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RU Mar 01. 2024

나를 잘 알고 잘 쓰는, 나_유진

36세 프리랜서 한일 통번역가 김유진 (2024년 1월)


유진은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일본에서 다녔다. 한 마디로 일본어 네이티브 스피커(native speaker)다. 그런 그녀는 이 장점을 살려 한국에서 프리랜서 한-일 통번역가로 살고 있다. 내가 알고 지낸 유진은 늘 맑고 밝은 표정으로 상대를 향해 순정한 응원을 보내는 사람이다. 편리하게 말하자면 구김살없는 사람이까. 그래서인지 인터뷰 전까지만 해도 위의 첫 세 문장이 직선으로 쉽게, 편하게 연결되었으리라 짐작했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      


아주 어릴 때 아버지 직업때문에 일본으로 이민을 가게 됐다.


어머니는 유년시기의 유진과 오빠를 매년 겨울방학이면 한국의 할머니댁에 보내 한 달씩 머무르게 했다. 모국어를 잊지 않도록 형편이 좋지 않을 때에도 매년 빠짐없이 보냈다. 어머니의 의도와 달리 유진은 한국의 언어보다는 추억과 감상을 몸에 담았다. 유진은 “한국의 겨울, 그 차가운 느낌이 너무 좋았다”며 한국에 사는 친척들과 보낸 시간을 ‘너무 좋았다’고 거듭 말했다.      


아버지는 매주 한 번씩 남매를 나란히 앉혀두고 한국어를 가르치셨다.

“어릴 때는 ‘이거 왜 시키나, 쓰지도 않는데’ 하고 생각했었어. 정말 감사하지. 아빠가 그렇게 하셨어. 까먹고 있었네(웃음).” 인터뷰를 하며 유진은 부모님이 한국어를 놓지 않을 수 있게 해준 기억들을 떠올리며 새삼 감사해했다. 이런 부모님의 노력 덕에 유진은 한국을 여행지가 아닌 ‘내가 살아갈 땅’으로 여겼다.



   


낙천적인 경계인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 좋은 나머지 한국의 중학교에 입학을 자처하기도 했다.      


일본은 초등학교 때 아이들은 바깥에서 노는 분위기여서 공부를 해본 적이 없었지. 한국에 와보니 한국말도 서툴고, (한국 중학생들은) 학원을 다들 엄청 늦게까지 다니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도 학원을 계속 다니고 있더라고(웃음). 밤 11시까지 공부도 하고. 근데 언어가 안되니 하나도 따라가지 못했던 거지. 어린 나이다 보니까 엄마 아빠도 너무 보고 싶고. 내가 원해서 한국에 나오기는 했는데 너무 힘든거야. 한 학기 다니고 ‘여기는 아닌 것 같아’라고 다시 돌아갔지 (웃음).”     


유학을 가는 것도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되돌아가는 것은 더욱 쉽지 않았을 터였다. 누군가는 유학에 실패했다거나, 고국에 대해 부정적인 기억으로 남겨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중학교 1학년 1학기) 한 학기였지만 그때 한국말도 많이 배웠고, 그때 한국에 왔었기 때문에 다시 (한국으로) 대학교 왔을 때 그렇게 힘들지 않았던 것 같아. 무리해서 힘들게 한 학기를 다녔는데 정말 좋은 경험이었던 것 같아. … 비록 한국에서는 공부를 잘하지 못했지만 ‘공부를 해야 되는구나’ 이런 걸 느꼈던 것 같아. 그래서 일본에 돌아와서 공부를 좀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사립학교를 선택해서 갔지.”     


유진은 어떤 경험도 실패나 좌절로 남겨두지 않는다. 그 안에서 여러 면들을 펼쳐보고 그 중에 장점과 교훈에 더 집중하는 특유의 낙천성을 발휘한다.           





나를 잘 운용하는 사람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유진은 태어나서 공부하란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나는 놀란 나머지 “응? 그게 가능하다고?”라고 반문했지만,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물었다.      


