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아침, 민지는 정말 도서관에 가기 싫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최소한의 단장을 했다. “아, 하기 싫어.” 옷을 갈아입으며 그녀가 1분마다 내뱉던 말이었다. 민지는 책가방을 들고 한참을 서 있었다. 가방에 넣어갈 것들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금 당장 무슨 책을 펼쳐야 하는지, 어떤 필기를 참고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민지는 그런 자신을 마주할 수 없어 자꾸만 생각에 생각을 이어 붙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수업에 꼬박꼬박 참여했더라면, 학업 외에 다른 관심사가 없었더라면, 호텔 경영학이 아닌 인테리어학과에 지원했더라면,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지고 경영 공부를 했더라면, 엄마가 자신의 꿈을 믿고 응원해 주었더라면. 이제 민지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다. 호텔을 운영하는 것일까, 아버지와 같은 건축을 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인테리어? 그녀는 애초에 아버지를 따라 건축현장에 간 자신도 원망스러웠다. 그때 호기심을 갖지 않았더라면. 아, 그날 보았던 호텔의 규모는 너무 컸고, 그 안은 더 눈부셨다. 반짝이는 금장식, 우아한 자태의 안내데스크, 유니폼을 입고 일관되게 움직이는 직원들, 건물 내 은은하게 퍼지던 꽃향기. 무작정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 꿈을 만들어내지 않았더라면. 민지는 갑자기 전화기를 들고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지는 다짜고짜 그녀에게 물었다. “엄마는 왜 날 믿지 못하는 거예요?” 간만의 연락에 대한 반가움도 잠시, 민지의 엄마는 당황한 듯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니?” 민지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쏘아붙였다. “왜 절 믿지 못하시냐고요. 항상 그런 식이에요. “ 민지의 날이 선 말에도 엄마는 차분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렴. “ 그 순간 민지의 목이 콱 막혔다. 엄마의 반응은 자신의 예상보다 따뜻했다. 그녀는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한 채, 머릿속으로 문장들을 정리했다. 수화기에서는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때…“ 민지가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그때 저한테 그러셨잖아요. 제가 아빠랑 같이 호텔을 보고 온 날, 호텔 경영을 하겠다고 결심한 날에, 엄마는 제게 ‘잘 생각해 봐.’라고 하셨어요.” 민지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그녀의 두 볼을 타고 눈물이 투두둑 떨어졌다. “그건…” 민지의 엄마는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변명하려 하지 마세요. 저는 다 기억해요. “ 민지가 질세라 덧붙였다. 민지의 엄마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건 널 믿지 못해서가 아니야. 네가 진정 원하는 일인지, 신중히 결정했으면 하는 마음에 한 말이었어. ” “하!” 엄마의 말을 들은 민지가 외마디 비웃음을 날렸다. 그녀는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웃기지 마세요. 그래서 제가 진심이라고 했을 때, 엄마의 다음 답변은 ’ 그래, 두고 보자.‘ 였어요.” 두 사람에게 다시 한번 정적이 찾아왔다.
”그래서? “ 침묵을 깨고 민지의 엄마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섭섭한 마음을 담아 민지에게 물었다. “넌 지금 뭐가 불만이니? 네가 원하는 학과로 진학을 했고, 아직도 같은 꿈을 가지고 있는 것 아냐?” 민지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이제 고민에 빠진 건 민지였다. 그녀는 자신의 낙제를 엄마에게 덮어 씌우려던 사실을 맞이해야만 했다.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그저 용기를 가지고 조금 더 열심히 했더라면, 이런 대화는 불필요했을 것이다. 민지의 엄마는 한숨을 쉬며 다시 말했다. “엄마는 어떤 경우에도 네 꿈을 응원하지. 그건 당연하잖아. 엄마니까. 그런데 동시에 잘못된 길로 가지 않을까, 넘어지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것도 엄마 아니겠니?” 민지는 실로 오랜만에 엄마의 감정적인 말투를 들었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내 민지는 그 말을 하고 말았다. “저 이번에 졸업 못해요. 낙제거든요. ” 일을 저지르고만 민지는 숨죽여 엄마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후, 민지는 전화를 끊고 베개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흐느꼈다. 그녀의 엄마는 이번에도 예상을 벗어나는 말을 했다. “괜찮아. 포기하지만 않으면 돼.”
