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세 HLL 예능PD 김보희 인터뷰 (2024년 1월)
아주 어릴 적엔 의사를 꿈꿨다. 3대(代)가 함께 사는 집 한 켠에 방문을 열면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하는 이모가 있었다. 의대생이었던 이모가 잠을 쫓기 위해 믹스커피를 타오면 어린 보희는 조용히 식빵을 챙겨들고 이모 방으로 따라들어간다. 그리고는 “이모, 나 식빵 한 번만 찍어 먹어도 돼?”하고 묻는다. 이모가 고개를 끄덕이면, 식빵을 커피잔에 살짝 담근다. 커피를 흠뻑 흡수해 촉촉해진 식빵을 천천히 음미하며 씹는다. 아직 어려서 커피를 못 마시던 보희에게는 작은 일탈이었고, 여전히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모처럼 공부를 곧잘 했던 터라 보희가 나중에 의사가 되길 가족 모두가 기대했다.
두 번째 꿈은 개그우먼이었다. 고등학교 때 의사가 되기 위해 이과에 진학하긴 했지만, 다른 사람을 즐겁게 만들고 웃기는 일이 훨씬 즐겁고 보람있게 느껴졌다. 연극영화과를 가기엔 준비가 부족했기에 고민 끝에 언론학과를 지원했고 다행히 합격했다. 부모님은 탐탁치 않아 하셨지만 그럴수록 보희는 더욱 진심을 다해 학교 생활에 임했다.
1학년 새내기에게 같은 과 선배가 UCC(user created contents. 사용자가 직접 제작한 콘텐츠)를 제작해야 하는데 연기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당시만 해도 UCC공모전 정도인 줄 알고 임했는데 알고 보니 한 케이블 채널의 교양방송 프로그램 중 UCC배틀을 하는 코너였다. 화면에 잡힌 보희의 끼를 알아본 책임 프로듀서는 때마침 공석이 된 리포터 자리에 보희를 캐스팅했다. 그렇게 방송계에 첫발을 디뎠다.
다른 코너로 이동이 생겨 야외 촬영이 있던 날이었다. 리포터는 제작진과 같은 대본을 본다. 촬영구성안이 같이 나와있다 보니 PD가 찍어야 하는 장면들이 리포터의 대사와 나란히 써있었다. 휴게소에 도착해 잠시 쉬는 틈에 보희가 감을 쪼아먹는 까치를 발견했다.
“지금 생각하면 월권일 수 있는데, PD님한테 ‘저거 찍으셔야 하는거 아니에요? (촬영구성안에) 가을 인서트 찍어오라고 되어 있는데’라고 한 거예요. 다행히 그 PD님이 ‘야 뭐야’라고 할 수도 있는데 안 그러시고 ‘그래’ 하더니 찍으셨어요. 그리고는 ‘이 새끼 너 PD해도 되겠다. PD하면 잘하겠다.’ 하시는 거예요. 저는 출연자이니 방송을 모니터링하잖아요. 현장에서 감독님들이 찍을 때 내심 ‘이거(감을 쪼아먹는 까치) 이렇게 찍으면 뭐가 나오겠어?’ 했는데 편집이 돼서 이야기에 흐름이 있게끔 만들어지고, 멋지게 나왔어요. 그때 (PD라는 직업이) 재미있게 느껴졌죠. 자연스럽게 PD의 직무를 옆에서 알게 된거죠.”
누군가의 한 마디가 인생을 바꾸는 계기 중 한 겹이 되기도 한다. 보희는 아직도 그 PD님의 한 마디를 잊지 못한다.
“이런 얘기를 들었다 보니 원래 개그맨을 한다는 건 다른 사람들 앞에 서야 되는 일인데, 리포터를 하면서 과연 나한테 이게 맞을까 이런 생각을 한 것 같아요. 왜냐면 녹화를 하러 갈 때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내 외모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 거예요. 출연자니까. 근데 저는 연예인처럼 예쁜 건 아니지만 나름 만족하면서 살고 있었는데 이렇게 피드백을 많이 받다보니 나도 모르게 신경을 쓰게 되고 ‘진짜 이거 뭐 좀 해야 되나’ 뭐 이런 생각이 막 들더라고요.”
대학교 1학년 때 이미 리포터라는 흔치 않은 경험을 6개월 간 하고 난 뒤에, 3학년 때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SBS 프로덕션에서 인턴을 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PD를 돕는 조연출 역할이었다.
