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 오기 일주일 전 수술을 했었는데, 프랑스에 도착 후 6개월 만에 재수술을 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MRI 판독상으로 재발로 의심되어 수술이 결정된 것이다. 고민을 많이 했다. 가족들은 한국으로 돌아와 수술하기를 바랐는데, 수술 후 비행기 타고 오는 길에 죽을 뻔 한 경험이 있다 보니, 비행기는 무조건 완전한 회복 후에 타야겠다 싶었고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될 것 같았다. 프랑스에서 이비인후과 담당의에게 수술 후 퇴원은 언제 하냐고 물어보니 바로 당일 퇴원이 가능하고 바로 일할 수도 있다고 했다. 프랑스에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한국에 돌아가서 수술을 받고 회복하고 한참 지나 되돌아와야 한다는 게 맘에 걸려 프랑스에서 수술을 받기로 결정했다. 부모님은 몇 번 그래도 한국에 오는 게 낫지 않겠냐 했지만,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고, 못 사는 나라도 아닌 걸요"라고 프랑스 의료가 걱정할 만한 곳이 아니라며 부모님을 안심시켰다.
병원에서는 전신마취로 수술을 진행하니, 보호자와 함께 오라고 했고- 수술을 마친 후에도 보호자가 있어야 퇴원할 수 있다고 안내해 줬다. 수술 전부터 내 이비인후과 의사가 영어를 잘 못한다는 걸 안 연구실 친구가 병원에 같이 가서 불어를 통역해 주곤 했는데, 의사의 말을 듣고는 자기가 수술 당일 함께 가주겠다고 선뜻 나서주었다. 고마웠다. 그때뿐 아니라 매번 날 챙겨주던 이 친구와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연락을 주고받으며 진짜 친구 사이로 남게 되었다. 힘들 때 도와주는 이들이 진짜 친구라 하지 않는가.
수술 당일 연구실에 출근을 했다가 오후에 일찍 퇴근하며 친구와 함께 병원에 갔다. 병원은 사립병원이었는데, 내가 있던 스트라스부르 시내에서 제법 떨어져 있었다. 트램으로 한 정거장만 더가도 바로 독일이었다. 연구실에서 거의 한 시간에 걸려 도착한 병원은 아직은 코비드 시절이라 마스크를 착용하고 의료기관에 들어가야 했었다. 그렇게 병원에 들어가니 넓고 쾌적하고 한산했다. 이 정도 규모의 병원에 이렇게 사람이 없는 게 낯설었다. 아무래도 코시국이었던지라 사람들 출입이 더 제한되었던 게 아닌가 싶다. 병원에 접수를 하고 안내를 받아 대기실에서 대기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나와 "Madame Lee? (마담 리?)"라고 나를 불렀다. 보호자로 온 친구도 함께 불렀다. 수술은 어느 정도 걸릴 것이고, 잠시 회복실에서 회복한 후에 퇴원할 건데, 그때 보호자에게 데리러 오라고 연락을 할 거라고 했다. 그렇게 보호자로 온 친구와 인사를 하고 혼자 간호사와 함께 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먼저 의자와 작은 캐비닛이 있는 단칸방 같은 곳에 들어가서 대기하라고 했다. 잠시 후, 한 꾸러미의 일회용품들을 가져왔다. 갈아입으라고 건네줬다. 뜯어보니 환자용품인데 모두 일회용품이었다. 파란색 일회용 가운, 일회용 슬리퍼, 일회용 머리망 등이었다. 그렇게 준비를 하고 한 시간 가까이 그냥 대기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계속해서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간호사가 영어를 못해서 나에게 계속 불어로 얘기했고, 나는 그냥 눈치로 알아듣고 기다렸다. 잠시 후, 한 사람이 와서는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따라가서 수술방 근처의 의료 침대에 눕게 했다. 그런 후, 은색으로 된 재난용품 같은 이불을 덮어줬다. 일회용품이었다. 그러고는 내 침대를 끌고 수술방 앞까지 이동했다. 잠시 후, 수술방에서 간호사가 나와서 내게 불어로 말을 하기에 불어를 못한다고 하니 서툰 영어로 주사를 놔준다고 했다. 주사 바늘을 꽂은 채 누워서 멀뚱멀뚱 주변을 둘러보며 대기했다. 수술방이 준비가 안된 듯했다.
