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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by 유수

신애는 자신을 향한 호기심 가득한 여섯 개의 눈동자를 보았다. 반짝이는 이 동공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책상 위에 올려진 꽃다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애는 세 여자들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우리 학교 학생이고, 내일 저녁에 영화 보자고 했고, 날 좋아하니까 저런 것도 사 왔겠지.” 신애는 무심한 듯 어깨로 꽃을 가리켰다. 지은은 신애의 무뚝뚝한 모습에 조금은 실망했다.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고백을 받아놓고, 그 마음을 무시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사실 신애는 몹시 설레고 있었다. 그녀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입을 틀어막고 발을 동동 굴렀다. 꽃다발을 받고 좋아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을까. 아무리 도도한 여자도 여린 소녀로 만들어버리는 게 남자의 진심 어린 행동일 것이라고, 신애는 생각했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남자의 이야기를 상상해 보았다.


큰길을 옆에 두고 즐비한 상가들. 그중에는 유일한 꽃집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람 한 명 겨우 들어갈 법한 작은 입구를 지나면, 사람 두 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내부가 펼쳐진다. 양 쪽 벽면은 진열대로 꽉 차 있었고, 꽃 내음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꽃집 사장은 카운터에서 새로 들어온 화분들을 정리 중이었다. 그때, 가게 문에 달린 종이 울리며 한 남자가 들어오는 것이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들어오는 남자를 향해 사장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찾으시는 꽃이 있나요? “ 남자는 민망한 듯 시선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어쩔 줄 몰라했다. 왜냐하면 남자는 꽃집에 들어오기까지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았기 때문이다. 생전 꽃이라고는 어버이날에 카네이션 밖에 만져보지 못한 그는 이런 결심을 내린 자신을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사장은 그런 남자를 빤히 보다, 다시 한번 그에게 물었다. “화분? 꽃다발? 무얼 찾으시나요? “ 그제야 남자는 벌게진 얼굴을 겨우 들어 올려 사장의 눈을 잠시 마주쳤다. 그리곤 다시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리는 것이다. “꽃다발이요. 꽃은 아무거나….” 남자의 말에 사장은 웃으며 물었다. “그럼 이건 어떠세요? “ 사장의 손에는 하얀 데이지가 들려있었다. “네 그걸로 주세요. “ 남자는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지갑을 꺼내 들었다. 사장은 꽃을 포장대로 가져갔다. 가게는 음악소리조차 없이 조용했다. 사장이 가위로 리본과 포장용지를 자르는 소리만이 존재했다. 서걱서걱. 남자는 다시 수줍어져 가게 내부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작은 카운터와 벽면을 가득 채운 진열장, 그 반대편에 놓인 각종 화분과 화병들을 보았다.““여자친구에게 주시려나 봐요?” 사장은 꽃다발에 리본을 마저 묶으며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남자는 빨개진 얼굴로 답했다. “아직 아닌데…” 그의 말에 사장은 눈썹을 위로 들며 큰 소리로 말했다. “고백하려는 거군요? “ 남자는 부끄러움에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고, 사장은 그를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남자는 서둘러 계산을 마친 뒤, 꽃다발을 들고 잽싸게 가게 밖을 나갔다. 그의 뒤로 사장의 인사가 들렸다. “다음에 또 오세요!”


“정말 낭만적이야!” 윤서가 감탄하며 말했다. 그녀는 두 손을 모아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 “저게? 꽃다발 주면서 고백하는 건 흔한데?” 민지가 반박했다. 윤서는 민지를 잠시 흘겨보고는 말을 이어갔다. “야, 생각해 봐. 남자가 저 꽃다발을 사기 위해 꽃집까지 직접 찾아간 거야. 꽃다발만 사면 다야? 신애에게 하고 싶은 말도 머릿속에서 수백 번 고쳐 썼을 거라고. “ 그렇지, 신애는 속으로 외쳤다. 역시 예술학도 답게 윤서가 자신의 생각을 가장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 남자가 자신에게 할 말을 곱씹어가며 셰어하우스까지 걸음 했다는 건 미처 이야기에 넣지 못했지만 말이다. “로맨스 영화 한 편을 보는 것 같았어.” 윤서가 방금 전 장면을 회상하며 말했다. 그녀는 몰입에서 도통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넌? 너도 걔가 좋아?” 지은이 신애에게 물었다. 신애는 지은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모르겠어.” “네 마음을 몰라?” 지은이 되물었다. “가끔 도서관에서 만나서 같이 공부도 하고 커피도 마셔봤는데, 착하고 좋은 애 같아.” 신애가 말했다. 그녀도 자신의 대답이 지은의 물음과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대화에 헷갈려하는 지은을 대신해서 이번엔 민지가 물었다. “그래서?” 신애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말했다. “그래서는 무슨,“ 그녀는 대화를 마무리 짓기 위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모르겠어. 이제 가! “


