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성이 14살 때였다. 어린 효성은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또래들보다 큰 키 덕에 자주 주목을 받았지만, 그녀에 대한 과한 관심이 부담스러웠다. 효성은 자꾸만 자신에게 다가오는 아이들을 밀어냈다. 결국엔 그녀에게 손을 내미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효성은 학교에서 알아주는 외톨이었다. 그녀는 외로운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푹 숙이고 다녔다. 그런 효성에게 유일하게 위로가 된 건 바로 ‘그림’이었다. 그녀는 쉬는 시간마다 공책의 빈 페이지를 펼쳐 그림을 그렸다. 효성은 그림을 이용해 자신의 세상을 만들었다. 그림 속 효성은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밝고 당찬 아이였다. 화목한 가정에서 웃음이 마를 일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주인공이었다. 그렇게 그림에 빠져 지내던 효성이 가장 기다리는 시간은 오후 3시. 하교 후 집으로 돌아가는 때였다. 수업이 끝나면, 효성은 가장 먼저 책가방을 챙겨 빠른 걸음으로 귀가했다. 그리곤 방에 틀어박혀 잠에 들 때까지 그림을 그렸다.
효성은 시간이 아까웠다.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한시라도 빨리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효성은 여러 시도 끝에 지름길을 발견했다. 학교 앞 큰길에서 빠지는 샛길로 걸으면, 집에 도착하는 시간을 10분이나 단축시킬 수 있었다. 효성은 그 뒤로부터 항상 샛길로 걸었다. 언제나 뒤를 조심하라는 부모님의 경고에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큰 키 덕에 자신을 만만하게 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마침 반 아이들이 큰길로 걸었기 때문이었다. 서로 팔짱을 끼고 깔깔대며 걸어가는 모습들을 보자니, 효성은 너무 외로웠다. 그래서 그날도 효성은 반에서 제일 먼저 나와 샛길로 향했다. 효성은 발걸음을 재촉하며 큰 보폭으로 걸었다. 아빠가 엄마를 위해 꽃다발을 사 오는 장면을 그릴 예정이었다. 그림 속 효성의 가족은,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을 맞아 외식을 한 뒤에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 기념 케이크를 잘라먹을 계획이었던 것이다. 퍽! 그때, 효성은 무언가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뒤통수를 맞은 그녀는 순간적으로 앞이 보이지 않음을 느꼈다. 머리가 울리고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효성은 몸을 일으키기 위해 손가락과 발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죽었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냐, 움직이고 있어.” 다른 목소리가 답했다. 효성은 눈동자를 굴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빨리 주머니만 뒤지고 가자. “ “알았어.” 목소리와 함께 두 명의 남자가 효성의 어깨를 잡고 몸을 뒤집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옷의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상의와 하의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효성은 자신의 몸에 닿는 거친 손길이 불쾌했지만 손 하나 까딱하기도 힘든 나머지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코에서 뜨거운 액체가 흘러나왔다. 효성이 고개를 내리자 무릎에 피가 뚝뚝 떨어졌다. 효성은 목소리를 쥐어짜며 말했다. “살려주세요.” 그녀의 말을 들은 남자가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안 죽일 거야. 걱정 말고 잠깐 있어.”
효성은 낄낄거리며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파헤치는 두 남자를 경멸하며 바라봤다. 효성의 주머니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그들은 그녀의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가방을 거꾸로 들자 안에 있던 내용물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효성의 앞에 공책과 펜이 힘없이 나뒹굴었다. 그녀는 최후의 발악을 시도했다. 배에 최대한 힘을 주고 입을 크게 열어 소리쳤다. “살려주세요!” “이게 미쳤나!” 효성의 외침에 놀란 남자가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효성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다. “살려주세요! 도와줘요!” “조용히 안 해!” 다른 남자가 손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효성은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남자의 힘은 완강했다. 손톱으로 할퀴고, 때리고, 두 손을 이용해도 소용없었다. 효성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남자는 효성의 두 팔을 제압하며 얼굴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너 여기가 어떤 곳인 줄 알아? 네가 여기서 무슨 일을 당하던, 아무도 너를 발견하거나 도와줄 수 없어. 이렇게 외진 길에 여자아이 혼자 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데.” 효성은 두려움에 온몸이 떨리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입이 막혀 있어 숨 쉬기가 더욱 힘들었다. 두 남자는 효성을 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효성은 공포감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둠 속의 고통이 덜 괴로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어둠 속에서 간절히 빌어보는 것뿐이었다.
효성은 아직까지도 그 순간이 잊히지 않았다. 기적을 눈으로 목격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니까. 눈을 감고 모든 걸 포기했던 효성의 앞에 누군가 나타나 크게 소리친 것이다. “이 거지 같은 것들!” 효성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 앞에 나타난 남자아이는 효성을 붙잡은 두 남자에게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다시 소리쳤다. “당장 그 애 놔줘요! 안 그러면 경찰에 신고할 겁니다! 제가 사진도 찍었어요! “ 상황이 복잡해짐을 느낀 두 남자는 효성을 내팽개치고 사라졌다. 남자아이는 곧바로 효성에게 다가가 물었다. “괜찮니?” 그의 말에 안심한 효성은 그대로 대성통곡을 하고 말았다. 남자아이는 효성을 안아주며 말했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남자아이는 효성을 부축해 병원을 찾았다. 효성은 뒤통수를 무려 5 바늘이나 꿰매었다. 치료 후에도 효성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남자아이는 효성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나는 재혁이라고 해. 너는 효성이라고 했지?” 효성은 재혁의 눈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응. “ 재혁은 효성에게 그녀의 공책을 내밀며 말했다. “너 그림 잘 그리더라.” 놀란 효성은 그에게서 공책을 가로채며 쏘아붙였다. “왜 남의 공책을 함부로 열어봐!” 효성의 반응에 재혁은 어쩔 줄 몰라하며 말했다. “아, 미안. 기다리다 너무 심심해서 그만…” 재혁은 아차 싶었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효성은 부끄러움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치를 보던 재혁은 다시 효성에게 말했다. “그런데 오늘은 어떤 그림을 그리려 했어?”
