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 만화의 파란 하늘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 싱그러운 바람과 푸르른 녹음이 멋 드러 진 6월의 스톡홀름은 말 그대로 아름답다. 스웨덴 사람들이 이 계절에 한껏 들뜨는 이유를 알것도 같다.
며칠 전 스톡홀름에서 30km 정도 떨어진 박스홀름(Vaxholm) 주변의 조용한 해변가에 피크닉을 갔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고즈넉한 해변가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저녁을 먹고 올 심산이었다. 사발면, 김치, 유부초밥, 과일 등을 챙겨 도착한 해변가에는 인적이 전혀 없었다. 짙푸른 비단 장막을 펼쳐 놓은 듯한 여유로운 바닷가, 그리고 그 물결을 벗해 우아한 백조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유유자적 떠 다니고 있었다.
<6월. 박스홀름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로 셀프 방콕 생활에 지친 우리 가족에게 오랜만에 찾아온 이 평화로움이 참 감사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곧이어 벤치에 앉아 도시락을 열고 사발면에 물을 부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런 맛이 있어서 외국 생활을 하는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인기척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이 해변가 근처에 사는 스웨덴 현지인 들인 듯, 편한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기르던 강아지를 데리고 왔는데, 사발면을 먹는 우리들을 보고 놀란 듯한 표정이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그때, 그 순간이 참 묘했다.
어색함, 뻘쭘함, 해변가와 어울리지 않는 사발면, 그리고 우리들…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들이지만…
‘이런 외진 곳까지 외국인들이 오네!’라는 표현이 적절할 듯하다. 그들이 키우는 강아지가 우리의 사발면 냄새가 자극적인지 자꾸 우리 쪽으로 가려는 걸 여러 차례 막다가 강아지를 데리고 돌아가는 모습에 미안함마저 느껴졌다.
관광지가 아닌 곳, 현지인들이 주로 사는 외진 곳을 방문할 때마다 느껴지는 <영원한 이민자>라는 신분이 새삼스럽게 느껴졌고, 불현듯 그 아름다웠던 해변가가 불편함으로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2005년에 한국을 떠나 왔으니 1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익숙해질 만도 한데 그렇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이 불편함을 평생이고 살아가는 게 이민자의 삶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우연히 읽게 된 <이민생활의 적응 과정>이라는 웨스턴 일리노이 대학의 연구결과가 흥미롭다.
이민생활 적응과정
1단계 흥분기
(이민 첫해: 도전정신, 새로움, 흥분기)
2단계 좌절기
(이민 2년 후: 언어문제, 경제문제, 생활 장벽, 문화적 충격, 역이민이 가장 많은 시기)
3단계 해결기
(이민 3년~10년: 경제적 여유와 안정기, 사회적 대가의 공정성을 느끼는 시기, 만족감)
4단계 자아의식의 혼란기
(이민생활 12~13 이후: 인종차별, 진급문제, 불편함, 깊이 있는 인간적 관계의 부재,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 소외감, 외로움)
박스홀름의 외진 해변가에서 느꼈던 나의 그 주관적인 감정들은 아마도 이 연구결과에 의하면 4단계 정도에 속할 듯하다. 영원한 셋방살이를 하는 듯한 이 느낌에 빠져 들면 안 되는데 가끔씩 찾아드는 이 어색한 소외감이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프랑스에 주재원으로 오게 된 언니네와 함께 레스토랑에 다녀왔던 기억도 떠오른다. 오랜만에 언니 가족을 찾은 우리들에게 형부가 프랑스식 저녁식사를 경험해야 한다며 밥을 사 준 적이 있었는 데, 식사 중에 조카가 한 이야기가 잊혀지지 않는다. 애피타이저부터 주요리, 치즈, 디저트에 이르는 four-course 식사를 하던 중에 가까이 앉은 어린 조카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야기하였다.
“이모, 배 고파요!”
모두들 웃음이 터졌는 데, 어쩐지 그 후로도 내 마음 한 켠에는 조카의 <배고프다>는 말이 오래도록 남아 있게 되었다. 배고프다…
아무리 진수성찬이어도낯선 남의 나라 음식보다는 김치찌개에 계란 프라이가 우리들의 배고픔을 채우는 데는 더 적절한지도 모르겠다.
현지 취업, 주재원, 국제결혼, 유학, 사업, 난민 등으로 온 전세계 많은 이민자들이 느끼는 공통된 감정이 아닐까 한다.
상황과 처지에 따라 달라지는 어려움들과 넘어야 할 장벽들은 언어와 문화, 교육, 경제적인 문제를 넘어 외로움, 소외감, 정체성의 혼란과 같은 다양한 난제들로 확대되며 파도처럼 밀려 들어온다. 시간이 갈수록 이민자들의 생활 반경은 교민 사회로 축소되고 그 제한된 인간관계는 관계에 대한 끈끈함으로 재탄생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좁은 인간관계와 사소한 문제들에 연연케 하는 사고의 제한성을 부를 때도 있다.
행복을 찾아 떠나 온 곳에서 내 나라가 아니라 느끼는 외로움과 소외감, 헛헛함은 아이러니이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세상사의 이치이기도하다. 하나를 얻으면, 또 하나를 내어 주어야 하는...
채워지는 만족감 만을 찾으려 든다면 바로 내 옆에 <불행>이라는 친구가 따라 붙게 된다. 때로는 <그러려니>라고 인정하는 여유로움과 관대함이 힘든 이민생활을 버텨내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또 하나 사람!
문제도 사람에게서 오지만 그 해결도 사람에게서 온다. 나와 공감하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 내 친구, 내 가족이 헛헛한 이민생활에 채움과 활력을 준다. 아픔과 위로를 함께 나눌 수 있어 소중한 사람들이다.
이민생활의 끝이 어디가 되고, 또 무엇이 될지는 모르지만, 수많은 시간 동안 함께 했던 지인들, 친구들 그리고 나의 가족이 참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