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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확위 May 28. 2024

프랑스에서 사물놀이 공연을 하다

 어린 시절의 나와 사물놀이

나와 사물놀이의 첫 만남이라면 이유는 모르겠지만, 집에 사물놀이 악기들이 다 있었다. 아버지께서 사다 두셔서 장구, 징, 꽹과리, 북이 모두 있었고, 심지어 장구도 세 개정도는 있었다. 우리 가족이 딱히 사물놀이를 하는 건 아니었다. 아버지는 원래 악기에 대한 욕심이 조금 많으신 분이셔서 그런 것 같다. 딱 일주일 불어 보는 오빠를 위해 플루트를 사주셨었고, 나는 일주일, 언니는 한 달 배울 바이올린을 사주셨었고,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어릴 떠난 피아노를 조금 쳤지 중, 고등학교를 올라가며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집에서 그랜드 피아노가 공간만 차지하며 존재하고 있었다. 한쪽에는 아무도 치지 않는 드럼도 함께 말이다.  그렇게 사물놀이의 악기는 항상 내 옆에 있기는 했다. 내가 직접 친 것은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배운 것 약간이 전부이지만 말이다.


프랑스에서 다시 시작한 사물놀이

그렇게 사물놀이는 그저 어릴 적 추억으로만 가진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랑스에서 내가 사물놀이를 다시 시작하게 될 줄이야. 누가 상상했겠는가. 프랑스에서 지낸 지 일 년 후쯤, 스트라스부르 한글학교에서 토요일 아침 봉사를 하면서 학교의 일원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두 번인가? 세 번쯤 학교에 갔던 날, 세명의 선생님이 나에게 "혹시 악기 잘 다루세요?"라고 하는 거다. 나는 취미로 베이스기타를 치고 있다고 말하자. 그분들이 관심을 보이면서 "선생님, 혹시 사물놀이 할 생각 있으세요?"라고 하더라. 사실 사물놀이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잠깐 들으면 '음~신명 나는 군~' 싶지만, 조금만 계속 들어도 나는 쉽게 질리더라. (개인의 취향일 뿐이다.) 그래도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기 좋을 기회일 것 같아서, 해보겠다고 했다. 내가 맡을 악기는 바로 징이었다. 그전에 징을 치던 선생님이 학교를 그만두면서 징 연주자 자리가 비게 되었고, 마침 그 선생님 대신 온 내가 있으니 나에게 징을 맡아달라 부탁하는 거였다.


그렇게 징을 두세 번 내리치니 선생님들이 좋다고 그러더라. 대체 뭐가 좋은 건지 알 수 없었지만, 한번 5분 정도 쳐보고는 나보고 됐다고. 우리 이제 공연하면 된다 그래서 나는 혼란스러웠다. 바로 2주 뒤에 한글학교의 설날 행사에서 사물놀이 공연을 한다는 거였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알게 된 공연과 징을 집으로 가져가서 연습하기엔 너무 무겁기도 해서, 나는 악보를 챙기고 다른 악기들이 연주하는 것을 녹음한 후 그걸 집에서 들으면서 허공에 손으로 징을 치는 연습을 하며 익혔다. 그런 후, 한글학교 수업이 있는 그다음 주 토요일에 다시 한번 맞춰보고, 바로 그다음 주 공연을 했다. 공연에서는 물론 실수는 많았지만- 사물놀이를 잘 모르는 외국인들 앞이기에 크게 티 나지 않게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때까지는 이게 마지막인 줄 알았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다시 시작한 사물놀이

