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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formoflove 11시간전

잔소리라는 이름의 사랑


며칠 전, TV를 보다가 재미있는 장면을 봤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전현무가 어머니의 잔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장면이었다. 그의 표정은 익숙했다.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억지로 들어야 할 때의 묘한 인내와 짜증. 그런데 그때 코드 쿤스트가 한마디를 던졌다.


“그걸 다 사랑해로 바꿔 들으면 돼.”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가볍게 흘러갈 수 있는 대화였는데, 그날따라 내 귀에 오래 남았다. 문득, 내 부모님과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의 잔소리가 떠올랐다.


부모님은 늘 나에게 많은 말을 하셨다. 고등학생 시절엔 왜 그렇게 공부를 안 하냐고, 대학에 가고 나서는 왜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지 않느냐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을 때는 친구 좀 만나고 사람답게 살라며 다그치셨다. 그 모든 말들이 피곤하게 느껴졌던 때가 있었다. 나는 그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

이 한마디로 대화를 끝내버리곤 했다. 그 뒤로는 문을 닫아버렸다. 나는 내 방에 갇혀 있었고, 그들이 내게 했던 말들은 마치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음처럼 점점 멀어졌다. 그땐 그게 편했다. 내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들이 했던 말들은 그저 나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그 모든 말의 바탕에는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다. 내가 힘들어질까 봐, 내가 잘못된 길로 갈까 봐, 내가 상처받을까 봐. 그 걱정들이 말로 변했을 뿐이었다.


나는 그 사랑을 귀찮아했고, 무시했다. 때로는 날카롭게 받아치며 그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내가 들었던 잔소리들은 사랑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어쩌면 그들의 사랑을 부담스럽게 느꼈던 것 같다.


사랑했던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왜 이렇게 말을 안 해?”

“내가 신경 쓰는 거 알면서도 왜 무시해?”


그런 말들을 듣고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법을 몰랐다. 상대방이 나를 생각해서 했던 말들을, 나는 오히려 나를 비난하거나 통제하려는 시도로 받아들였다. 때로는 그 사랑을 알면서도, 더 날카로운 말로 그들을 밀어냈다.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서 나는 늘 미숙했다.


TV 속 코드 쿤스트의 말은 어쩌면 간단했다. “그걸 다 사랑해로 바꿔 들으면 돼.” 그는 쉽게 말했지만, 그 말은 묘하게도 깊었다. 이제 와서 내가 그 말을 떠올리며 과거를 생각해 보니, 부모님의 잔소리도, 사랑했던 사람들의 걱정도, 그 모든 것들이 결국 나를 생각해서 나온 말이었다. 나는 그걸 너무 늦게 알았다.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고도, 나는 늘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 사랑에 비해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예민해졌고, 때로는 그 사랑을 거부하기도 했다. 나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이상한 결론에 스스로 도달한 적도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사랑은 쉽지 않다고. 하지만 나는 사랑을 주는 것보다 사랑을 받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라고 느꼈다. 누군가가 나를 걱정하고, 나를 생각하는 말을 건넬 때, 그걸 단순히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왜 이렇게 어려웠을까.


이제는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누군가 나에게 무언가를 말할 때, 그것을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법. 그것을 사랑의 한 형태로 받아들이는 법.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사랑받는 일이 서툴다.

아마도 나는 사랑에 미성숙한 사람이었고, 어쩌면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걱정하고, 나를 생각해 주는 말을 할 때, 이제는 조금이라도 더 마음을 열어볼 것이다.

그 말을 모두 사랑으로 바꿔 들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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