“칭찬을 한 번 듣고 (PD에) 관심이 생긴 상태였는데, 경험 해보면 좋을 것 같다 싶었어요. 왜냐하면 해봐야지 이게 나한테 맞는지 아닌지를 사실 알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해봤는데 재밌었어요.”
보희의 말에 자연스레 최재천 교수님의 말이 떠올랐다. 동물행동학을, 특히 개미를 오래도록 연구한 최 교수님은 저서 <최재천의 공부>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향해 말했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악착같이 찾아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대부분은 내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돼요. 내 길이 아니라는 걸 발견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되죠. … 쭈그리고 앉아 있지 말고, 나가서 뒤져보고 찔러보고 열어보고, 강의도 들어보고, 책도 읽어보면서 찾아야 합니다. 무언가 관심이 가는 일이 보이면 그 일을 하는 사람도 찾아가 보는 거예요.”
평생 하고 싶은 일을 한 번에 찾는 일은 드물다. 이것저것 해봐야 찾을 수 있다. 어떤 일이든 해보는 과정에서 자신을 알 수 있고, 난관을 극복해 보는 경험을 하면서 진짜 좋아하는 것을 찾고, 정말 잘할 수 있게 된다는 거다. 물론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것이 모두에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보희는 일단 부딪쳐 보고, 결국 찾았다.
현재 보희는 HLL이라는 회사 소속으로 디지털 콘텐츠들을 기획‧제작하는 예능 PD로 일하고 있다. OTT 프로그램이나 방송 예능 제작, 콘서트 연출이나 브랜디드 콘텐츠(브랜드와 협업하여 만드는 콘텐츠)도 만든다. 최근에는 기획 위주로 업무를 진행하고 있고, 지난해 11월 고양시에서 콘서트 <2023 TikTok Stage The Shout!>를 성공적으로 열었다. 유튜브 콘텐츠로는 <와썹맨>, 방송 프로그램 <히든트랙>, <몬스타엑스레이>, <아이돌 원더랜드> 등의 연출을 맡았다.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일을 시작했으니 어느덧 16년차 PD였다. 1월생이다 보니 만 20살에 사회에 발을 들인 셈이다. 일찍 일을 시작한 데 대한 아쉬움이나 어려움은 없는지 궁금했다.
“다른 경험들을 조금 더 해봤어도 좋지 않았나하는 생각도 들 때가 있지만 나와 잘 맞는 일을 찾는 게 되게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정말 생각지도 않았던 직군이다 보니, 뭔가 거저 얻은 기회같았기 때문에 허투루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
보희는 언론학과 선후배, 동기들이 방송국 공채 입사를 위해 준비하는 동안 프리랜서로서 일을 시작했다. 인턴 때는 월급 40만원, 정식으로 프로그램에 합류했을 땐 월 100만원을 받았다. 휴일 없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언제든지 일했고 갖은 고생을 했지만 감사한 마음을 늘 잊지 않았다.
“월급 액수만 생각했을 때 너무 만족스럽지 않은 금액이긴 한데, 내가 전문성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 ‘일을 배우는 입장인데 월급도 준다니 열심히 해야지’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 직업을 너무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도 진짜 많으니까요. 힘들게 일했지만 그래도 내가 나랑 잘 맞는 일을 할 수 있게 된 상황 자체에 대해 감사함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냥 참고 버티고 버텨 시간이 흘러 이렇게 온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까 싶지만, 당시만 해도 주변의 PD지망생 친구들에 비해 너무 쉽게 기회를 얻은 것 같아 오히려 미안할 정도였다고 했다. 빠른 취업성공으로 으스대기는커녕 친구들에게 힘든 내색 한 번 하기도 조심스러웠다. 물론 친구들은 보희가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보희는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묵묵히 일하는 방식을 택했다.
방송에 나오는 PD들이 조연출 시절에 좀비처럼 생활한다고 하던데, 어느 정도일지 궁금했다.
“힘들 때가 항시 많죠(웃음). 2-3일 밤샘은 물론이고 조연출이 저 혼자밖에 없던 때 얘기하자면, 모든 소품을 직접 제작하고, 테이프(요즘은 메모리카드에 촬영 영상을 담지만 십여 년 전엔 테이프에 담았다고 한다.)를 준비해야 해요. 촬영 가기 전에 테이프들마다 일일이 인덱스 스티커를 붙여야 하는데 촬영 때마다 테이프가 20~30개 되거든요. 별것 아닌데 번거롭고, 하지만 꼭 해야 하는 잡무가 정말 많았어요.”
