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성은 시험기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재혁이 때맞춰 휴가를 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바다를 보러 여행을 가기로 했다. 여행 전날 밤, 들뜬 마음으로 짐을 싸던 효성은 뜻밖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엄마?” 효성은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시험은 잘 봤니?” 그녀의 엄마가 물었다. 두 모녀지간에 안부인사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언제나 용건만을 말하고 대화를 종료하기 바빴다. 이유는 머지않아 드러날 예정이었다. “뭐 그럭저럭이요.” 효성은 대충 답하며 속옷을 챙겼다. “시간 괜찮으면 집에 내려오던지. 큰언니도 온다고 하더라.” 효성의 엄마가 말했다. 효성은 짐 싸기를 멈추고, 담담하게 말했다. “안 돼요. 저 재혁이랑 여행 가기로 했어요. “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수화기 너머로 찢어질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 “ 효성의 엄마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녀는 효성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정신 나갔니? 아직 결혼한 사이도 아니면서 무슨 여행을 가? 그리고, 엄마가 그런 놈 만나지 말라고 했지! “ 효성은 이미 익숙한 듯이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아니, 사실 익숙할 수 없었다. 자신이 운명처럼 여기는 남자를 반대하는 부모에게 적응할 수는 없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 효성은 단칼에 잘라 말했다. 그러자 그녀의 엄마도 냉정하게 맞받아쳤다. ”후회할 짓 하지 마. “ 효성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중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효성의 엄마는 재혁을 단 한 번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재혁의 모든 면을 문제 삶았다. 처음엔 재혁의 가정환경이었고, 지금은 그의 학벌과 재력을 걸고넘어졌다. 효성은 심호흡을 한 뒤, 마지막 말을 내뱉고 전화를 끊었다. ”엄마처럼 살진 않을 거예요. “ 효성은 그대로 휴대폰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녀는 애써 울음을 참으며 얼굴을 베개에 묻었다.
다음날, 효성과 재혁의 여행 첫날이 밝았다. 효성은 부은 눈을 비비적거리며 짐을 마저 싸고 있었다. 재혁이 도착하기까지 20분 정도가 남았다. 그녀는 빠트린 물건이 없는지 주위를 꼼꼼히 살피며 준비를 서둘렀다. 똑. 똑. 똑. 누군가 효성의 방에 노크를 했다. 효성은 들고 있던 잠옷을 가방 안에 쑤셔 넣은 뒤,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무려 4명의 여자들이 서 있었다. “이제 가는 거야?” 민지가 물었다. “아직. 재혁이가 도착하지 않아서.” 효성이 답했다. “여행은 어디로 가는데?” 이번엔 지은이 물었다. “바다 보러 가기로 했어.” 효성이 또 답했다. “재혁 씨가 운전해서 가는 거야?” 윤서의 차례였다. “아니, 기차 타고 가려고. “ 효성이었다. “그럼 먹을 것도 챙겨야겠네. 간식말이야.” 신애였다. “응, 이따가 부엌에 내려가서 챙기려고. “ 효성이었다. “얼마나 있다가 오는 거야?” 다시 민지가 물었다. “일정은 2박 3일이야.” 효성은 지금 상황이 귀찮으면서도 웃겼다. 마치 질문할 순서를 정해온 듯한 하우스메이트들이 꽤 귀여워 보였다. “해산물…” “불꽃놀이…” 지은과 윤서가 동시에 말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았다. “지은이 차례야. “ 효성이 말했다. 지은은 윤서의 눈치를 보더니, 다시 말했다. “해산물도 많이 먹겠다! “ “난 그러고 싶은데, 재혁이가 해산물을 싫어해. 걘 매번 고기만 먹고 싶대.” “불꽃놀이는? 밤바다 보면서 불꽃놀이 해야지!” 윤서가 말했다. “야, 우리가 무슨 애야? 그런 걸 왜 해.” 효성의 반응은 매우 시큰둥했다. 실망한 얼굴을 한 윤서를 제외하고 모두가 웃었다. “숙소에 같이 있는 것만 해도 좋지 뭘. 잘 쉬다 와. “ 신애가 말했다. 효성은 그저 웃었다. “야, 너는 연애도 안 해봤으면서 왜 아는 척이야?” 윤서가 놀리듯이 신애에게 물었다. 이번엔 신애를 제외하고 모두가 피식거리며 웃었다. “꼭 연애를 해야 아니? 칫.” 신애가 발끈하며 답했다. 신애의 말을 시작으로 하우스메이트들은 서로 앞다투어 입을 열기 바빴다. “유치하게 둘이 뭐 하는 거야?” “아니, 그냥 장난이잖아.” “효성이 시간 뺏지 말고, 우리 인사하러 온 거잖아.” ”그러게 쓸데없는 질문들을 왜 해가지고. “ “너도 했잖아!” “난 중요한 질문을 했지. 불꽃놀이, 해산물, 간식이 뭐야 그게? “ “해산물이 어때서?” “기차에서는 간식 먹는 거 몰라? “ “불꽃놀이도 얼마나 재밌는데!” “그게 진짜 쓸데없는 거지.” “아니 정말….”
