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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중현 Jul 12. 2021

율리시스(Ulysses)

그리스신화 속영웅이 아닌 조직의 뿌리를 찾을 수 있는 끄나풀

"형사님 다음 주에 미국에서 거액의 돈이 들어올 예정인데 통장에 돈이 입금되면 곧바로 인출해 해외로 도주할 것 같습니다."

존 도의 제보는 사실이겠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제보자의 진술을 형사의 입장에서 재해석을 해야만 한다.

다음 주에 미국에서 한국으로 해외 송금이 된다면 지금 진행하고 있는 사건과 같은 유형의 범죄인가?

(전혀 다른 성격의 범죄라면 새로운 사건을 접수하고 시작하는데 내부 보고 절차가 너무 길어지게 된다.)

같은 유형의 범죄라면 이미 오래전부터 해킹 공격을 시도했을 건데 피해를 당한 곳은 어디인가?

(서류로 입증하고 서류로 설명해야 하는데 피해자의 진술과 입증자료가 없으면 사실상 수사가 불가능하다.)

제일 중요한 국내 어디 은행 누구의 통장으로 들어온다는 말인가?

(압수수색 검증영장과 체포영장을 받으려면 제일 중요한 정보다.)


사건이란 게 증거 없이 진술만으로 금방 시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구로부터 제보를 받았고 그 사람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를 설명해야 하고 제일 중요한 관련 자료와 입증 서류가 없으면 사건의 공정성에 의심을 받을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건 사건을 재구성하고 다음 단계로 올라가야 할 내용과 단서들이다. 

미국에서 국내로 송금될 자금이 현재 진행 중인 사건과 동일 유형이라는 가정하에,

미국의 어느 회사인지 모르겠지만 이미 그 회사의 이메일은 해킹되면서 기업 비밀이 유출되었다면 해킹 조직원들은 회사의 전반적인 권한을 장악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국내에서 돈이 송금되면 반드시 인출을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일 것이다.


늦은 저녁 사무실에 남아 이번 사건의 로드맵을 그려 봤다.

사건의 뿌리를 확인하기 위해서 적어도 나에게 어떤 증거와 단서들이 필요한 건지 정리라도 해야만 했다.

증거와 단서들을 확보한다고 하더라도 검증하고 확인하기 위해서는 결국 사람부터 찾아야 하고 넘어야 할 과정들이 많았지만 퍼즐 조각을 조합할 단서들을 정리하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순서를 정했다.

 

혼자서 만들었던 사건의 로드맵 출처:박중현


"Sir(선생님)! 00 지점에서 돈을 인출해 해외로 출국하려고 합니다. 저도 목숨 걸고  알려 드리는 거라 더 이상 자세한 확인은 어렵습니다. 나머지는 형사님이 확인해 보셔야 합니다!"

다른 사건 참고인들을 조사하고 있는데 존 도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이때부터 매일 존 도의 전화를 기다렸던 것 같다.

예상보다 일주일 가량 늦어졌지만 범행에 성공하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급히 조사를 마무리하고 제보자 진술만 믿고 은행으로 달려갔다. 공문도 법원으로부터 받은 서류는 없었지만 사실 여부부터 확인해야 했다.


"미국에서 여기 지점에 개설한 계좌로 거액의 돈이 송금되었을 겁니다. 자세한 내용과 정보는 법원으로부터 영장을 받아 올 테니깐 사실 여부만 급하게 확인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외환업무 담당자의 협조를 받아 일주일 내 미국에서 송금된 거래 내역이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네, 미국에서 송금된 내역이 있습니다. 그런데 송금된 당일날 명의자가 전액 인출했습니다."

전액 인출해 버렸으면 범행에 성공했다는 말인데 곧 도주를 준비하거나 아니면 벌써 도주에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사무실로 복귀하자마자 급하게 압수수색영장을 신청해 다시 은행을 찾았다.

미국 어디서 송금되었는지 자세한 거래내역과 인출 당시 은행을 방문한 CCTV 영상을 확보해 분석에 들어갔다.