효성은 잠시 머뭇거리다 짧게 답했다.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을 맞이한 가족. “ ”아하, 너네 가족 이야기구나? “ 재혁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아니, 전혀. “ 효성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재혁은 이번에도 자신이 효성의 약점을 건드렸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심통이 난 것 같은 효성의 얼굴을 슬쩍 보고는 말했다. “우리 가족도 사이가 좋지 않아. 작년에 엄마가 집을 나갔거든. “ 재혁의 말을 들은 효성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혹시 바람피우신 거야?” 효성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재혁이 되물었다. 그의 말투에서는 애써 억누른 감정이 느껴졌다. 효성은 그의 마음을 정확히 알았다. 분노와 증오로 가득하고 싶지만 그리움과 사랑을 배제할 수 없는, 복잡하고도 짜증 나는 그런 감정이었다. 효성은 공책을 만지작 거리며 말했다. “우리 아빠도 바람피웠거든. “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서로에게 끌렸다. 같은 학교에 다니지는 않았지만 효성과 재혁은 매일같이 만나 함께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재혁은 목공예에 관심이 많았다. 가구 공장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따라 목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효성은 그에게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쳐줬다. 물론 전문가의 수준은 아니었지만, 재혁에게는 충분했다. 그는 행복한 여자아이를 그리는 효성 옆에서 자신만의 가구를 디자인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효성은 그림을 그리다 말고 재혁에게 말했다. “그림 속 여자아이가 연애를 시작하면 좋을 텐데.” 그녀의 말에 재혁은 효성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미안해. 내가 먼저 고백했어야 했어.”
효성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신애는, 이 대목에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그렇게 연애를 시작했다고? “ ”응. “ 효성은 신애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신애는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효성에게 물었다. ”너는 재혁이 왜 좋았는데? 아니, 언제부터 좋았는데? “ 효성은 조금 황당해하며 말했다. “운명이었다니깐?” 효성의 말에도 신애는 생각이 많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헷갈리는 건 효성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그녀의 연애담을 들은 사람들은, 그 ’ 운명적 이끌림’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효성이 바라보는 신애는 맥락을 전혀 파악하고 있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럼 넌 지금까지 재혁만 만난 거야?” 신애가 물었다. “그렇지.” 효성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네 이상형도 재혁이야?” 신애의 물음에 효성은 움찔했다. 그녀에겐 ‘이상형’이랄 것이 없었다. 운명적 상대를 만났는데 이상형을 만들어 놓는 건 쓸데없는 일이었으니까. ”이상형? 그런 게 뭐가 중요해.” 효성은 찻잔에 남아있던 차를 마저 마시고는 말을 이어갔다. “재혁과 나는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인연이었어. 난 이상형 따윈 없어.” 신애는 그제야 모든 퍼즐을 맞춘 듯했다. 그녀의 눈에 총기가 돌아왔다. “그렇구나, 이제 알았어.” 신애가 웃으며 말했다. 이야기를 성황리에 마치게 된 효성도 다시 웃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랜 시간 앉아있던 탓에 다리가 뻐근했다. 신애는 빈 찻잔을 주방으로 가져가기 전, 효성에게 말했다. “고마워.” 효성은 계단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뭘, 잘 자.”
방으로 돌아온 효성은 재혁에게 부재중 전화가 온 것을 확인했다. 그녀는 재빨리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몇 번의 신호음 뒤에 재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 신애랑 이야기 좀 하느라.” 효성이 말했다. “나도 미안. 아침에 전화를 그렇게 끊는 게 아니었어.” 재혁이 말했다. 그의 사과를 들은 효성은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루 종일 우울했던 탓에 윤서, 민지, 지은에게 소리를 지르기까지 한 것이다. “괜찮아.” 효성이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재혁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효성과의 통화를 조금 더 이어갈 수 있었다. “신애랑은 무슨 얘기한 거야?” 재혁이 물었다. 효성은 그에게 신애와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재혁은 효성이 두 사람의 특별한 추억을 잘 풀어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언제나 돌이켜보아도 멋진 만남이었다. 효성은 이어서 신애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해 주었고, 재혁은 효성의 말을 가로막을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꽃다발을 들고 왔다고?” 재혁이 놀라 물었다. “응.” 효성이 답했다. “그런 쓸데없는 짓을 왜 해?” 재혁이 말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간지러운 느낌을 털어내려 몸을 부르르 떨었다. 효성은 그의 말에 멈칫했다. “그러게. 그 애도 참…” 효성은 더 이상 재혁의 말에 맞장구를 칠 수 없었다. “난 이제 자야겠어.” 재혁이 불을 끄며 말했다. “그래, 나도 자야겠어. 잘 자.” 효성은 재혁에게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효성은 잠들지 않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녀는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녀는 창가에 몸을 기대어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하얀 연기는 검은 하늘에 서서히 사라졌다. 효성은 연기가 사라지는 것이 싫어 자꾸만 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