신애는 서둘러 방문을 닫고 들어갔다. 남겨진 세 사람은 2층으로 올라갔다. 오늘 하루는 세 사람에게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뜨거운 물을 맞으며 샤워를 해야 했다. 그건 윤서, 민지, 지은에게 모두 동일했다. 세 여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서로 앞다투어 화장실로 뛰어갔다. ”내가 먼저 씻을래! “ ”안돼! 나 땀 많이 흘렸단 말이야! “ ”내가! “ 화장실을 앞에 두고 실랑이가 벌어졌다. 지은은 자신이 가장 먼저 화장실 문고리를 잡았으니 우선권을 가질 자격이 있다 우겼다. 민지는 그렇지만 자신의 발이 화장실 안으로 먼저 들어갔기 때문에 순위 경쟁은 무효라 주장했다. 윤서는 자신이 먼저 씻게 된다면 일주일간 화장실 청소를 담당하겠다 제안했지만, 언성을 높여가며 다투는 두 사람에게 무시를 당했다. 그렇게 윤서도 언쟁에 끼게 되면서 복도는 시끌시끌해졌다. ”난 넘어졌잖아. 바지에 흙 묻은 것 좀 봐! “ “누군 흙 안 묻었어? 난 원래 땀이 많아서 찝찝하다고!” “나도 피곤한데…” 이때, 참다못한 효성이 방문을 열고 소리쳤다. “시끄러워! 그냥 가위 바위 보로 순서 결정하면 되잖아!”


효성의 호통에 세 사람은 입을 꾹 닫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가위, 바위, 보. 주먹을 꼭 쥔 손을 위아래로 흔들다 각자 패를 공개했다. 보자기 둘에 가위 하나. 지은의 승이었다. 지은은 말없이 그대로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민지와 윤서는 다시 대결을 했다. 이번엔 민지가 이겼다. 순서가 정해지자 두 사람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효성은 조용해진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따뜻한 차를 마시기 위해 주방으로 가려던 참이었는데, 거실에서 꽃다발을 풀고 있는 신애와 마주쳤다. “집에 있었네?” 신애가 물었다. “응. 이건 뭐야?” 효성이 물었다. “아, 선물 받은 거야.” 신애는 꽃을 화병에 넣으며 말했다. 효성은 신애를 바라보다 부엌으로 가 냉수를 꺼내 마셨다. 지금 기분에 따뜻한 차는 어울리지 않았다. 효성이 다시 방으로 올라가려 하자, 신애가 그녀를 붙잡았다. “효성아, 나 물어볼 게 있는데.” 효성은 신애를 보며 말했다. “그럼 나 차 한잔만 타줘.”


두 사람은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효성의 답에 신애는 곧바로 꽃다발 잔해를 치우고, 커피포트로 물을 끓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컵 두 잔이 그들 앞에 놓여있었다. 효성은 손을 뻗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거 무슨 차야?” 효성이 물었다. “캐모마일.” 신애가 답했다. “향이 좋네.” 신애가 조용히 말했다. 신애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문을 트기 위한 말을 고민하고 있었다. 효성은 답답했는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뭔데? 빨리 말해. “ ”아! “ 신애는 머리를 귀 뒤로 꽂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성격이 급한 효성의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음을 느낀 그녀는 무작정 말했다. ”너랑 재혁은 어떻게 사귀게 된 거야? “ ”뭐? “ 효성은 당황한 듯 대답을 하지 못했다. 신애는 다시 한번 조곤조곤 말했다. “우리 집에서 연애 중인 사람은 너 하나뿐이잖아. 그래서 내가 이런 걸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그래. 너랑 재혁은 어쩌다 만나게 된 거야?” 효성은 이 와중에 ‘어쩌다 만났다’라는 말이 거슬렸다. 신애의 그 말로 재혁과의 연애가 마치 ‘사고’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게 왜 궁금한데? 이거 준 사람이 너랑 사귀재?” 효성은 화병에 담긴 꽃을 보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응, 그럴 것 같아.” 신애가 말했다. 효성은 고개를 돌려 신애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너도 걔가 좋아?” 효성의 물음에 신애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게 중요한 거겠지? 그런데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 신애는 다시 효성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언제부터 재혁이를 좋아하게 된 거야?” 신애의 눈을 보던 효성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는 신애에게 말했다. “이야기가 좀 길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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