PD는 촬영 현장을 관리하고, 촬영이 끝나면 편집하는 역할인 줄만 알았다. 그것만 해도 일이 많을 텐데 사전 준비도 직접 다 하다니. 듣는 동안 입이 딱 벌어졌다.
아찔한 순간도 많았다. 라떼(나 때는 말이야) 얘기를 좀 더 듣고 싶었다.
어느 날은 야외에서 출연자들이 외제차에서 내리며 럭셔리한 느낌으로 샴페인 잔을 들고 ‘짠!’ 하는 장면을 촬영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보희는 모든 스태프보다 먼저 도착해 모-든 소품을 차에 싣고 감독님들을 모시고 1시간 전에 현장에서 스탠바이할 수 있도록 세팅을 마쳤다.
소품을 점검하는데 어쩐지 샴페인 잔이 보이질 않았다.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촬영이 시작되면 현장을 벗어날 수도 없었다. 당장 감독님께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둘러대고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시만 해도 피처폰을 쓰던 때라 집에 있는 친구에게 검색 찬스를 써야 했다. 마치 빅스비, 시리에게 말하듯 친구에게 “지금 샴페인 잔이 필요한데 촬영장 근처 ‘가자 주류’ 이런 곳 좀 찾아줘.”라고 하면 친구는 주변을 검색해서 내비게이션처럼 길 안내를 해줬다고 한다.
“오른쪽으로 꺾으면 그거 보이지, 거기서 오른쪽으로 또 꺾어.”
지금은 결코 벌어질 것 같지 않은 옛날 얘기지만, 듣고 있자니 손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준비해도 현장에서 욕 먹는 날들도 있다.
“패션 프로그램을 맡을 때였는데, 소품으로 차트나 프린트물이 많았어요. 그땐 제가 다 손으로 만들었어요. 차트는 겉에 종이를 뗄 때 접착제가 안쪽에 있는 글씨를 해치지 않으면서 잘 뜯어지는 게 관건이거든요. 냄새도 엄청 독해요. 혼자서 접착제를 흔들어가며 뗐다 붙였다 해보면서 적당히 떼지게끔 만들어놨던 거죠.
여름 촬영이어서 이 판을 들고 나갔는데, 접착제가 약간 녹았나 봐요. 방송 녹화하면서 진행자가 쫙 뜯는데 종이가 들러붙은 거예요. 그 때 메인 작가가 “XX(심한 욕)!!!” 하고 소리를 지르더라고요. 제가 할 땐 괜찮았고 날씨가 그런 걸 제가 어쩌겠어요(웃음). 그 분이 저를 괴롭히려고 한 얘기는 아닌데 상황이 참 그랬죠(웃음). 바로 다시 만들었어요.”
요즘은 소품 제작 업체에 맡기면 디자인 시안을 만드는 것은 기본이고, 수정 요구에 맞춰 제작한 결과물을 프린트해서 우드락에 붙여 완성본을 배달해준다고 한다. 무엇보다 붙였다 뗐다가 자연스러운 재접착 풀이 시중에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 밖에도 에피소드가 넘친다. 대본이 촬영 전날 저녁에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짧은 시간 안에 급하게 필요한 소품을 구하기 위해 밤늦은 시간에 남대문 시장을 뛰어다녀야 했다. 보희는 세상에 필요한 물건을 구하는 방법을 그때 다 익힌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런 라떼(?)의 현장 경험들이 보희를 임기응변의 달인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리고는 “요즘 조연출들은 다 쿠팡으로 검색하던데요.”라고 덧붙였다. 옛 이야기에 푹 빠져 라떼 시대를 유영하던 우리는 느닷없는 쿠팡의 출현에 빵 터지고 말았다. 쿠팡뿐이랴. 우리가 얼마나 많은 편리를 누리고 있는지 새삼 놀랍고 감사해졌다.
모-든 일이 그렇듯 PD도 직업특성상 어려움이 있다. 연차가 쌓여도 좀체 줄어들지 않는다.
1) 생활이 불규칙하다.
