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지는 윤서와 효성의 사이가 변했음을 직감했다. 윤서가 이사를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보다, 지금의 두 사람은 가까워져 있었다. 민지는 기분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새로 굴러들어 온 하우스메이트에게 단짝 친구를 빼앗긴 기분이랄까. 무엇보다 두 사람은 다른 하우스메이트들은 알지 못하는, 둘만이 이해하는 어떤 연대가 형성된 듯 보였다. 효성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고 자부하는 민지에게는 납득이 가는 상황은 아니었다. 단순히 효성이 윤서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닌, 윤서 역시 효성의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민지의 깨우는 지은의 목소리가 있었다. “야, 이거 타잖아!” 지은은 멍한 얼굴로 생선을 태우는 민지를 보며 소리쳤다. 지은의 외침에 정신이 든 민지는 재빨리 생선을 뒤집었다. 프라이팬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환기시켜야겠다.” 지은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부엌의 창문을 모두 열고, 그것도 모자라 현관문까지 열기로 했다. 연기가 거실까지 퍼져버린 것이다. 문을 열고 집 앞에서 눈을 감고 서 있는 윤서를 본 민지는, 그녀가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럼에도 민지는 감정을 접고 윤서에게 외쳤다. “거기서 뭐 해? 빨리 들어와!”
윤서는 잡 안에 자욱한 연기를 보고는 옷소매로 코와 입을 막은 채로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부엌의 연기는 대부분 사라진 뒤였다. 윤서는 민지와 지은을 향해 물었다. “저녁 먹어? 나도 같이 먹어도 될까?” 지은은 민지를 슬쩍 보더니 답했다. “물론이지. 이따가 효성이도 올 거라 일부러 많이 했어.” 윤서는 손뼉을 치며 말했다. “잘됐다! 그럼 나도 보탤게. “ 그녀는 곧바로 냉장고로 향했다. 냉장고 안을 한참 뒤적거리던 윤서가 식재료를 꺼내며 말했다. ”소시지, 감자, 파, 양파…. 볶음 하면 되겠지? “ 윤서는 자신의 말과 함께 재빨리 재료들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민지는 그런 윤서를 힐끔거리며 생선구이를 마무리했다. 효성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 저녁시간이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 앞에는 세 사람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진수성찬이 펼쳐져있었다. 지은의 볶음밥, 민지의 생선구이, 그리고 윤서의 소시지 야채볶음까지. 효성은 머쓱해하며 세 사람을 향해 말했다. ”정말 고마워. 다음 저녁은 내가 준비할게.” 실제로 효성은 다음날 모두를 위한 파스타를 요리하기 위해 장 볼 계획을 세웠다.
네 사람은 부엌 테이블에 옹기종기 앉아 식사를 했다. 밥을 한 숟갈 뜬 윤서가 그제야 신애의 행방을 물었다. “신애는?” 그러자 수업을 마치고 가장 먼저 집으로 돌아온 지은이 말했다. “그 꽃다발 준 남자하고 나갔어.” “정말? 신애 이제 연애하는 거야?” 효성이 물었다. 지난번 신애와의 대화에서 자신의 말이 보탬이 된 건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은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글쎄, 그런데 그 남자가 꽃다발을 또 가지고 왔어.” “또?” 이번엔 민지가 물었다. 지은은 생선가시를 바르다 말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응. 지난번이랑은 다른 꽃다발이었어.” 말을 마친 지은은 다시 생선구이에 집중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세 사람의 수다가 시작되었다. “완전 로맨티시스트다.” “그러게, 이러다 매번 꽃을 사 오는 건 아닐까?” “돈이 어딨어. 말이 되니 그게.” “왜? 들꽃이라도 꺾어 올 수도 있지!” “내가 장담하는데, 다음에는 빈손으로 올걸?” 효성의 말에 민지가 반박했다. “다음에? 다음이 있을지 없을지 네가 어떻게 알아?” 효성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신애랑 이야기해 보니 계속 만날 것 같던데?” 민지는 이번엔 효성과 신애의 관계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효성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하우스메이트와 마음속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반면에, 자신은 오직 효성만을 찾았던 것이다. 기분이 상한 민지는 소시지를 크게 베어 물며 말했다. “어쨌든, 꽃은 또 올 수 있어.” 우적우적 소시지를 씹는 민지를 향해 윤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거 맛있어? 내가 한 건데.” 민지는 윤서를 슬쩍 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리며 작게 답했다. “응.” 그녀의 대답을 들은 윤서는 뿌듯한 얼굴로 감자를 집어먹었다.
식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될 무렵, 네 사람은 또 다른 주제로 수다의 장을 열었다. “아, 시험범위는 왜 이렇게 긴 걸까.” 효성의 푸념을 필두로 나머지 세 사람도 금세 풀이 죽었다. “그러게, 나도 오늘 집에서 내내 공부만 했어.” 지은이 말했다. 윤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학과 과정에 따라 시험 대신 전시회를 위한 졸업작품을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작의 고통도 만만치 않았지만, 다수결에 따라 온갖 책더미에 파묻혀있을 세명의 하우스메이트에게 동정을 보내기로 했다. “힘들겠구나.” 윤서는 효성과 지은을 측은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한편 민지는 달랐다. 그녀는 스트레스를 받기는커녕, 초조했다. 항상 자신의 관심사가 우선이었던 민지는, 학업 진도 역시 동급생들에 비해 현저히 뒤처졌다. 그녀는 항상 과제를 빼먹거나 늦게 제출하는 학생이었고, 강의에는 영 집중을 하지 못했다. 결국 밀린 학습은 쌓이고 쌓여 민지는 재수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제는 졸업이 늦어질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시간이 다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건지, 어쩌다 자신이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지, 민지는 불안함에 휩싸여 대화에 더 이상 참여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저 두 손을 만지작거리며 바짝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를 뿐이었다.
“야, 너 내 말 듣고 있어?” 효성이 손으로 민지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민지는 놀라며 되물었다. “어? 뭐라고 했어?” 효성은 답답하다는 듯이 민지의 두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내일 나랑 도서관에서 공부 같이 할 거냐고. 벌써 세 번째 물어보는 거거든? “ 민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아, 그랬어? 그래, 가자. “ 효성은 짜증 섞인 말투로 민지에게 말했다. “내일 아침 10시. 동수가 데리러 올 거니까 그때까지 준비해. “ ”응. “ 기가 죽은 민지는 대답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민지의 고개가 향한 곳은 윤서였다. 윤서는 민지를 걱정스럽게 보며 물었다. ”너 괜찮아? “ 민지는 윤서에게만큼은 불안한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아 큰 소리로 답했다. ”어, 괜찮아! 내가 괜찮지 않을 리가 없잖아.” 그녀의 말을 들은 윤서가 웃으며 말했다. “아, 그럼 다행이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