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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formoflove Oct 26. 2024

보내야 할 것들

이별은 생각보다 더 오래 남는다. 누구나 한 번쯤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라는 위로를 건네받지만, 그 시간이 언제 올지, 혹은 오기는 할지 알 수 없는 것이 문제다. 처음엔 나도 그랬다. 이별이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이 내 곁에서 물리적으로 사라지고 나면, 마음도 자연히 비워질 줄 알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이별이란 결국 하나의 끝이 아니라, 어쩌면 더 많은 ’ 보내야 할 것들‘의 시작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내 방 안에 아직도 네 흔적들이 남아있는 걸 느낀다. 따로 남겨둔 물건들은 없는데도, 어느새 익숙해진 침대의 한쪽 빈자리, 머리맡에 놓인 옅은 향의 잔상들, 아침 햇살이 스며드는 창가의 빛 모두가 너를 떠올리게 한다. 계절은 가을로 접어들었고, 차가운 공기가 코끝에 닿을 때마다 네가 좋아하던 가을의 차분한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너는 항상 가을을 좋아했지. 공기가 선선하고, 나무들이 하나둘씩 잎을 떨구는 그 모습이 너에게는 낭만적이었나 보다. 이제 그 낭만은 나에게 고스란히 남겨진 짐이다.


지난 주말, 오랜만에 친구들과의 약속이 있었다. 예전 같으면 네가 물어봤을 것이다. ”오늘 어디 가? “ 하고. 별일 아닌 듯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겠지만, 이제 그 물음조차 사라졌다. 친구들과의 자리에선 그럭저럭 웃고 떠들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몰려왔다. 한적한 골목을 지나며 가로수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걸 보는데, 그 그림자 속에서 네 얼굴이 겹쳐졌다. 길 위에 남겨진 어두운 그림자처럼, 네가 내 안에 아직도 짙게 자리 잡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 이별의 첫날들에는 당연히 아플 줄 알았다. 울고, 슬퍼하고, 머릿속에서 계속 너를 떠올리며 가슴을 부여잡는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멍하니 앉아있던 시간들이 더 많았다. 상처를 애써 외면하고, 일상에 휩쓸리듯 살아가면서 자연스레 잊힐 거라고 믿었다. 그저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버텨왔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내 안에 아직도 보낼 게 남아있다는 걸.


너 하나 보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 사람을 온전히 잊기 위해서는 이름을, 목소리를, 얼굴을 떠올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내가 잊어야 할 것은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함께 갔던 장소, 그때의 공기, 그리고 나도 모르게 네가 좋아하던 음악을 듣고 있는 나 자신까지도. 잊어야 할 건 네가 아니라 네가 내게 남긴 수많은 흔적들이었다.


예전에 같이 자주 걷던 공원을 혼자 걸어보았다. 잔잔한 호수 주변으로 나무들이 늘어선 그 길은 항상 우리가 좋아하던 곳이었다. 너와 함께일 때는 가볍게 느껴졌던 그 길이, 혼자서 걸어보니 끝도 없이 이어지는 듯했다. 바람은 불어오고 낙엽이 한참을 날아다녔지만, 그 풍경은 더 이상 따뜻하지 않았다. 공원 벤치에 앉아 한참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지나갔다. 아무렇지 않게 웃고 떠드는 모습 속에서, 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무심한 계절의 흐름 속에서 누구 하나 나처럼 느리게 남겨져 있지 않은 듯 보였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든다. 이별이라는 건 사람을 한순간에 떠나보내는 게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했던 수많은 조각들을 조금씩 보내는 과정은 아닐까. 우리는 물리적으로는 헤어졌지만, 내 기억 속에서 네가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아마도 그것은 내가 원해서 남겨두는 게 아니다. 그저 우리의 일상이 너무나도 촘촘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에, 그 모든 걸 단번에 잊을 수 없을 뿐이다.


비 오는 날이면, 네가 좋아했던 따뜻한 카페에 앉아 있던 기억이 떠오른다. 유리창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우리는 무슨 얘기를 나누었을까.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날씨나 일상적인 얘기였겠지. 하지만 그 평범한 순간들이 지금의 나에겐 너무나도 선명하다. 빗소리가 들리면 아직도 가끔 네 생각이 난다. 비 오는 날은 네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인사처럼 느껴진다. 잔잔하게, 그러나 쉽게 잊히지 않는 소리로 마음을 두드린다.


이제는 알 것 같다. 이별은 한 번에 끝나는 게 아니란 걸. 마치 가을 나무들이 잎을 하나둘씩 떨구듯이, 나도 너와의 기억을 하나씩 떨구어야 한다.


결국 이별이란 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닌 긴 과정이다. 그리고 나는 그 과정의 중간쯤에 서 있는 것 같다. 언제쯤 끝이 날지 모를 이 길 위에서, 나는 오늘도 네 기억을 하나씩 떨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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