프로그램에 들어가기 전에는 유연하게 근무하는 편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기획 단계를 지나 제작에 들어가면 일정한 출퇴근 시간이 없다. 사적인 약속을 일대일(1:1)로 잡지 않는 편이다. 언제든지 약속에 늦거나 취소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2) 관계(자)가 너-무 많다.
일단 스태프가 정말 많다. 촬영 나가서 만나는 카메라 감독, 조명 감독, 음악/음향 감독… 출연자인 연예인, 연예인의 매니저, 연예인의 헤어/메이크업/코디 담당자… 후반 작업할 때 종편실의 감독님, 자막 감독님… 그리고 작가들…. 이 많은 사람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일을 한다는 게 쉽지 않다. 시간은 항상 너무 쪼들리고, 모두가 그만큼 예민하기에 더 어렵다.
3)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야 한다.
일의 어느 단계, 어느 부분에서라도 늦어지거나 사고가 나지 않도록 끊임없이 조율하지만, 사람의 일이기에 매번 빠듯하고, 매번 예상을 빗나간다. PD는 잘못이 없는 경우라도 죄송하다는 말을 달고 산다. 네 탓 내 탓 따질 겨를도 없거니와 어떻게든 일을 진행시키는 것이 우선이다. 사과하는 것이 어려운 사람은 PD를 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고 말할 정도다.
4) 내 시간을 계획할 수 없다.
언제 무슨 프로그램에 투입될지 알 수 없다. 몇 달 뒤에 해외여행을 간다거나 ‘몇 년도 여름에는 무엇을 해보겠다’는 계확을 한들 일이 겹치면 소용없다. 보희에겐 늘 여가보다 일이 우선이다.
힘든 이유가 어찌 이리 다양하고 많을까. 그럼에도 버티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워라밸 그런 것보다 일단 내가 뭔가를 하고, 그 재미를 느끼면서 내가 막 살아있음을 느끼는 게 저한테 되게 중요한 요소예요. 저는 분주하게 일하는 게 신났던 것 같아요. 일이 우선이라는 사명감이 있어요.”
워라밸(work-and-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은 현대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중 하나다. 나도 언제부터인지 워라밸을 지키고 싶어하는 사람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현장에서 어느 선배가 하는 얘길 들었어요. ‘사람이 좋아하는 일을 하나 하려면, 싫어하는 일 열 개를 해야 되는 법이야.’ 저는 이 말이 와닿았어요. 내가 많은 공수와 노력은 들이지 않고 그저 재밌고 편한 것만 찾는 것 자체가 뭐랄까. 놀부 심보 같다고 해야 하나. 전 예전부터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생각해왔거든요.
뭐가 됐든, 그게 감정이든 관계든 다 서로의 노력과 공수가 들어가야 가꿔지는 거라고 생각을 해요. 일이 힘들긴 하지만 또 그게 보람이 정말 하나라도 있다면 이 힘든 것들을 치환해주는 거라고요.
그래서 (후배들 대상으로) 강연할 때마다 무슨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을 갖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걸 향해 나아갈 때 이 말을 항상 새겼으면 좋겠다고 말해요. ‘재밌는 일 한 가지와 싫어하는 열 가지는 한 세트다.’ 세상 살면서 모든 일이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싫어하는 열 가지를 도무지 하고 싶지 않아서 원하는 한 가지를 포기하는 경우도 흔하다. 그럼에도 한 가지를 지키기 위해 열 가지의 어려움을 해냈을 보희의 노력과 그 가치를 상상해보게 된다.
한 우물을 오래 파다 보면 남들보다 빠르게 메인 PD가 되고 싶은 마음이 들 법도 했다. 일을 위해 길게 보고, 배고픔을 감수할 줄 아는 보희는 서두르는 법이 없다.
“저는 그냥 때가 되면, 기회가 오면 하는 거지 라는 생각에 별로 조급함은 안 들었어요. 메인을 엄청 하고 싶다 이런 생각도 안 들었어요.
왜냐하면 어차피 메인이 돼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게 되지도 않더라고요(웃음). 여기저기 이해관계가 많다 보니 이것도 넣어주면 좋겠고, 이것도 해서 노출해주면 좋겠고, 이런 민원들이 많아요. 그래서 산으로 가게 되는 프로그램도 왕왕 봤고요. 메인이 그런 걸 잘 쳐낼 수 있는 어떤 내공이 생겼을 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좋은 기회에 메인을 하게 되는 게 중요하지, 빨리 메인을 하는 건 큰 의미가 없다고요.”