함께 사물놀이하던 선생님들이 누군가는 한국으로 떠나고, 몇몇은 학교를 떠났다. 기존에 한 분의 선생님이 가르친 몇몇 사람들이 더 있다는 건 알았지만, 사물놀이에 대해 경험이 제법 많은 이들이 모두 떠났으니 앞으로 공연 같은 건 못하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지난겨울쯤, 나에게 다시 사물놀이 하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떠난 선생님이 가르쳤던 사람들이 모여 사물놀이를 다시 시작한다고 했다. 스트라스부르에 한인 문화 협회 같은 것을 만들 거라면서 거기 소속으로 할 생각이라고 했다. (문화협회는 지금까지도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나는 이번에도 징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한글학교 선생님들이 아니라 스트라스부르에 사는 한국인 분들이 멤버였다. 한 분은 한글학교에서 방과 후 한자수업을 알려주시고, 다른 분은 종이접기를 가르치시고, 다른 한 분은 오페라 가수라고 했다. (나중에 노래하시는 걸 봤는데 엄청난 실력자셨다.) 꽹과리, 장구, 북에 맞춰 처음으로 합주를 시도해 보는 날, 나는 깜짝 놀랐다. 너무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한주, 두 주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소리를 점점 맞춰나갈 수 있었다.  몇 주뒤 한글학교의 설날 행사에서 우리는 첫 공연을 가졌다.

새로운 멤버, 그리고 돈 받고 원정 공연!

공연 제의가 왔다고 했다. 스트라스부르 근처 도시 Brumath라는 도시에서 한국의 날 행사를 하는데 사물놀이 공연을 하고 싶다고 했다. 설날 행사 이후, 몇 주의 기간이 있었고. 설날 행사에서의 실수를 모두 만회하고 완벽한 공연을 하자고 다짐했다. 다만, 멤버가 교체되었다. 기존의 장구이던 오페라 가수분이 투어 공연과 리허설로 연습에 참여할 수 없어서, 내가 장구를 맡게 되고, 징에 프랑스인이 들어왔다. 그런 후, 한글학교 선생님 한 분이 장구로 또 추가되어 꽹과리, 장구 2, 북 1, 징 1로 멤버가 갖춰줬다. 주말마다 연습을 하며 맞춰갔다. 점점 소리가 좋아지는 게 들렸다. 물론 아마추어인 우리가 완벽할 순 없다. 하지만 적어도 실수 없이 연습한 대로 하자는 마음으로 우리는 꾸준히 했고 행사 당일이 되었다.

토요일 오후에 기차를 타고 행사가 있는 근교 Brumath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아주 작은 마을 같은 도시였다. 행사장은 규모가 작았지만 그런대로 한국에 관해 한복, 그림, 책 등을 갖춰두고 한국을 소개하고 있었다. 사물놀이 이후에는 한국 음식이 뷔페형식으로 제공된다고 했다. 우리는 행사 직전까지 주최 측에서 준비해 준 공간에서 마지막 리허설을 했다. 옷을 갈아입고, 시간에 맞춰 행사장에 들어섰다. Brumath의 시장이 와서 축사를 하고 있었다. 불어라서 무슨 말인지 몰라 사람들이 손뼉 칠 때 같이 쳤다.

공연하는 곳에 준비된 좌석에 사람이 모두 차고 일부 사람들이 주변에 서서 보기 시작했다. 공연을 시작한다. 중간에 두두 두둥! 하고 딱 멈췄다가 다시 시작하는 파트가 있는데, 사물놀이가 낯선 이들은 이게 끝인 줄 알고 박수를 치더라. 공연을 모두 마친 후에는 지금이 끝난 건가? 박수 칠 타임인지 헷갈려서인지 박자가 한 박자 늦게 터져 나왔다. 재밌는 경험이었다. 지금까지 연습했던 것 중 본 공연에서 가장 신명 나게 잘 되었다. '


나는 이번이 마지막이기에 아쉬움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6월에 일본문화행사로 매년 스트라스부르 가장 큰 공연장에서 있는 행사의 큰 무대에서 공연을 하기로 했기에 더 열심히 연습을 해나갈 것이다. 개인적으로 로 사물놀이는 듣기만 하는 것보단 직접 참여할 때 음악을 더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내가 한국인이라서 그런 건지, 마음이 간질간질 가슴이 뛰게 하는 울림이 있다. 대학교 때 시험기간에도 연습하고 있는 풍물패들이 시끄럽다 생각하곤 했는데, 그들이 왜 그렇게 열정적이었는지 이제는 조금 이해할 것 같다. 사물놀이의 악기들을 두드리면 한국의 흥이 느껴지고 마음이 뜨거워지더라.


한국에 돌아가서는 사물놀이를 할 기회는 없을 것 같지만, 프랑스에서의 사물놀이는 아마 꽤나 오랫동안 기억할 좋은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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