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성은 가만히 윤서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가 끝나갈 때 즈음, 윤서의 눈에 눈물이 맺혀있었다. 효성은 윤서가 말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없이 그녀를 안아주었다. 효성의 품에 파묻힌 윤서는 더욱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효성은 윤서의 등을 손바닥으로 토닥였다. 어쩌면 윤서가 처음으로 ‘직면’에 성공한 것이라고, 효성은 생각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윤서를 달래주었다.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던 그녀는 천천히 자신을 진정시켰다. 힘이 쏙 빠졌지만, 윤서는 작업실에 가야 했다. 곧 있을 중간평가를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효성도 마찬가지로 시험공부를 위해 도서관에 가겠다고 했다. 두 사람은 외출 준비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효성은 동수를 부르지 않고 윤서와 나란히 걸었다.
윤서는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효성을 배웅하고 작업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물감과 붓을 꺼내고, 물통에 물을 가득 채웠다. 소매가 더러워지는 걸 막기 위해 팔토시를 꼈다. 이번엔 눈동자와 맞는 이목구비를 그려 넣을 차례였다. 이전처럼 물감을 섞어 색을 만들고, 얇은 붓을 들어 획을 긋기 시작했다. 스펀지를 이용해 번짐 효과를 주기도 했다. 윤서의 작업은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셰어하우스에서 효성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은 것이 도움이 되었던 걸까, 그녀는 온전히 그림에 몰두할 수 있었다. 몇 시간 뒤, 윤서는 자신이 그린 커다란 자화상을 마주하고 있었다. 또렷하게 뜬 두 눈, 살짝 처진 입꼬리, 주름진 미간이 담긴 얼굴을 본 윤서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물통을 들고 세면대를 향해 있는 힘껏 던져버렸다. 물통은 큰 소리와 함께 나뒹굴며 작업실 바닥에 물감이 섞인 물을 여기저기 흩뿌렸다. 윤서의 꽉 쥔 두 주먹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윤서는 암흑 속에서 자신을 더듬거리던 차가운 손끝을 잊을 수 없었다. 사촌 오빠의 손길이 윤서의 몸을 훑을 때, 겁에 질린 그녀는 차마 잠에서 깨어났다는 걸 알릴 수 없었다. 윤서는 그저 모든 것이 끝나기만을 빌면서 두 눈을 꼭 감고 자는 척을 했다. 그녀는 귀까지 울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자신의 온몸 구석구석이 들춰지는 것을 참아냈다. 얼마 뒤, 볼일을 마친 사촌 오빠가 방을 나가자 윤서는 재빨리 일어나 옷 단추를 채웠다. 서둘러 방에서 탈출하고 싶었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13살의 윤서는 그렇게 어둠 속에서 한참을 앉아있었다.
윤서는 작업실 바닥을 걸레질했다. 마침 지저분했던 얼룩들을 지울 수 있어 그리 맥락 없는 행동은 아니었다며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청소를 마친 윤서는 짐을 챙겨 작업실을 나섰다. 어둑해진 하늘을 보며 셰어하우스를 향해 걸었다. 그녀는 뜻대로 움직여주는 두 다리를 보며 새삼스레 감사함을 느꼈다. 사지 멀쩡한 상태로 어엿한 성인이 된 그녀는, 누가 봐도 평범해 보였다. 윤서는 ‘평범함’을 세뇌시키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던 다음 날, 윤서는 사촌오빠의 만행을 부모님에게 알렸다. 예상치 못한 사건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두 어른은 우선 또 다른 어른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한 삼촌은 집에 돌아온 사촌오빠를 나무랐지만,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전부 부인했다. 계속되는 추궁에도 자백을 하지 않는 자식을 이길 부모는 없었다. 그렇게 네 명의 어른은 사건을 ‘없던 일’로 넘기기로 했다. 윤서는 하루아침에 거짓말쟁이가 되었고, 어른들은 윤서의 어린 나이를 용인해 주기로 한 것이다. 그 후로 윤서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 상태로 죽 평범하게 살아왔다.
셰어하우스에 도착한 윤서는 곧바로 집에 들어가지 않고, 멀찍이 서서 건물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이사를 온 지도 반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윤서는 처음 이사 온 날을 떠올렸다. 정신없이 짐을 계단 위로 올려보내고, 상자를 하나하나 열면서 옷장과 책장을 가득 채워나갔다. 중간에 하우스메이트들의 노크 소리와 시덥지않은 이야기들로 방해를 받아 꼬박 하루가 걸린 일이었다. 왜들 그렇게 궁금한게 많은지, 또 오지랖은 왜이리 넓은지. 윤서는 애써 대답을 끄집어 냈다가, 말을 끊지못해 안절부절하기를 반복했다. 그날 밤, 그녀는 아주 깊은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리고 윤서는 하우스메이트들과 쌓아온 반년을 기억해 냈다. 아침마다 화장실 앞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쟁탈전, 가다보면 하우스메이트 중 누군가는 함께하게 되는 등굣길과 하굣길, 저녁식사와 영화 한편, 마음을 털어놓는 수다와 자전거까지. 윤서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갑자기 현관문이 열리더니 지은과 민지가 나와 말했다. “거기 서서 뭐 해? 어서 들어와!” 눈이 번쩍 뜨인 윤서는 웃으며 두 사람을 향해 뛰어갔다. 작품의 제목은 ‘트라우마’도 아닌, ‘극복’도 아닌, ‘적응’ 일지도 모른다는 궁금증을 품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