그래서일까. <히든트랙 2>를 단독 메인PD로 처음 맡게 되었을 때, 기쁘기보다는 너무 고독했다고 고백했다.
“학교에서 학생회장할 때도 느꼈던 거지만, 이 자리는 온리 원(only one)의 포지션이기 때문에 아무도 이 사람의 입장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잖아요.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메인이 빨리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 리더의 자리를 간다는 것 자체가 너무 쉽지가 않은 거고,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의견을 절충하고 조율하고 그러면서도 내 의견을 개진해 나가야 하고. 쉽지 않은 걸 너무 아니까 좀 엄두가 안 났던 것도 있었던 것 같아요.
생각보다 책임감은 더 무거웠고, 챙겨야 될 식구들이 많고. 내가 프로그램을 잘 해서 끌고 가야 이 사람들 밥줄이 안 끊기는 거니까요. 정신적인 피로도가 꽤 되죠.”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도 일만 하며 살 수는 없다. 쉴 땐 쉬고, 스트레스는 틈틈이 풀어야 좋아하는 그 일을 오래도록 할 수 있다. 보희는 스트레스 해소법을 세 가지나 갖고 있었다.
1) 틈틈이 긴장 풀어주기
“거울을 보고 무반주 댄스를 춰요. 최근에서야 지극히 동물적인 본능대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있었구나 알게 됐어요. 직장인들 번아웃 탈출 관련 강의에서 봤는데, 야생의 생태계에서 초식 동물이 육식 동물한테 쫓겨서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가까스로 잡아먹히는 상황을 피해요. 그러고 난 다음 초식 동물이 어떤 특정 행동을 하고 난 뒤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풀을 뜯어먹고 지낸다는 거예요. 그 행동이 뭐냐면 그냥 몸을 막 턴대요. 그게 긴장을 완화시키고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동물들의 본능이라더라고요.”
사실 보희는 대학시절 댄스동아리 활동을 하며 공연을 다녔을 정도로 춤에 일가견이 있다. 어쩐지 막춤에도 소울이 묻어날 것만 같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보고 싶을 정도다.
2) 몸이 약해지면 자연으로 떠나기
그렇게 평소에 잘 풀면서도 과로로 인해 이따금씩 병이 나기도 했다.
“그럴 때 마다 속세를 떠나서 자연으로 찾아가요. 캠핑이나 등산을 가고요. 계절을 충분히 느끼기 위한 활동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여름이면 충분히 여름스러운 곳에 가서 풍경들을 보기도 하고, 계절별로 피는 꽃들도 꼭 챙겨봐요. 꽃을 보면 가슴이 화사해지는 느낌을 실제로 느낀단 말이죠. 하늘, 구름도 엄청 좋아하고요. 여행 가서 일출, 일몰 스팟을 바꿔가면서 매일 보기도 해요.”
덕분에 보희의 사진첩에는 청명하고 아름다운 풍경들이 가득하다.
3) 사람 스트레스는 내 사람들로 극복하기
“(프로그램이 끝나고) 쉴 때는 보고 싶었던 사람들을 몰아서 만나는 경향이 있어요. 일을 하다 보면 사람들한테 거의 환멸을 느낄 때가 있거든요(웃음). 어떻게 이렇게 다 이기적이지?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모든 사람들을 미워할 수 없잖아요. 인류애를 찾기 위해 내 사람들한테 찾아가요.”
그럼에도 사람 때문에 고통스러운 날들도 있게 마련인데,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느낄 때, 이 사람이 나한테 왜 이러지? 라고 ‘나한테 왜’에 집중해서 생각을 많이 하잖아요.”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사람은 ‘모두한테’ 이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뭘 보면 되냐면 그냥 이 사람의 상황을 보면 돼요.
그냥 이렇게 좀 멀리 빠져서 한 번 줌아웃(zoom out)해서 보면 이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보이고, 이 사람이 밉지 않아요. 저 사람도 풀리는 게 없고, 일하는 것도 계속 힘들고 여러 가지로 수가 틀려있구나. 나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라 누구한테도 다 발길질하고 돌멩이를 던지고 있는 상황이구나. 이해를 하고 나면 나한테만 그러는 게 아닌 걸 알게 되고요. 내가 만약에 그런 입장이라고 한다면 막 안쓰럽기도 하고요. 밉다거나 꼴보기 싫고 그런 게 좀 덜하더라고요. (웃음).”