효성은 가만히 서서 네 사람의 푸닥거리를 지켜봤다. 효성의 머릿속에는 아직 짐가방에 넣지 못한 세면도구와, 화장품, 그리고 부엌에 숨겨놓은 과자들 뿐이었다. 그녀는 네 사람의 대화를 멈출 때를 기다렸다. 윤서가 중얼거리고 있는 지금이 바로 최적기였다. “야! 다들 시끄러워.” 효성의 말에 하우스메이트들은 전부 입을 닫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효성은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재혁이도 곧 올 시간이라, 이제 짐을 마저 싸야 해. 잘 다녀올게. “ 윤서, 민지, 신애, 그리고 지은은 약속이나 한 듯 효성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래그래! 잘 다녀와. “ “안전하게 조심히 갔다 와.” “재밌게 놀다 와!” “안전하고 재밌게 좋은 시간 보내고 와.” “야, 우리가 한 말이랑 똑같잖아! “ 그 모습을 보던 효성이 웃으며 말했다. “다들 잘 있어. “ 재혁은 정확히 20분 뒤에 셰어하우스 앞에 도착했다. 수줍음이 많은 그는 하우스메이트들과 짧은 인사를 나누고 다시 차에 탔다. 하우스메이트들이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은 차에서 내려 효성의 짐을 트렁크에 싣는 거였다. 효성은 창문을 내려 셰어하우스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윤서, 민지, 지은, 신애는 부러움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배웅했다. 재혁은 차를 곧장 출발시켰다. 기차역까지 여유 있게 도착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기차 안. 효성과 재혁은 짐칸에 가방들을 싣고 주전부리를 챙겨 자리에 앉았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이어폰 한 짝씩을 나눠 끼고 고개를 창가로 돌렸다. 흘러가는 풍경과 음악이 만나 영화의 한 장면을 만들어내는 듯했다. 재혁이 만들어 온 플레이리스트는 정신없는 아침을 보낸 효성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딱이었다. 효성은 편안했다. 그러다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획 돌려 재혁에게 말했다. “이거! 내가 좋아하는 노래인데, 기억했구나?” 그런데 효성이 고개를 갑자기 돌리는 바람에 재혁의 귀에 꽂힌 이어폰이 빠져버렸다. 재혁은 미소를 지으며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대었다. 효성은 순간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컸는지, 주변을 살폈다. 재혁은 목소리를 낮춰 효성에게 속삭였다. “맞아. 당연히 기억하지.”효성은 환하게 웃었다. 재혁은 주섬거리며 이어폰을 다시 집어 들어 귀에 꽂았다. 하지만 이번엔 재혁의 힘이 너무 센 나머지 효성의 이어폰이 빠지고 말았다. 효성은 다시 이어폰을 주워 귀에 꽂았지만 이내 그건 다시 빠지고 말았다. 재혁이 과자봉지를 향해 손을 뻗어버렸기 때문이다. 과자 봉지를 열다가, 과자를 먹다가, 자세를 고쳐 잡다가. 이어폰은 계속해서 빠지고 끼워졌다. 두 사람은 점점 행동을 조심하게 되었다. 상대의 눈치를 보며 옴짝달싹 못하던 그때, 재혁과 효성은 눈이 마주치자 그만 크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두 사람의 소리가 너무 컸던 나머지, 앞자리 승객이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효성과 재혁은 그의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재혁은 재빠르게 그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승객은 다시 앞으로 돌았다. 효성과 재혁은 다시 웃음을 참기 힘들어졌다. 두 사람은 서로를 꼬집고 입을 막으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막았다. 한참 뒤, 진정된 효성은 지긋이 재혁을 보며 말했다. “어제는 정말 우울했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시작이 아주 좋아.” “그래?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재혁의 물음에 답하려던 효성은 앞 승객이 고개를 돌리는 걸 눈치채곤 재혁에게 귓속말을 했다. “나중에 알려줄게.”