송금자는 미국 뉴욕에 있는 패션 의류 업체였다. 이 의류 업체는 한국과 무역 거래를 한다든지 분명 인과관계가 있어야 하겠지만 이미 해커 조직원들의 공격에 속아서 피해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송금 후 은행을 방문한 자는 예상대로 나이지리아 국적의 외국인이었다.


'율리시스(Ulysses)'


그의 이름은 율리시스였다.

율리시스(Ulysse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 오디세우스(Odusseús)의 라틴어 이름이다. 은행을 방문해 외환업무 담당자에게 서류 뭉치를 건네는 율리시스는 전혀 당황하거나 망설임이 없었다.

서류를 건네받은 외환 업무 담당자는 10여 분간 서류를 확인하는 듯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5분 뒤 은행 창고에서 꺼내온 달러 뭉치들을 율리시스에게 건네주었고 큰 가방에 담은 뒤 창구를 떠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외환업무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CCTV를 보면 서류를 받고 나서 달러로 인출해 주던데 총얼마인가요?"

"10만 달러를 인출해 달라고 했는데 그날 저희 은행 외환 잔고가 5천만 불 밖에 없어서 5천만 불만 달러로 인출해 나갔습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렇게 엄청난 돈을 어떻게 10여 분 만에 가져 나갈 수 있는지 미칠 것만 같았다.


"형사님! 조금 전에 미국 뉴욕 패션회사에서 급하게 저희 은행 쪽에 송금한 돈이 사기 피해를 당한 거라며 동결해 달라는  요청이 접수되었습니다."

마음은 급한데 동시 다발적으로 사건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미국 의류 회사도 피해 사실을 인지한 모양이지만 이미 돈은 빠져나가 버려 은행에서도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는 듯했다.

송금된 금액의 나머지 잔액은 서울 종로에 있는 본점을 찾아가 달러로 인출한 사실도 확인되었다. 해킹 조직원들은 송금되기 전부터 서류와 인출까지 업무 분담이 철저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단독 범행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그리고 예상대로 돈을 인출하고 은행을 나서는 CCTV 영상에는 대기하고 있던 공범들이 합류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최종적으로 범행에 성공한 율리시스는 다음날 해외로 출국했다. 고국으로 돌아가기 전 경유지인 두바이에 들러 넷플릭스로 재미있는 영화를 봤는지 넷플릭스 결제 내역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 돈이면 고국으로 돌아가 왕국을 건설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피해를 당한 미국 뉴욕 패션회사는 심각한 자금난에 시달릴 것이다.

이들의 움직이는 속도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들은 국내의 느려 터진 시스템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듯 나를 비웃는 것 같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사실 처음 제보자의 진술을 믿지 않았었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펼쳐지니 제보자의 안전이 걱정되었다.

거짓 같은 제보를 믿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사건은 터져 버렸고 실제 사건이 발생해 뒤를 쫓아 가 보니 결국 사실이었다. (송강호의 살인의 추억에서 과학수사만 고집하던 김상경이 송강호의 촉에 놀라던 채석장 장면이 연출되는 것 같았다.)



사실 제보자의 진술을 믿지 않았지만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사실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출처:구글 이미지 검색(영화 살인의 추억 채석장 장면)



사실인란걸 알고 나서 이들의 네트워킹은 어디까지 퍼져 있는지 두려움도 생겼다. 출처: 구글 이미지 검색(영화 살인의 추억 채석장 장면)


제보자의 존재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 건 사실이지만 BlackHat(블랙해커)과 WhiteHat(화이트 해커)은 모자만 바꿔 쓰면 되기에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출처: 구글 이미지 검색(영화 살인의 추억 채석장 장면)



다시 존 도를 만났다. 

이제부터는 제보자와 통역인 제니퍼 그리고 나만 아는 장소를 정해 비밀리에 접선했다. 그리고 만날 때마다 전달받은 자료와 서류는 모두 수사보고서로 만들어 사건 기록으로 만들었다. 초라하지만 한국을 거점으로 일어나는 타깃형 공격범죄에 대응할 수 있는 연합군은 나 통역인 제니퍼 그리고 존 도 밖에 없었다.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 조직의 뿌리를 찾아야만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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