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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확위 May 27. 2024

너무 커서 정신을 못 차린 프랑스의 와인 박람회

연구실 옆 자리의 루마니아 친구는 이런저런 이벤트, 행사들을 잘 안다. 누군가에게서 전해 듣는다고 했다. 이 친구가 어느 날 오피스에 찾아오더니, 우리 오피스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프랑스인 2명) 이번 주 주말쯤에 와인박람회가 있다고 했다.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티켓 링크가 있으니 관심 있으면 보내준다고 했다. 프랑스 애들은 그냥 별 다른 반응이 없었다. "아 그래?" 그냥 이 정도의 반응이었다. 와인의 나라가 아닌 소주의 나라에서 온 나는 프랑스의 와인 박람회라니 이미 두근거렸다. 바로 그 친구에게 난 관심 있다고 말했다. 이 친구가 연구실 사람들 여럿에게 말하고 다닌 걸 알고 있어서 가는 사람이 제법 좀 있는 줄 알았는데, 이 친구와 나 둘 뿐이더라.


와인 박람회는 일요일 오후에 행사장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일요일에 한껏 쉬다 보니, 어느덧 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는데 괜스레 피곤하니 누워있고 싶은 기분이었다. 만약 약속을 하지 않았다면, 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약속을 했고, 나 외엔 그 친구 한 명뿐이니 미안해서라도 꼭 가야 할 것 같았다.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뭔가 따로 챙겨야 하나 싶었다. 와인을 좀 사고 싶기도 하지만 이제 한국에 갈 날이 40일 정도 남은 상황에서 뭔가를 많이 살 생각은 없었다. 그렇기에 지갑과 생수만 한 병 챙기고 (와인 시음하면서 물도 마시려고) 집을 나섰다.


한 시간 정도 트램을 타고 행사장 근처에 도착했다. 힝 사장 바로 입구에서 만나기로 해서 입구를 찾아가는데, 사람들이 와인 박스를 끌며 나오는 방향으로 계속 가니 입구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사는 양이 어마어마했다. 노부부가 박스로 네 박스를 수레에 끌고 가고, 어떤 사람들은 업장에 가져가는 건지 정말 어마어마한 양을 가지고 갔다. 가장 흔하게 보이는 게 두 박스였다. 역시 와인의 나라인가 보다. 이 사람들을 보니, 내가 너무 준비 없이 왔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매년 하는 행사이니 작년에 알았다면 나도 와인을 잔뜩 샀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프랑스에서 떠날 때가 되니, 하지 못한 것들이 하나하나 아쉬움으로 남는다. 남은 시간만큼 최대한 해봐야지 싶지만, 있었던 기간에 비해 남은 시간이 너무 짧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역시나 기다려야 했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약속 정각에 도착한다. 일찍 오는 사람들은 10% 정도나 되는 듯하다. 어떻게 그렇게 시간을 딱 맞추나 신기하기도 하다. 어쩌면, 교통이 크게 막히지 않는 작은 중소도시기에 가능한가 싶기도 하다. 서울에서라면 이렇게 시간을 딱 맞추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친구가 도착하고 인사를 나눈다. 내가 먼저 말한다. 난 와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너는 와인을 좀 잘 아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친구도 와인은 잘 모른다고 했다. 그래도 이 친구는 작년에도 이곳에 왔었다기에 나보다는 능숙하니 잘 알겠구나 하는 기대감이 조금 생겼다.

행사장 입구에 들어가서, 준비한 티켓을 보여주니, 작은 글라스 와인잔을 하나씩 준다. 와인잔을 받아 들고 행사장에 들어간다. 들어가는 순간 나는 정말 눈이 번쩍 뜨였다. 정말 크더라. 농구장 네 개는 붙여놓은 것 같은 크기의 공간에 전부 와인부스들이 있었다. 와인 부스가 너무 많아서 그것들을 보면서, 여기서 내가 뭘 알고 마실 수나 있을까 싶었다. 시음을 다하다가는 급성알코올중독으로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 놀라운 건 여기는 프랑스 와인만 전시한 곳이었다. 전 세계 와인을 생각하니... 와인이 정말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은 넓은 세상이구나라고 다시금 깨달았다. 함께 온 친구가 작년에 마셨는데, 너무 맛있었던 와인이 있다고 했다. 작년부터 들었던 얘기라, 이 친구에게 일 년 정도 생각났으면 이번에는 사라고 말을 했다. 그런데 노르망디 와인이라는 거다. 노르망디? 노르망디에 와인이 있다는 건 들어본 적도 없었는데, 한 바퀴 천천히 거닐다 보니 내가 모르는 와인 산지가 아는 곳 보다 많더라. 낯선 지역들이 어마어마하게 있었다. 한 바퀴를 쭉 돌면서도 우리 둘은 뭘 시음할지조차 감을 못 잡았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결단력이 필요했다. 와인을 잘 아는 친구에게 왓츠앱으로 메시지를 보낸다. 와인 박람회에 T와 함께 왔는데, 얘랑 나랑 둘 다 아무것도 모른다. 뭘 시음하는 게 좋은지 추천해 달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결혼식에 참석하느라 다른 나라에 가 있던 그 친구는 다행히 시차가 크지 않아 바로 답장이 왔다. 그 친구의 조언을 바탕으로, T와 나는 본격적으로 와인들을 시음해 보기 시작했다.