활기차게 아침을 맞이한 효성은 외출준비를 마치고 부엌으로 내려갔다. 주말에 어울리는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식빵을 굽고, 커피를 내려 거실로 나갔다. 하우스메이트들 모두 늦잠에 빠져있는지 집 안은 아주 조용했다. 여유롭고 평화로운 아침에 효성은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잠시 뒤 도서관에서 보내게 될 알찬 하루를 생각하며 빵을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발가락도 리듬에 맞춰 까딱까딱 움직였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딩-동. 효성은 온 집안에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깜짝 놀랐다. 동수가 벌써 온 것일까. 효성은 벌떡 일어나 현관문을 열며 말했다. “야, 초인종 누르지 말라니깐!”
“아, 죄송합니다!” 효성의 눈앞에는 꽃다발을 든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그제야 효성은 그가 신애를 찾아온 남자임을 알아차렸다. 놀란 건 그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효성은 재빨리 그에게 사과했다. “아, 저도 죄송해요. 제 친구인 줄 알았어요. “ 남자는 수줍음이 많아 보였다. 그는 한 손을 뒤통수로 가져가며 말했다. 말을 하면서도 그는 효성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아, 아닙니다! “ 그의 모습을 본 효성은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신애랑 만나기로 했나 보죠? 제가 불러줄게요. ” 말을 마친 효성은 곧바로 뒤로 돌아 신애의 방문에 노크를 해댔다. 남자의 대답은 들을 새도 없었다. 쿵쿵 쿵쿵. 사정없는 노크질에 신애가 방 안에서 소리쳤다. “왜 그래!” 그녀의 반응에 효성은 덤덤하게 대응했다. “네 친구 왔어. 나와.” 그녀는 짧고 간단하게 용건을 전달하고 다시 거실 소파에 앉았다. 남자는 그렇게 휑하게 열린 현관문을 두고 서 있었다. 이어서 신애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녀는 현관 앞에 멀뚱하게 있는 남자를 보더니 서둘러 그를 맞이하며 등 뒤에서 문을 닫았다. 남자는 웃으며 신애에게 꽃다발을 줬다. 효성은 다시 빵을 베어 물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효성은 현관문 너머 노크소리를 들었다. 똑. 똑. 똑. 이번에야말로 동수가 온 것이 확실했다. 효성은 의심의 여지없이 문을 열었다. “준비됐어? 가자.” 효성을 본 동수가 말했다. 효성은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려 계단을 향해 소리쳤다. “민지야! 동수 왔어. 가자!” 그녀의 외침 뒤, 문고리가 돌려지는 소리와 함께 민지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퉁퉁 부은 눈을 한 그녀는 효성에게 무언가 말하는 듯 입을 움직였다. “뭐라고?” 민지를 보던 효성이 물었다. 그러자 민지는 아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효성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야, 안 들려. 일단 내려와서 말해. “ 효성은 답답하다는 듯 말하며 밖으로 나갔다. 어느새 동수는 차 시동을 걸어둔 상태였다. 효성은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앉아 민지가 나오길 기다렸다.
“안 간다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리던 민지는 하는 수 없이 가방을 챙겨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의 어깨는 축 쳐지다 못해 바닥과 닿을 것만 같았다. 밖으로 나온 민지는 천천히 동수의 차에 올라탔다. 민지의 모습을 살피던 동수는 그녀에게 따로 인사를 건네지 않기로 했다. 영문을 알 수는 없었지만 직감적으로 민지에게 사연이 있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출발합니다.” 동수는 허공을 향해 말을 내뱉고는 핸들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