일본의 학업 분위기는 학생 간 경쟁을 부추기기 보다는 개개인의 속도로 각자의 길을 가도록 두는 분위기였다. 유진이 한국 대학으로 진학하기로 결심하자, 일본 대학에도 입학증을 받아두는 게 어떻냐고 권하는 정도랄까. 부모님도 한국어 공부 외에는 스스로 하게 두셨다. 자기 자신을 괴롭히지도 않는다.


“주변의 기대가 있고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이 있으니까. 열심히까지는 아니고 적당히 공부했었던 것 같아. ‘대학 갈 수 있는 만큼만 하자’ 정도. 너무 높은 목표를 세우지도 않아.”


“무리하지 않아?”      


무리하지 않아. 절대(웃음). 욕심내지도 않아. 내가 딱히 원하지 않는 무언가를 다른 사람이 달성했을 때 대단하다고 여기긴 하지만, 나도 해내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어.

엄마가 자주 말씀하셨는데, 나는 ‘내가 중요한 사람’이어서 나를 힘들게 하는 것도 싫어하고, 내가 원하는 게 비교적 확실하기 때문에 그냥 그걸 하면 되는 사람이래. 어쨌든 원하는 건 확실한 편이었던 것 같아.”     


다른 사람과 관계없이 오롯이 나에게 집중해 나의 욕망과 능력을 파악하고, 실현 가능한 수준의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 사회는 이런 사람을 보며 ‘메타인지 능력이 높다’고 말한다. 게다가 유진은 성실하기까지 하다.


“나는 성실한 편인데. 그게 내가 원하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스스로 용납을 못하는 스타일이어서 성실했던 것 같아.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에 도달하기 위해서였지.”     


유진에게서 초조하거나 불안에 떠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밤새워 공부할 것 같은 불타는 열정이나 넘치는 에너지를 느낀 적도 없다. 실제로 학창시절에 벼락치기로 시험 공부를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계획 세우는 걸 좋아하고, 그걸 완벽하게 맞출 수는 없더라도 어쨌든 계획이 있는게 마음이 편해”      


실행력과 자기조절 능력은 자기인지와는 별개의 능력이다. 자기를 잘 알아도, 계획을 잘 세워도, 그 다음 스텝인 실천 단계로 넘어가기란 정말이지 쉽지 않다. 유진은 자신을 잘 일으켜 운용하는 사람인 셈이다.  


덧, ‘원하는 게 확실한’ 유진은 담임선생님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한국외대에 입학허가증을 받았고, 결국 일본 대학엔 지원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말할 용기를 심어준 ‘천사 엄마’ 


일본에서 살다 보니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는 날들도 있었다. 초등학교에서 김치(유진의 성은 김金)라고 불리거나, 한국인이 주는 급식은 안 받겠다는 식의 차별섞인 놀림을 당하기도 했다. 중학교에 올라서는 일본 특유의 왕따 돌림놀이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다행히 활기차고 씩씩했던 유진은 매번 기죽기보다 분노에 차서 부모님께 즉시 말씀드리곤 했다.


내가 괴롭힘 당했을 때 부모님은 크게 분노하시거나 격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으셨고, ‘원하면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리겠다’라고 하셔서 ‘응, 당장 말해줘!’ 라고 했던 기억이 나(웃음).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이야기를 잘 들어주셨던 것 같아.”      


중학생 때 왠지 모르게 “스스로 한국인 성향이 강하다고 생각했고, 한국이 더 맞을 거라고 생각해서” 중학교를 한국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도, 한 학기 만에 “난 일본인 성향이 꽤 강하다”고 여겨 일본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을 때도. “그래도 난 한국인이니까 한국에서 살겠다”며 한국 대학을 진학하겠다고 결심했을 때에도. 부모님은 유진의 결정을 존중해주셨다. 그리고 어떤 이야기를 해도 놀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고 차분히 들어주셨다. 덕분에 유진은 어떤 것도 털어놓는 딸이 될 수 있었다.      


우리 엄마가 되게 특이한 사람이야. 나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천사’라고 얘기하고 다닐 정도로 정말 선한 분이셔. 그리고 절대 비교하는 말을 하지 않으시고, 작은 것도 항상 칭찬해주시니까. 내가 부모님한테 인정받아야 되겠다는 생각은 안 해본 것 같아.”     


