 한다. 질문자는 이를 듣고 기분이 나빠졌는지 하소연하는 느낌으로 글을 올렸고, 많은 사람들의 댓글과 함께 호응을 받았다.
미용은 의학의 연장선상에 있다. 따지고 보자면, 어떤 브랜드를 이용하는 것보다 우선 되어야 하는 건, 자신의 현재 피부 상태에 더 필요하거나, 부작용이 적거나, 많은 걸 고려하고도 내 기호에 맞는지다. 남들은 좋다는데, 내가 바르면 여드름이 올라오는 걸 이용할 순 없지 않나. 평균적으로 더 비싼 브랜드를 이용해도 나한테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가격과 상품의 질이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브랜드만 보고 판단하려는 것은, 이모저모 비교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그 브랜드가 보장해주는 일정 수준의 상품의 질을 믿어서, 혹은 그 브랜드가 주는 여타 후광효과를 얻기 위해서 아니었던가.
그렇게 자기한테 딱인 걸 찾았는데, 다른 사람이 와서는 '그건 내 것보다 가격이 낮고 내 기준에서 효용가치가 떨어지는데, 너는 그런 걸 쓰고 있으니 나보다 별 것 아냐'라는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럽나. 그녀는 남을 깎아내리려는 시도를 통해, 상대적으로 자신의 콧대를 높이려는 전략을 쓴 거다. 그녀는 자신만의 게임에서 자신만의 잣대에 남을 데려와 억지로 끼워 맞추고는, 자신이 유리한 고지에서 쉽게 승리를 쟁취하려고 했다.
이 이야길 접했을 때, 직장 동료라는 분이 너무 아이처럼 느껴졌다가도 한편으론 인간적인 연민이 느껴졌다. 이 사람은 언제나 사람들이 자기를 떠받들어야 한다는 세상에 혼자 사는 사람이었거나 다른 어떤 곳에서 자신이 낮잡아 보였는데 그걸 견디기만 하는 게 어려워, 질문자를 통해 깎였던 자존감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사정이 있든지 어쨌든, 그냥 자기가 좀 더 인정받고 싶어 하는, 광활한 지구라는 대지 위의 작은 생명체의 외침으로도 느껴졌다. 둥지 속 새끼 새들이 그랬던 것처럼.
개인적으로는 위 상황이 남보다 우월하거나 돋보이고 싶은, 그렇게 자신이 맞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 궁극적으로는 자기가 해석하는 세상에서의 변화를 기피하고, 어딜 가서 누구와 만나든 그렇게 자기 세상 속에서 왕이고 싶은 욕구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보았다.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은 나와 시도 때도 없이 그들에게 더 유리한 게임을 시작하려 할 것이다. 또한 이때 내가 별생각 없이 있었다면, 어느새 그들의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거다. 승률은 낮을 수밖에 없다. 승리가 전해주는 만족이라는 전리품을 쉽게 얻기 위해서는 나만의 게임을 해야 한다. '그건 너의 기준이지', '네 경우에 한정해서지', '난 이게 맞아' 라며, 상대방의 게임과 나의 게임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당신의 왕국과 내 왕국의 국경선을 긋고 난 다음에는, 우리는 누구나가 자유롭고 싶고, 존중과 인정을 받으려 한다는 걸, 사람들 모두가 좀 더, 한 번 더 마음에 새겨두었으면 좋겠다. 나뿐만 아니라, 사람들 모두 각자만의 왕국에서 누구의 참견도 받지 않고 자기 편한대로 하고 싶어 하는 걸 이해함으로써,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다양성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때의 불편함을 좀 더 감수할 필요가 있다.
이 복잡하고 급변하는 다층적 갈등구조의 현대사회에서는 특정 집단이 당신을 영원히 보호해주지 않는다. 다양한 이해관계에 따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전략적으로 연대하고, 타협해야 한다. 그 주체는 바로 당신, 개인이다. 개인이 먼저 주체로 서야 타인과의 경계를 인식하여 이를 존중할 수 있고, 책임질 한계가 명확해지며, 집단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에게 최선인 전략을 사고할 수 있다.
문유석, <개인주의자 선언: 판사 문유석의 일상유감> 中
불편함을 마주하는 용기를 갖기를
#자유 #억압 #비난 #부정 #패배감 #개성 #인정 #존중 #우월감 #독립 #관성 #게임 #분리 #선택 #길 #자아 #자존 #다양성 #불편함 #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