와인을 시음해 보면서, 내가 맘에 드는 게 어떤 타입의 와인인지 조금씩 느낌이 오기는 했다. T는 스위트한 와인을 좋아하는 반면, 나는 스위트한 와인은 내 취향이 전혀 아니었다. 게다가 T는 바디감이 너무 있는 걸 싫어했지만, 난 바디감이 없는 와인이 속이 빈 듯한 느낌의 허전함에 영 별로였다. 우리는 정말 취향이 달랐다. 아마 열 명의 사람이 모이면 열 명의 와인 취향이 있을 것도 같았다. 친구가 추천해 준 종류들로 와인을 시음하다 보니, 맘에 드는 것이 조금 있었다. 며칠 후, 손님 초대도 있고 해서 와인 두 병을 샀다.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이제 T가 그토록 찾아다닌 노르망디 와인을 찾아야 했다. 300개가 넘는 부스를 살펴봤지만 노르망디 지역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구석에 딱 한 곳에 노르망디가 있었다. 그가 좋아했단 와인은, (아직도 이게 와인인지 모르겠지만) 노란빛의 술이었다. 마시는 순간, 나는 너무 달아서 "윽"하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그래도 그 친구가 좋아하는 것이니 이번엔 꼭 사라며 조언했다. (일 년 내내, 작년 와인 박람회에서 자기가 진짜 맘에 드는 술이 있었는데, 가격이 조금 있어서 사지 않았다.-라는 소리를 계속 들었다.)

와인 박람회에서는 역시나 프랑스 답게, 사람들이 부스 앞에서 점원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했다. 뭘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지 모르겠다. 나는 불어를 못하고, T는 불어를 좀 하지만 완전히 능숙하지는 않아서- 영어를 한다고 써붙여진 곳이 아니면 우리는 좀 어려움이 있었다. 무스마다 앞에 바케스가 하나씩 있었다. 와인잔을 하나씩 들고 다니기 때문에, 그전 와인이 남았거나 맛보고 버릴 때 그곳에 버리는 거였다. 잔을 헹구기 위한 생수들도 제공해주고 있었다. 잘 살펴보니, 정말 입안에서 맛만 보고 뱉는 사람들도 많았다. 난 아깝다며 다 마셨는데... 코냑 지역들도 많아서 인상적이었다. 코냑들은 다들 병도 술 색도 영롱하니 예쁜 느낌이었다. 맘껏 시음하고 싶지만... 취할까 겁이 나서 몇 곳만 시음해 보았다. 떠날 날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 조금만 더 있다면 맘껏 샀을 텐데...

두 번이나 박람회장을 돌고 시음도 하고, 와인도 두어 병 샀는데 한쪽 푸드코너에서 굴을 파는 걸 보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T에게 굴을 좋아하냐고 물어보니 먹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내가 살 테니 같이 먹어달라고 말하고, 굴을 한 접시 시키고 화이트와인도 하나 시켰다. 나는 너무 좋은데, 굴을 처음 먹는 T는 바다맛이라고 표현했다. 굴을 처음 먹는 사람들의 표현은 전 세계 어디나 비슷한가 보다. 굴까지 먹고 나니, 충분히 경험한 기분이 들고 만족감이 들었다. 일요일이기에 너무 늦지 않게 집에 돌아가 휴식을 취하며 다음 주를 준비해야 했기에 아쉽지만 박람회장을 나섰다. T와 내일 보자고 인사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와인의 나라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간 와인 박람회였다. 한국에서 이런 곳에 가본 적이 없기에 한국은 어떤지 모르겠다. 다만 한국에서 와인 박람회를 한다면 프랑스 와인만 있진 않겠지? 한국에 돌아가면, 한국의 와인 박람회를 한 번 참석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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