조금은 신기했던 것이, 내 담당의가 병원의 수술실을 예약해 두고 수술을 진행하는 듯했다. 한국에서는 해당 병원의 의사들이 수술을 집도한다면, 프랑스에서는 이런 식으로 외부의 의사가 예약해 두고 수술을 하는 게 가능한 모양이었다. 얼마나 지났을 까, 잠시 후 반가운 내 담당의가 나타났다. 나에게 기분은 어떻냐고 물어봤다. 잠시 후 수술실로 들어가서 수술이 진행될 거라 말했다. 수술방으로 내 침대를 밀고 들어가서는 수술실 침대로 나를 옮겼다. 수술실의 밝은 불빛이 괜히 긴장하게 만들었다. 잠시 후, 마취과 의사인 듯한 사람이 약물이 주입될 거라 말했고 그 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얼마나 지났을 까, 눈을 뜨니 수술 후 회복실 같았다. 마취가 다 깨지 않았기에 글을 쓰는 지금도 그때 기억은 조금 가물가물하다. 내 담당의가 와서 수술이 다 잘되었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그 사람이었는지 확실치 않다. 잠시 후, 1인실로 옮겨서 더 휴식을 취하다가 간호사가 보호자에게 데리러 오라고 연락했다고 했다. 그 후 찾아온 의사는 내 담당의가 아니었는데 (아마 담당의는 퇴근한 듯했다) 나에게 서류들을 주며 수술에 대해 설명을 해줬다. 내가 언제부터 출근할 수 있냐고 묻자, 무슨 일을 하냐고 했고 화학 연구실에서 실험을 한다고 하니 그러면 최소 일주일은 실험실은 출입을 못한다고 했다. 수술 부위가 외부로 다 노출되어 있기에 화학약품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피스에서 업무는 바로 다음날부터 가능하지만 실험은 불가하다 말했다. 바로 출근할 생각이던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직 연구실에서 본격적으로 실험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문서작업은 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실험을 못한다면 출근할 이유가 없었다.
수술 후 충분히 회복하고 나니, 간호사가 와서는 먹을 것을 권했다. 나에게 커피하겠냐고 묻더라. 그러더니 치즈의 나라답게 치즈 먹겠냐고 묻기도 했다. 나는 그래도 좀 소화가 더 잘되는 걸 먹는게 좋지 않을까 싶어 치즈는 거절하고 평범하게 사과 퓨레와 주스를 선택했다. 잠시 후, 쟁반에 음식을 담아다 줬는데, 수술 뒤 한국 병원에서 먹었던 따뜻한 식판이 생각났다. 수술 후 첫 끼는 흰죽을 주었고, 그 후에 밥을 줬었다. 차디찬 식판을 보니 정말 다른 문화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해외에서 출산을 하고, 병원 식사를 사진 찍어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사진을 보냈더니 어머님이 우셨다고 했다. 어떻게 수술 뒤에 저런 것을 먹냐고 말이다. 그 맘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수술 뒤에 커피를 마시다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치즈라니 너무 프랑스다워서 재밌을 정도였다.차갑디 차가운 빵에 버터와 잼을 발라먹으며, (나는 원래 빵순이라 맛있게는 먹지만) '이렇게 먹어도 된단 말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이 차가운 쟁반에 슬퍼하실까봐 사진을 보내진 않았다.
잠시 후, 보호자인 친구가 왔다. 함께 트램을 타고 가는데 밖이 굉장히 소란스러웠다. 알고 보니 이 날이 프랑스의 거리 음악 축제인 Fête de la musique 날이었다. 이 날은 프랑스 전역의 거리에 무료 공연들로 가득 차는 날이다. 사람들이 모두 축제를 즐기며 길거리에서 맥주와 같은 술도 즐기며 한껏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시내를 통과하면서 길거리에 사람이 더욱 많아져 트램이 지나가는데 시간이 걸릴 정도였다. 이 친구도 축제를 즐기다가 나를 위해 다시 병원에 찾아와 준 것이었다. 시간을 내주는 게 고마웠다. 그러면서 이런 즐거운 날을 즐기지 못한다는 사실에 조금 씁쓸하기도 했다.
친구가 집 앞까지 데려다줘서 무사히 집에 도착했었다. 집에 도착해 콧 속에서 흐르는 피를 위해 받쳐둔 코 밑의 거즈를 교체한다. 피가 흥건하다. 이미 한 번 경험해 본 수술이라고 두 번째는 한결 수월했다. 거즈를 교체한다. 통증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진통제 약효가 떨어지면 다시 아플 수 있으니 바로 진통제를 챙겨 먹고 침대에 눕는다. 프랑에서 수술이 무사히 끝났다. 회복만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다.
일주일 뒤쯤, 다시 의사를 찾아서 수술 경과를 봤다. 다 잘됐다고 했다. 수술을 잘해준 건지 아니면 첫 수술보다 수술 부위가 작아서 그랬던 건지 회복이 훨씬 빨랐다. 그전 수술에서는 거의 한 달 가까이 조금씩 코에서 피와 분비물이 나왔던 것이 몇 주 가지 않아 바로 멈췄다. 내가 한국인 지인에게 프랑스 수술 잘한다고, 회복도 빨랐다고 얘기하자 지인이 자신이 아는 의사가 연수차 프랑스 대학병원에 왔던 얘기를 해줬다. 일주일 프랑스 병원에 있더니 "여기 사람들은 다 죽겠어. 하루에 환자를 이 정도밖에 보지 않는 게 말이 돼?"라고 했다고 했다. 진찰하는 환자 수가 한국에 비해 턱없이 적었다고 했다. 한국에서 오전이면 다 볼 환자를 하루 종일 본다고 했다. 그러다 수술실을 들어가고 "수술은 진짜 잘하더라"라는 말을 했다고 했다. 굳이 한국에 가지 않고 프랑스에서 수술을 받기로 한 내 결정이 좋은 선택이었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다. 게다가 꽤나 잘 사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