이런 너른 이해심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보희는 종교가 없다. 사회생활 16년차의 연륜이려나. 아니, 내가 아는 16년차 선배들이 다 이랬다면 나는 회사를 열심히 다니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고백하자면 나는 일하러 가서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 감정에 매몰돼버리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제대로 맞설 배짱도 멀리 떨어져 지켜보는 여유도 없어서 ‘도망치는 용기’를 내곤 했다.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해 그 상황에서 나를 빼내는 것이다.
반면 보희는 물러서지 않는다. 거리를 둘지언정 시간을 두고 지켜보고 충분히 기다린다.
“내 안에서 한 번 뭔가가 어긋났다고 해서 쉽게 포기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다 해봤는데도 안되겠다 하면 관계를 잘라내겠지만, 저는 ‘나도 정말 최선의 노력을 다 했나’ 이걸 생각해봐요. 항상 뭔가 최선을 다해보지 않고 그만두거나 했을 때 나한테 후회로 남아서 ‘더 해볼걸’ 이런 생각이 자꾸 드니까 그럴거면 그냥 해볼 수 있는 한까지는 그냥 해보자 주의인 것 같긴 해요.”
밈처럼 떠도는 ‘손절각’, ‘차단각’ 같은 단어들을 마주칠 때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콘텐츠 생산자로서 자주 목격되는 워딩과 사회 현상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고민한다.
“‘손절’, ‘차단’ 이런 말을 너무 쉽게 하는 분위기여서 고민이 좀 있어요. 물론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나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는 취지는 어느 정도 동의를 하지만, 그게 어느 정도 내가 마음이 단단해지고 하려면 부단히 싸워도 보고, 잘 화해도 해보고, 풀어도 보고, 어떻게든 해결해 나가면서 경험을 해봐야 되는데 그걸 다 경험하기 전에 손절이라는 방법을 취함으로써 이 과정을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더라고요.”
예전에 다음 웹툰을 보다가 인생 명언을 만난 적이 있다. 이보람 작가의 <퀴퀴한 일기>에서 인간관계와 육아에 관한 어려움을 토로하는 어느 이야기에 달린 댓글이었다.
“아이가 슬플까봐 실망할까봐 이런거에 너무 몰두하지 마세요. 실망할 기회를 주세요. 슬플 시간을 주세요. 인생 길어요. 그 슬픔을 이겨낸 시간을 더 크게 알아주시고 실망을 극복해낸 자녀의 용기를 칭찬해주세요. 다들 견디면서 잘 살아와놓고 왜 애들은 문디로 만들려고 그래요. 사람이잖아요. 사람은 다 견디고 복장터지면서도 다 웃으며 살아요.” (ID : dddtttttxxxxx, 작성일 : 22.10.21, 좋아요 588)
보희의 말처럼, 웹툰의 댓글처럼 인생은 길고 풍파는 끝없이 다가올 터다. 어른이 된 우리 자신에게도 실망하고, 슬플 기회도 충분히 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지나온 시간들을 떠올려보면, 다들 견디고 복장터지면서도 때때로 웃으며 살아왔으니까. 지금껏 해온 것처럼 다시 일어서는 경험을 반복하며 조금 더 단단해지고 더 자주 웃으면 되는거다.
계획이란 걸 잘 안 세우는 편이지만, 보희에게도 올해 해보고 싶은 것들이 있다.
도배기능사 자격증, 굴삭기 자격증, 버스같은 대형 운전면허 따기다. 이유도 너무나 보희답다.
“몸에 하나씩 각인시켜보려고요.
내가 해보지 못한 경험들을 해보고 싶어요. 그 때의 온도와 습도, 느낌 이런 것들이 사실 딱 해봐야지 아는 거니까. 해보고 맞는지 아닌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자격증 취득의 성패와 상관없이 언젠가는 도배, 굴삭기, 버스 운전을 하고 있을 보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보희는 경험의 가치를 잘 아는 사람이기에, 시도하고 알아가고 익히는 시간들을 몸에 차곡차곡 저장할 것이다. 경험을 통해 더욱 풍성해지는 삶의 맛을 아는 사람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