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걷기 시작한 효성은 그 길로 밤을 꼬박 새워 혼자 셰어하우스로 돌아왔다. 지친 기색의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침대에 드러눕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 왔어. 다들 집에 있어?” 효성은 두리번거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마치 거실에서 메아리치는 듯했다. 집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아무도 없어?” 효성은 다시 한번 크게 말했다. “효성이야?” 효성은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윤서가 눈을 비비며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왜 벌써 왔어? “ 윤서가 물었다. 효성은 말끝을 흐리며 답했다. “일이 좀…” 난감해하는 효성을 보던 윤서는 별다른 말 없이 그녀의 짐가방을 들고 방으로 옮겨주었다. “그럼 쉬어.” 윤서는 효성에게 외마디를 남기고 자신의 방으로 갔다. 혼자 남은 효성은 창문을 활짝 열고 몸을 최대한 바깥으로 기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누군가 툭 건드리면 터질 듯이 나올 것만 같은 감정들을 꾹꾹 누르며 담배를 빨아들였다. 후우-
똑. 똑. 똑. 효성은 노크소리에 서둘러 담배를 창틀에 비벼 불을 껐다. 그녀는 손을 휘저으며 남은 연기를 밖으로 내보냈다. “들어와.” 효성의 말에 윤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효성이 물었다. 윤서는 쭈뼛거리더니 방문을 닫고 효성에게 말했다. “아니, 뭐. 너 괜찮나 해서.” “내가 왜?” 효성은 당황한 듯 물었다. “집에 왔을 때부터 표정이 좋지 않은 것 같아서. “ 윤서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효성을 유심히 살폈다. “괜찮아.” 효성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그랬구나. 미안, 그럼 갈게.” 윤서는 다행이라는 듯이 말하며 웃었다. 그녀는 뒤돌아 방을 나가려던 참이었다. “아니, 사실… 일이 좀 있었어.” 효성이 윤서의 뒤통수를 향해 말했다. “그럼 말해볼래? 털어놓으면 기분이 나아질 수 있잖아.” 그녀의 말을 들은 윤서가 다시 효성에게 다가갔다. 윤서는 이번엔 자신이 효성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다. 윤서는 다소 경직된 자세로 효성의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최대한 편안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잠옷이 아닌 옷차림으로 남의 침구를 더럽히는 게 찜찜했기 때문이다. “편하게 앉아.” 효성이 말했다. “아주 편해.” 윤서의 답은 꽤나 어색했지만 효성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재혁이에게 잠시 헤어지자고 말했어. “ “여행 중에 싸우기라도 한 거야?” 윤서가 물었다. “아니, 싸운 건 없었어. 오히려 서로 너무 잘 맞아서 좋았는걸.” 윤서는 잠자코 효성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너는 운명을 믿어? “ 효성이 물었다. ”응. “ 윤서가 답했다. 그녀의 말에 안심이 된 효성은 계속해서 말했다. “재혁이와 나는 운명처럼 만났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는데, 어쩌면 모든 게 잘못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 효성은 고개를 돌려 윤서를 보며 물었다. ”재혁이 내 운명의 상대가 맞긴 한 걸까? “
효성의 말을 듣던 윤서가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운명은 네 선택이기도 해. 네가 하는 선택에 따라 일어날 일들과 넘어갈 일들이 바뀐다는 뜻이야. 이 사람이 내가 원하는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결정은, 운명임을 알아내는 게 아니라는 거지.” “만약 잘못된 선택으로 불행해진다면?” 효성이 물었다. 윤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애초에 직감적으로 불행할 선택을 하지 않겠지? 아마 너도 느꼈을 거야. 아무렴 길치인 사람도 어느 순간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걸 알아차리거든. 우린 앞으로 그런 직감적인 변별력을 키워가야 해. 선택의 기로에 놓인 순간들을 더 많이 볼 테니까.” “자그마치 8년이야.” 효성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윤서의 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지만 결심이 서지 않았다. “내 섣부른 판단으로 그 긴 시간을 부정해 버린 것만 같아.” 효성의 말을 들은 윤서는 그녀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윤서는 효성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시간을 두고 잘 생각해 봐. 재혁 씨도 네 말 한마디로 8년을 저버리진 않을 거야. ” 효성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냥 미래의 내 모습을 보고 올 수 있으면 좋겠어. 내가 재혁이와 과연 행복하게 지내는지, 차라리 답을 알 수 있었으면 좋겠어.” “어쩌면 그랬을지도 몰라.” 윤서가 말했다. “뭐가?” 효성이 물었다. 그녀는 윤서의 말이 뜬금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윤서는 굴하지 않고 말했다. “미래의 네가 잠시 너에게 와서 무언가 말해주고 갔을지도 모르지. 그 사람이,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인연이 아닐 수 있다고 말이야.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효성이 툴툴대며 중얼거렸다. “그렇게라도 생각해 보라는 거지.” 윤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난 그래서 우리가 희망을 갖는다고 생각해. 지금은 힘들어도, 나중엔 괜찮아진다고. “ 윤서는 효성과 대화를 마치고 방에서 나왔다. 효성은 창문에 기대어 다시 담배를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