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수 Jul 22. 2024

8화

효성, 윤서, 그리고 동수는 한 일식당 테이블에 자리하고 있었다. 불안해하는 윤서와 긴장한 듯한 동수, 그리고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효성을 보게 된다면 누구든 그들의 사연을 궁금해할 것이다. 윤서는 효성과 단 둘이, 혹은 하우스메이트들과의 저녁식사를 기대했지만, 별다른 말없이 가는 효성을 따라가 보니 지난번 우연히 부엌에서 마주친 동수가 서 있었다. 윤서는 효성이 원망스럽다가도, 그녀가 무섭기도 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효성은 이제껏 보여왔던 표정 중 가장 화가 나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집을 나오기 전, 그녀의 애인 재혁과의 불편한 통화 때문이었다. 이상하게도 두 사람은 다투지 않았지만, 마치 그런 듯 기분이 상했다. 효성은 한편으로 재혁과 솔직하게 말다툼을 하고 싶기도 했다. 서로가 서로의 감정을 너무 잘 아는 나머지 싸움으로 번지지 않는 이 애매모호한 대화는, 오히려 슬슬 짜증만 돋우는 셈이었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는 동수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는 분위기를 띄워보고자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넸지만, 효성은 그를 무시했고 윤서는 되려 깜짝 놀라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동수는 식탁 위 컵을 만지작 거리며 생각했다.


‘정말 최악이군.‘


“우리 뭐라도 시켜야지.”

침묵을 깨고 효성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메뉴판을 집어 들고는 거침없이 페이지를 넘겼다. 맨 마지막장에 주류가 있을 것이다.


“그래. 그러자. 뭐 좋아하세요?”

윤서가 맞장구쳤다. 그녀는 동수를 바라보며 그에게 물었다. 윤서는 아무래도 이상한 분위기에 끌려온 동수가 신경 쓰였다.


“어, 저는…”

“야, 우리 다 동갑이야. 말 좀 편하게 하지?”

머뭇거리는 동수에게 일침을 가하듯 효성이 말했다. 그녀는 이 어색한 공기를 견디지 못하고 있었다.


“아, 그래 맞아. 윤서야, 너는 좋아하는 음식 있어?”

“아, 어… 나는….”

“어우! 됐어. 내가 알아서 시킬게.”

효성은 정말이지 이 자리가 싫고 불편했다. 그녀는 손을 번쩍 들어 점원을 호출했고, 주저 없이 주문을 했다.


“저희 A세트로 먹을게요. 그리고 음료는 맥주 한병이랑 콜라 한 캔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웬 콜라? 너 탄산 못 마시잖아.”

동수가 의아해하며 효성에게 물었다.


“윤서 술 못 마셔. 콜라 괜찮지? “

효성은 윤서를 보며 물었다.


“아, 응. 고마워.”

윤서가 수줍게 답했다.


"그런데 원래 술을 안 마셔?"

동수가 윤서에게 물었다.


"아, 어. 좋아하지도 않고, 나는 금방 취하더라고."

윤서가 민망해하며 답했다. 사실 윤서는 성인이 되고 난 후 친구들과 술집을 오가며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는 환상이 있었지만, 그녀의 체질은 동하지 않았다. 스무 살이 되던 날 호프집에서 멋모르고 마셔댄 술에 크게 데인 후로는, 윤서는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날 그녀는 가게 화장실에서 영혼이 나감을 느꼈던 것이다.


"아, 그렇구나."

동수가 외마디 감탄사를 내뱉었다. 윤서는 곧바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윤서는 동수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왜인지 그의 기대에 부응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언제나 다른 이들의 기준에 꼭 들어맞길 원했다. 윤서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시험대에 올라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 그럼 취미는 뭐야?"

동수가 다시 물었다. 그는 옆에서 자신을 째려보는 효성은 신경 쓰지 않았다.


"취미는.... 아! 오늘부터 자전거를 배우기 시작했어. 앞으로 취미로 타볼까 해."

윤서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효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참, 너도 자전거 있지? 우리 같이 타자."

"어? 어, 그래."


갑작스러운 윤서의 제안에 효성은 당황스러웠다. 무엇보다 윤서가 효성의 자전거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또 자신에게 함께 하길 권하는 게 놀라웠다. 윤서의 말에 효성은 재혁이 다시금 떠올랐다. 효성은 투정 부리듯이 윤서에게 말했다.


“근데 오늘 낮에 너네끼리 자전거 타던데?”

“아, 응. 우리가 실력이 어느 정도 되어야 네가 지루해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서 내가 오늘은 셋이서만 연습하자고 했어. “

“아…! 그랬구나.”


효성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윤서의 배려에 부끄러워졌다. 윤서의 말은 충분히 일리 있었다. 효성의 성격상 모두에게 잔소리를 보탰을 것이고, 아마도 민지는 그런 효성의 태도에 상처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효성은 민망한 듯 물을 마셨다. 동수는 이 상황을 그저 관찰하고 있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윤서가 동수와 효성의 눈치를 보며 일어났다. 그녀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 동수가 효성에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마.”