바람직한 양육법을 알면서도 실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왠지 유진의 메타인지능력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알 것 같았다.





최단경로가 아니어도 괜찮아


첫 사회생활은 교육그룹의 해외사업기획팀에서 시작했다. 생각보다 업무가 적성에 맞지 않았다. 아직 회사에서 일할 준비가 덜 되었다고 생각할 무렵 삼성전자에서 통번역 담당으로 일할 기회가 찾아왔다. 계약직이었지만 교육회사 정규직으로 일할 때보다도 처우가 좋았다.


“면접을 보는데 내가 준비한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어. 내가 의도하고 계획해서 지원하고 준비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닌데 운 좋게 길이 열린 듯한 느낌이었어. 그래서 어떻게 할지 고민을 좀 했는데 그때 아빠가 한 번 해보라고 하셨지. 만약에 적성에 잘 맞으면 나중에 대학원을 가도 괜찮겠다고도 하시고. 부모님이 지지를 해주신 것도 있고, 한 번 해보자 해서 도전했던 것도 같아. 막상 해보니까 너무 재밌었어.”      


통번역 일은 이전에 회사에서 하던 것과 확연히 달랐다. 시장조사를 하고 기획안을 작성해야 할 때마다 막막함과 부담이 앞선 반면, 통번역은 애쓰지 않아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분명 새로운 일이었지만 낯설지 않았다.     

어린 시절 겨울마다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주말마다 아버지와 한국어 공부를 하며, 대학에서 일본어와 영어를 전공하며 이중 삼중으로 언어가 체화된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삼성전자에 있을 때) 영업팀에 계셨던 분이 통대(통번역대학원) 출신이셨는데, 그분이 통역하는 걸 들었는데 너무 잘하시는 거야. 나는 여태 내 스타일대로 통역을 했었는데, 제대로 교육을 받으면 어느 정도 이상의 퀄리티는 보장이 되겠구나 생각이 들었어. 내 진로에 대한 확신도 그때 생겼고, 이걸 하려면 대학원을 무조건 나와야겠구나 해서 통대에 도전을 하게 됐지.


2년 계약기간을 마치고 서른을 앞둔 유진은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공부하는 정통법을 택했다. 일본어 네이티브임에도 누구 못지않게 성실히 임했던 유진은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한 데 이어 동기 중 졸업시험을 통과한 단 두 명에 들었다. 졸업식에서 교수님은 “열심히 안 해도 될 학생이, 정말 열심히 임해서 보기 좋았다”라고 말씀하실 정도였다.





번역은 어렵지만 웹툰은 좋으니까


통대를 졸업한 동기들 대부분이 회사의 통번역 담당으로 입사할 때, 유진은 프리랜서의 길을 택했다. 다양한 분야를 접할 기회가 열려있고, 무엇보다 자유롭게 일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통번역 업계에서만 삼성전자 2년, 통대 2년, 그리고 프리랜서 6년차에 접어들었다. 현재는 카카오페이지 웹툰 번역과 KBS월드뉴스에서 일본어 아나운서 일을 고정으로 맡고, 그 외 다양한 통역을 병행하고 있다.


유진은 일본어 네이티브 스피커라는 강점이 있기에 통역은 한(韓)↔일(日) 양방향으로 동시 진행하고, 번역은 한(韓)→일(日) 일방향으로 주로 담당한다. 통역을 메인 업무로 가져가고 싶지만, 프리랜서 초반에 통역 일이 많지 않았던 데다 코로나 시국에는 더더욱 통역 일이 줄었다. “먹고 살기 위해” 통역과 번역의 밸런스를 맞춰야 했다. 그즈음 친구의 제안으로 카카오 웹툰 번역을 시작하게 됐다.      


“번역을 원래 싫어했는데도 불구하고 웹툰은 재밌어서 지금까지도 계속하고 있어. 웹툰 외에 번역은 너무 힘들어서(웃음) 이제는 웹툰 이외에는 안 하고 있거든.”     


