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d.ear)
바람이 차갑게 불어오던 늦가을, 하늘은 낮은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와 그녀는 겨울이 막 시작된 듯한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와 손을 잡고 있지만, 그의 손끝이 예전처럼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 그의 손을 한 번 더 꼭 쥐었지만, 그의 손은 그저 무심하게 자신의 손을 받쳐주는 듯했다.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우리, 자주 오던 이 거리 기억나?”
그는 짧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그리운 듯한 감정 대신, 조금 멀게 느껴졌다. 그는 어디론가 시선을 돌린 채 대답했다.
“응. 그때 참 많이 웃었었지.”
그녀는 그가 그리운 순간들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분명 그도 이 거리를 걸으며 그녀와 함께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텐데, 그에게는 이 모든 것이 그저 흐릿하게 스쳐가는 추억에 불과한 것 같았다.
그녀는 두 사람의 관계를 놓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그가 변해가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에는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설렜고, 그가 자신의 손을 잡을 때마다 그 온기 속에서 위안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모든 것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웃을 때, 그 눈빛에 담겼던 진심이 사라진 듯한 공허함이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은 자주 가던 카페에 들어섰다. 벽에 걸린 그림들, 낡은 나무 의자,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새겨진 듯한 그 작은 공간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와 그녀 사이의 공기는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카운터에 있는 메뉴를 보며 옛날을 떠올렸다. 언제나 그가 먼저 메뉴를 골랐고, 그녀는 그의 취향에 따라 자연스레 주문을 맞추곤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의례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뭐 마실래?”
그녀는 당황하며 무작정 대답했다.
“너 좋아하던 거, 아메리카노로… 너도 같은 걸로 할래?”
그는 살짝 미소 지었지만, 그 미소는 언젠가부터 거리감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커피를 마시며 앉아 있었지만,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말을 잇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는 말끝마다 무언가 단정 지으려는 듯 차분하고도 단조로운 대답을 반복했다.
잠시 후, 그녀가 그를 보며 말을 꺼냈다.
“예전처럼… 나와 있으면 즐겁지 않아?”
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에는 미안함이 스치고 있었다.
“아니… 그냥… 요즘엔 너무 편해져서 그런가 봐.”
그녀는 그의 대답에 가슴이 아려왔다. 편해졌다는 그 말은 어쩌면, 더 이상 설렘이나 열정이 없다는 뜻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그의 옆에 서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렸는데, 지금은 무뎌진 감정이 그를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 예전에 그가 좋아했던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그 노래로 여러 밤을 보냈고, 그 노래를 들으며 같이 웃고 울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표정은 어쩐지 공허해 보였다.
“이 노래 기억나지? 네가 많이 좋아했잖아.”
그는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그의 반응은 담담했다.
“응… 참 오랜만이네.”
그녀는 그저 슬프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노래도, 이 거리도, 이 카페도 그가 예전처럼 반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그는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의 눈빛과 말투에서 느껴지는 거리감은 그 어떤 노력으로도 메울 수 없을 만큼 커져 있었다.
밖에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창문 너머로 나뭇잎들이 하나둘씩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아마도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사랑이 깊어지는 건 아닌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