그 후로부터 1시간 정도 지나 효성과 재혁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둘은 기차역에서 내려 곧바로 숙소로 향해 체크인과 짐 풀기를 마치고, 저녁노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서둘러 식당가를 찾았다. 재혁이 짐을 옮기면 효성은 숙소로 가는 길을 검색하고, 효성이 외출준비를 하는 동안 재혁은 식당을 찾아냈다. 효성과 재혁은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다. “고기보단 해산물이 낫겠지?”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맥주 한잔은 해야겠지?”
바닷가를 향해 창이 나있는 식당. 효성과 재혁은 바(bar)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두 사람은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시켜놓은 상태였다. 수평선에 해가 닿을 듯 말 듯, 붉은 노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경치를 보며 한 마디씩 말했다. “좋다.” “그러게. “ 그리곤 말이 없었다. 순식간에 지나간 첫날의 일정으로 피곤했기 때문이다. 셰어하우스에서 출발한 지 꼬박 6시간 만이었다. 효성은 지친 다리를 주물렀다. 재혁도 뻐근해진 어깨를 이리저리 돌렸다. 잠시 후 주문한 음식과 술이 나왔다. 효성과 재혁은 맥주를 호록 호록 마시며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이거 맛있다. 좀 먹어봐. “ “너 새우 좋아하잖아. 여기.” “식당을 잘 찾은 것 같은데?” “그러게. 이번 여행은 실수 하나 없이 정말 순조로워.”
재혁의 말에 효성은 잠시 머뭇거리다 맥주를 크게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혹시 다른 사람 만나보고 싶은 생각 든 적 있어?” “나 말이야?” 재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응. 우리 둘은 처음부터 둘 뿐이었잖아.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면서 연애 경험도 없고. 아쉽지 않아? “ 효성이 말했다. “그렇다고 지금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는 없잖아?” 재혁은 효성의 질문이 점점 헷갈리기 시작했다. “아, 그렇지. 내 말은,” 효성은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어갔다. “넌 평생 여자라곤 나 한 명만 만나는 게 괜찮아?” 재혁은 효성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의외로 간단하게 답했다. “응.” “아, 그렇구나.” 효성이 작게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효성은 재혁의 확신에 찬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야 빨리 아빠가 되지.” 재혁의 마지막 말에 효성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뭐라고?” 효성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재혁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답했다. ”너도 알잖아. 난 빨리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고 싶어.” 재혁의 설명은 효성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효성은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빠졌다. 충동적이고 섣부른 판단을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잠시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그건 그저 순간이었다. 재혁을 만나고부터 지난 8년간 쌓아 올린 탑은, 그 한마디로 산산조각이 날 수 있는 거였다. 효성의 부모의 만류에도, 극복하기 힘든 재혁의 과거에도 끄떡없던 인연의 끈은 그렇게 아름다운 석양 앞에서 위기를 맞았다. 효성은 잔에 남은 맥주를 한입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바다를 보며 말했다. “우리 잠깐 헤어지자.” 효성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숙소를 향해 무작정 걸어가는 그녀의 뒤에서 재혁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한참을 걷고 나니 재혁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효성은 뒤를 돌아보았다. 뒤따라 오던 재혁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효성은 둘의 이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제는 정말 혼자서 돌아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