번역이 싫은 이유를 묻자 “나는 글쓰는 게 훨씬 어렵다고 생각하거든. 말은 휘리릭 넘어갈 수 있는데 글은 남잖아.” 라고 답했다. 말하기와 쓰기 중 무엇이 더 어려운지는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유진은 활자로 기록되는 것의 무게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번역을 한다면 익숙한 분야여야 할텐데, 범생이(?)같은 유진이 웹툰을 번역한다니 의외였다.     


일단 중고등학교 때 만화를 많이 봤었던 것도 있고 만화를 좀 좋아했던 것 같아. 그리고 웹툰 번역은 있는 내용을 그대로 기계처럼 번역하는 게 아니라 내가 어느 정도 창작을 할 수가 있어서 그런 점이 정말 재밌기도 하고. 콘텐츠 자체가 재밌지. 일 자체가 재미있어.”     


은유의 한국 시 번역가 인터뷰 산문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에서 한-영 시 번역가 안톤 허는 번역과 글쓰기의 차이에 대해 “둘 다 무의식에서 나오는 창조 행위”라고 말했다.

“저는 원문을 읽고 기다려요. 그러다 보면 영어가 들려요. 그걸 받아 적어요. 그럼 다음 문장을 읽고 기다리면 또 영어가 들려요. 그걸 또 받아적어요. 그렇게 번역을 하거든요. 저는 제 무의식의 비서예요. 무의식이 번역을 하죠. 창작도 그렇더라고요”(p.81)      


시와 마찬가지로 웹툰에 등장하는 문장들이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담고 있기 때문에 기계적 번역을 넘어서게 된다. 예컨대 한국에서 감탄사 “헐”을 일본어로 소리만 가져가 “헐”로 쓰일 수 없는 것처럼 상황과 맥락에 맞는 적확한 일본어 표현으로 변주되는 것이다. 웹툰의 흥미진진한 내용만큼이나 번역가 고유의 창작 능력을 발휘할 수 있으니 ‘번역을 싫어’하지만 ‘일 자체가 재미있다’는 말도 이해가 되었다.           


▲ 유진이 번역한 웹툰이 일본 현지에 만화책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왼쪽은 한국에서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한 <사내맞선>, 오른쪽은 <악당의 아빠를 꼬셔라>




통역이 쉽지만도 않아


프리랜서로서 통역 일을 하게 되면 매번 새로운 분야를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곧 어려움이 되기도 한다.

정-말 다양한 분야의 일을 받고 있고, 그래서 너-무 힘들기도 하다(웃음)”며 유진은 스스로의 선택에 따른 힘듦을 설명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통역사가 필요한 자리라는 게 일상적인 내용이 아니라 전문적인 협상이나 발표를 하기 위한 자리잖아. 그 자리에 있는 전문가들이 비전문가인 내 입을 통해 의사소통을 해야 되는 상황이다 보니 정말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 한순간에 내가 바보가 될 수 있고. 그래서 준비하는 과정이 진짜 고통스러운 것 같아.


통역 의뢰를 받으면 미리 자료를 받아 새롭게 공부를 시작한다. 한 분야에서, 한 회사에서 20년 가까이 일한다면 익숙해지려나. 유진이 택한 길은 영 안주할 수가 없다.


남편 말로는 통역 전날에 자료를 받으면 (내가) 계속 혼잣말로 씩씩거리면서 자료를 본대(웃음). 그 다음날 통역 다녀오면 기분이 완전 좋아져 있고(웃음).”     


어려움을 말할 때 유진의 큰 눈이 그렁그렁해 보였건만, 금새 씩씩거리며 성실하게(중요!) 임하고 있을 모습을 상상하니 어쩐지 웃음이 흘러나왔다.                


발표자와 나란히 서서 순차통역*을 하는 유진(왼쪽). KBS월드뉴스 녹음 현장(오른쪽)


유진이 담당한 한-일 회의 현장(왼쪽)과 동시통역*이 진행되는 통역 부스(오른쪽)


*순차통역 : 발화자가 한 마디/한 단락을 말하고 나서 통역이 진행됨.

