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리
울창한 숲을 따라 나지막한 언덕을 오르는 발걸음. 익숙한 길인데도 오늘은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짙푸른 나뭇잎들이 푸른 바다처럼 보였고, 나무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햇살마저 마치 물살처럼 느껴졌다. 한참을 오르다 언덕 위에 서자, 저 멀리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숲을 바라보던 그가 미소 지으며 먼저 입을 뗐다.
“오늘따라 숲이 참 깊어 보이네.”
고개를 끄덕이며 무성한 숲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더 깊이 빠져들다 보니 숲이 아니라 끝없이 펼쳐진 바다처럼 보였다. 조용히 서 있던 그가 다시 물었다.
“어쩌면 이곳이 바다라면 어떨까? 네 마음속 깊은 곳처럼.”
순간 가슴속에 쌓아 두었던 감정들이 떠올랐다.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숲이든 바다든 나를 기억해 줄 이가 곁에 있다는 게 묘한 위안으로 다가왔다.
“내가 이 숲이 된다면, 아니, 이 바다가 된다면… 넌 여기 올 때마다 나를 기억해 줄까?” 조용히 흘러나온 말이 어느새 언덕 위에 퍼졌다.
그가 깊은 눈으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가 남아 있다면, 언제나 찾아올게. 내게 길을 내어준다면 난 언제든 널 찾겠지.”
“정말?”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한때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감정을 내비친 듯한 말에 조금은 쑥스러웠지만, 왠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네 작은 언덕 한구석이라도 되고 싶어.”
그는 나직이 웃었다. “네가 남아 있다면, 난 언제든 널 기억할 거야. 언덕 한구석에서 기다리든, 바다에 잠기든 상관없어.”
잠시 서로의 눈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숲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푸르게 출렁이는 숲이 마음을 끌어당기듯 몰아쳤다. 마치 이 자리에 뿌리내린 나무처럼 언덕에 남아 있을 수 있다면, 그는 언제나 나를 기억해 줄까.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너 정말 나를 떠나지 않을 거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난 이곳에 남아 있을 거야. 혹시 내가 물속으로 가라앉아도, 내 눈물이 흘러 바다를 이룬대도… 네가 나를 찾아준다면.”
그는 조용히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네가 길을 내어준다면 난 이 언덕 어디서든 널 찾을 거야. 그러니 네가 숲이든 바다든 나를 밀어내지 마.”
서로의 손이 맞닿는 순간, 말로 다 하지 못할 감정들이 언덕에 스며들었다. 서로가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이곳에서 언제까지나 남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언젠가 흔적처럼 남을 수 있다면.
언덕 아래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이제 나의 모든 눈물과 마음을 이 숲에 남길 수 있다면, 이 자리에 언제나 그 흔적이 남아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