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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확위 May 22. 2024

탈탈 털린 그룹 미팅

프랑스에서 2년 넘게 박사 후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일 외에 모든 것이 좋았다. 내 일인 연구는 열심히만 한다고 좋은 결과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니 온전히 내가 잘못한 결과라 할 수는 없을 거다. 내가 있는 그룹은 매주 그룹미팅이 있다. 처음 왔을 때는 그룹미팅에서 두 명씩 발표를 했었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이유로 매주 한 명씩만 발표를 진행하게 되었다. 그렇게 바뀌고 나니, 개인별 발표 차례가 돌아오는데 한참이 걸리더라. 우선, 그룹미팅이 매주 진행될 수 있는 게 아니기도 하고 (보스의 잦은 출장), 한 사람당 돌아가며 자기 리서치 발표와 참고문헌 발표 두 가지를 번갈아가며 하다 보니, 자기 최근 연구 결과를 발표할 기회가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다. 원래 내 발표는 11월이었다. 그런데 계속해서 미뤄지고 미뤄지더니 2월이 되어버린 거다.


미팅이 미뤄지기 전에 미리 준비했던 발표자료에서 진전된 것이 그다지 많지 않아 더 수정할 게 날짜뿐이었다. 발표 준비는 크게 할 게 없었다. 프랑스에서 계속 지내면서 영어를 주로 쓰다 보니, 그전보다는 영어 사용하는 게 편해지긴 한 것 같다. 영어로 발표하는데 굳이 연습이 필요치는 않았다. 발표자료만 준비하고 미팅 준비가 끝났다.


미팅 당일 아침 발표 장소에 마이크를 세팅하고, 프로젝터를 켜서 발표준비를 마친다.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린다. 결과가 좋지 않으니 좋은 소리들이 나오지 않을 거란건 이미 알고 있어서 발표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결과를 보인다면 누구라도 내가 능력 없는 이라고 생각할 거라 여겨져서 정말이지 발표하고 싶지 않았다. 여기 사람들은 9시 30분에 시작하는 미팅에 30분에 도착한다. 일찍 오는 이들이 거의 없다.


발표를 시작하고 준비해 온 자료를 바탕으로 내 연구 진행상황들을 설명한다. 발표를 마치고 질의응답 시간이다. 예상했던 질문들이 나온다. 분자가 그렇게 쉽게 degradation이 일어난 게 이상하다. 왜 아직도 정제가 안된 건지. 왜 계속 그 방법을 고수한 건지. 그러다 우리 연구실 No.2가 말한다. 고분자인데 왜 MALDI를 고수했냐고 그런다. 고분자는 GPC를 이용하는 게 더 정석적인 방법이라고 한다. 힐끗 보스를 쳐다본다. 난 보스와만 중간 미팅들을 진행해 왔다. MALDI에서 원하는 product의 피크가 검출되기는 하였기에 우리는 그 방법을 계속해서 사용해 왔다. 좋은 소리는 딱히 나오지 않은 발표였다. 탈탈 털린 기분이었다.


미팅이 끝나고, 보스가 내일 다른 정규직 직원과 함께 미팅을 하자고 한다. 나는 그래도 아직 한 달 반 정도 시간이 남아있으니 그전까지 진전이 있을 수 있지 않나 생각하고 있었지만, 보스는 지금까지 없었다면 남은 시간에도 그다지 나아지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듯했다. 인수인계할 것도 있으니 그와 함께하라고 했다. 조금 짜증이 났다. 다음날 미팅에서 바로 GPC로 확인을 하라고 한다. GPC담당자들이 프랑스인들인데, 그 사람들이 조금.. 까다롭다면서 혼자 가서 영어로 하는 것보다는 프랑스인인 R과 함께 가서 얘기를 하라고 하더라. 프랑스인들조차 까다롭다며 프랑스인을 데려가라고 하는 프랑스인들이라니....


나는 계약이 끝나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결과를 만들어내고 가려고 했지만, 보스가 아무런 기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 힘이 빠졌다. 박사 후연구원은 박사과정 학생과는 다르게 독립적인 연구자로 스스로 성과를 보여야 하는 존재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곳에서 실패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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