“뭘?”

효성이 물었다.


“윤서가 한 말이 빈말일지도 몰라. 그러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동수는 차분하고 냉정한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

“윤서는 꼭 ’ 좋은 사람‘이어야 하는 강박이 있는 것 같아. 오늘 있었던 ‘자전거 사건’에 대해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네가 기분이 나빴다면, 그건 그냥 기분 나쁜 일인 거야. “


“그렇다 쳐도, 윤서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잖아? “

효성이 되물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어. 그렇담 그건 윤서의 배려가 고맙기도 한 일이지…”

동수는 잠시 머뭇거리다 마저 답했다.

“그런데 네가 얼굴을 붉히면서까지 속상함을 감출 이유는 없어. “


효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동수의 말에 대꾸하기 위해 최대한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좌우로 바삐 움직이는 효성의 두 눈앞에 음식이 놓였다.


“주문하신 메뉴 나왔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오? 음식이 나왔네? 어서 먹자.”

화장실에서 돌아온 윤서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식당 점원은 옅은 미소와 함께 뒤돌아 갔다.




동수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윤서와 대화했다. 효성은 저녁 식사 내내 동수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고쳐먹었다. 그녀는 동수가 예상보다 어른스러운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전혀 모르겠다 ‘라는 표정을 하고는 주변 상황을 세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효성은 그런 동수가 조금은 두렵기도 했다. 그간 자신이 했던 말과 행동들을 통해 동수에게 무언가 들키게 된다면, 굉장히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 밖은 어느덧 캄캄해졌다. 세 사람은 식당에서 나와 큰 대로변을 향해 걸었다. 첫 만남의 어색함이 무색하게도, 그들은 전보다 더 많이 웃고 떠들고 있었다.


“나는 저쪽으로 가야 해.”

동수가 버스 정류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침 반대편으로 가야 했던 윤서와 효성은 그 자리에서 동수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래. 조심히 가. 우린 이쪽으로 가.”

“오늘 반가웠어! 안녕.”


동수는 뒤돌아 두 팔을 크게 흔들며 걸어갔다. 윤서와 효성도 그의 뒷모습을 보다 이내 뒤로 돌았다. 두 사람은 집을 향해 걸었다. 캄캄한 거리에는 가로등 불빛이 드문드문 비추고 있었다. 살랑이는 초 가을의 바람과 형광등의 누르스름한 색감이 운치 있었다.


"저게 뭐야?"

윤서가 손가락으로 현관문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현관문 앞에 웬 검은 형체가 아른거렸다.


"사람 같은데?"

효성은 경계하는 듯한 말투로 답했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윤서의 손목을 잡았다. 무슨 일이 생기면 그녀는 윤서를 잡아끌어 도망갈 생각이었다. 효성과 윤서는 천천히 실루엣의 뒤를 향해 걸어갔다. 그에게 가까워지는 만큼 두 사람의 목소리는 작아졌다.


"야, 어쩌려고?!"

윤서가 속삭이며 물었다. 효성은 윤서가 알아채게끔 입 모양을 크게 벌려 보였다.


기-다-려-봐.


그러고는 효성은 목을 가다듬고 실루엣의 뒤를 향해 소리쳤다.

"누구세요?!"

"앗!"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본 건 남자였다. 그는 왼손에 들려있던 꽃다발을 내팽개치고 줄행랑을 쳤다. 윤서와 효성도 마찬가지로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방금 뭐지?”

윤서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남자였는데. 꽃을 들고 있었어.”

효성이 방금 전 상황을 회상하며 답했다. 윤서 또한 눈을 깜박이며 생각해 보았다. 두 사람은 점차 사건에 구체적인 정황을 추가할 수 있었다.


“그렇지. 꽃다발을 들고, 우리 집 현관 앞에 서 있었어. “

“누굴 기다리고 있던 걸까? “

“그렇다면 우릴 보고 도망가진 않았을 거야.”

“맞아. 그럼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서 온 걸까?”

 두 사람의 시선은 다시 던져진 꽃다발로 향했다.


“고백일지도 모르겠군.”

효성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고백? 누구에게 하려던 걸까?!”

윤서가 흥미로운 듯 물었다.


“알 수 없지 뭐. 그 애가 다시 찾아오지 않는 한.”

“저 꽃의 꽃말과 관계가 있을까?”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아.”


효성은 단호하게 윤서의 말에 답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그녀는 하우스메이트들이 모두 모여있는 거실에서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하고자 했다. 마침 거실에는 지은, 민지, 신애가 소파에 앉아 보드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효성은 자세를 바르게 하며 그들에게 말했다.


“다들 여기 있었네. 나랑 윤서가 아까…”

“방금 이 앞에 남자가 꽃을 들고 서 있었어!”

효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흥분한 윤서가 그녀의 뒤에서 소리쳤다. 윤서는 한 손에 흙먼지가 가득 묻은, 망가진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꽃다발을 들어 보이며 큰 소리로 외쳤다.


“하얀 데이지 같은데, 꽃말은 ‘숨겨진 사랑’이래!”


월요일 연재
이전 07화 7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