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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확위 Jun 04. 2024

프랑스를 떠나기 전 나의 그림들을 떠나보내다

프랑스에서 지내면서 그림을 제법 많이 그렸다. 예전과는 다른 스타일의 그림을 시도했고, 최근에는 20cm X 20 cm 사이즈의 캔버스에 아크릴로 내 나름의 작품들을 그리기 시작했었다. 손이 제법 빠른 편이라 30분이면 작품 하나가 완성되곤 했다. 일찍 일어난 이른 아침 그림을 그리거나 퇴근 후 저녁을 먹고는 휴식 겸 그리곤 했다.

나는 창의력이 풍부한 사람이 아니기에 온전히 새로운 것을 창작해 내는 것은 못한다. 언제나 reference가 필요했다. 보통은 pexels.com이라는 저작권프리 사진 사이트에서 맘에 드는 사진을 선택하고는 그걸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렇게 그려나간 작품들이 20여 개가 넘었고 종종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눠주곤 했지만 여전히 방 한편에 그림들이 쌓여있었다. 모두 연습 삼아 그렸던 그림들이었기에 사실 크게 대단할 건 없고 다시 그리라면 다시 그릴 그림이었다. 아쉬울 게 없을 그림이라지만 그래도 내 작품이라고 나름의 애착은 지니고 있었다.


프랑스를 떠날 날이 한 달이 채 남지 않았는데 이 그림들을 챙겨갈 공간의 여유가 없었다. 떠나는 날까지 새 주인들을 찾아주지 못한다면 모두 건물 지하의 쓰레기통에 버리고 갈 생각이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기에, 주변인들에게 그림을 보여주며 원하는 이가 있는지 찾아다녔다. 사람들에게 그림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알린 결과 열명 정도의 지인들이 관심을 보였다. 적게는 1개에서 많게는 6개까지 사람들에게 넘기면서 그림을 어느 정도 처분할 수 있었다. 모두 한국으로 가져가면 좋기는 할 것이다. 다만 그럴 여력이 안 되는 거고, 나에겐 그림을 그리던 순간의 즐거움이 남아있고, 그렸다는 기록을 남긴 사진과, 그리고 누군가에게 나눠줌으로써 그 사람들이 그림을 통해 날 기억할 수 있을 테니 그걸로 충분히 값지다 생각된다.

한국에 미리 짐을 전혀 부치지 않고 캐리어 하나에 필요한 것들만 최소로 담고 모두 버리려니 물감들도 모두 챙겨갈 수가 없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 하는 지인에게 일부를 남겨주고, 그럼에도 남은 것들은 버리기로 했다. 계속해서 아껴가며 사용하던 것들을 이렇게 그냥 버리려니 돈이 아까운 걸 떠나 마음이 아팠다.

그림을 받아간 사람들은 모두 지인들이다. 내 그림이 모르는 이에게 팔리거나 넘겨질 정도의 대단한 건 아니기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1. 가장 친한 친구인 E에게 그림을 고르게 하니 그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그림들이라며 몇 개를 골랐다. 그다지 잘 그렸다고 생각지 않았던 한 그림을 골라서 의외다 싶었더니, 자기가 양귀비 꽃을 좋아한다더라. 그래서 그 그림까지 포함해서 E와 그의 와이프가 6개의 그림을 가져갔다.

2. 같이 술을 종종 마시는 한국인 지인들이 총 4개를 가져갔다. 이 전에도 이들에게는 종종 그림들을 선물하곤 했다. 주문을 받은 적도 있었다. 집에 돈이 들어올 수 있는 해바라기를 원한다고 해서, 해바라기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었다.


3. 집에 식사 초대를 했던 연구실 친구들 3명에게 각자 원하는 그림들을 가져가게 했다. 한 명은 나름 모네 느낌으로 그려보려 했던 그림 두 개를 맘에 들어해서 가져갔고, 다른 친구들은 가자 맘에 드는 것들을 챙겨갔다.

4. 함께 사물놀이를 하는 프랑스인의 피앙세 J 씨가 그림 하나가 맘에 든다며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 분은 미술을 하신 분이셨기에 이분이 맘에 드는 게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뿌듯함을 느꼈다.


5. 그 외에도 한 모임에서 만난 중국인 친구도 그림을 갖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맘에 드는 그림이 있다고 했다. 이 친구와는 아마도 앞으로 만날 일이 없을 듯하여, 마지막으로 날 기억하라는 선물로 그림을 전달해 주었다.


그림을 하나 둘 처분하고도 짐을 챙기는 전날까지 처분하지 못한 그림들이 남아버렸다. 대부분 내가 생각해도 가장 별로인 것들이 남아있었다. 사람들의 보는 눈은 다 비슷하구나 싶었다. 미처 주인을 찾지 못한 그림들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프랑스에서 떠날 준비를 마쳤다. 떠나보낸 그림들이 지인들의 공간에 함께 남아 그들이 나를 기억하도록 해주겠지. 그 그림들이 내가 프랑스에 있었다는 흔적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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