*동시통역 : 발화자가 말하는 동시에 통역이 진행됨. 회의장 내 별도로 마련된 부스에서 통역 장비를 갖추고 이뤄짐.



일의 ‘기쁨’과 ‘슬픔’은 같은 말일까     


통대 동기들과 달리 유진 홀로 프리랜서의 길을 가는 것이 불안한 때도 있었다. 하지만 당초 그렸던 목표를 향해 그 시간들을 버티고 나니 후회는 없다.      


장점은 일단 시간이 자유로워. 인간 관계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고. 쓸데없는 야근도 할 필요가 없고. 내가 딱 일한 만큼 보상을 받을 수 있으니까 그것도 너무 좋은 것 같아.”     


단점은 장점 뒤에 딱 들러붙어 있다.      


어려운 점도 많긴 하지. 일단 장점이 단점이야. 시간이 여유롭다는 거. 근데 반대로 바쁠 때는 퇴근이라는 게 없고 주말에도 일해야 되고. 새로운 분야를 접할 수 있다는 거는 큰 장점인 줄 알았는데 (계속 공부해야 한다는 점에서) 사실 엄청난 단점이기도 하지.”     


일한 만큼 확실한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나의 노동가치를 환산하고 협상할 줄 알아야 한다.      


최근 유퀴즈에 출연한 최민식 배우가 소속사 없이 활동 중임을 밝혔다. MC인 조세호는 그럼 영화 출연료 협상도 직접 하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고, “직접 한다”는 최민식의 대답에 유재석과 조세호 모두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유재석 역시 유퀴즈 출연료도 작가와 직접 얘기 나눴느냐고 물으며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한국 정서상 돈에 대해 직접 언급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직장 생활을 돌아보면 대부분 연단위로 연봉협상(이라 쓰고 통보라 읽는다)을 진행하게 되는데, 주변을 살펴봐도 이직이 아니고서야 말 그대로 ‘협상’을 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프리랜서는 어떨지 궁금했다.      


나도 사실 돈 얘기하는 걸 잘하는 편은 아니어서 처음에는 민망했지. 어렵기도 했고 지금도 그렇게 쉽지는 않아. … 내가 가지고 있는 장점들을 확실하게 제대로 어필하고, 클라이언트가 그걸 납득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면 내가 제시하는 금액도 납득을 하는 것 같아.”      


통번역 업계에 적정 요율에 대한 가이드가 있다고도 했다. 물론 모두가 전적으로 따르는 것은 아니고, 자신의 경력과 능력에 따라 협상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꽤 합리적인 것 같았다.                





나의 행복마저 잘 아는 사람      


통대를 다니면서 난생 처음 ‘최고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고백했다.      


“계속 욕심이 없다가 통번역 일을 하면서 이 업계에서 최고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처음으로 생긴 것 같아. 근데 사실 이 업계도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거든. 그래서 처음으로 남들과 비교하면서 내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좌절한 것 같아. 이 일을 하면서 그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남을 질투하는 마음이 생긴거지. … 인스타가 문제야(웃음). 거기에 홍보글도 많이 올라오고 다른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볼 수 있으니까. 욕심 때문에 오히려 마음이 불편해졌던 것 같아.”     


근래에야 질투와 좌절감을 느끼다니 나로선 의아하면서 동시에 부러웠다. 경쟁없는 세상에서 30년 넘게 살 수 있었다니!  흔히 말하는 ‘월 천(1,000)’을 벌며, 욕심껏 일한 적도 있었다.       


옛날에 처음 천 만원 버는 경험했을 때는 너무 신나지 뭐야. 나 이렇게 벌 수 있는 사람이었어? 이러면서 좋았는데(웃음) 삶의 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더라고.”      


질투와 욕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무리하지 않고, 너무 욕심내지 않”는다. 일한 만큼 응당한 보상을 받는 것만으로 감사히 여긴다.      


최근에는 결혼도 했으니까 가정이랑 일이랑 밸런스를 잘 맞춰가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해. 내가 추구하는 방향은 일류 통역사 이런 게 전혀 아닌 것 같고, 이것도 나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이고, 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하지. 너무 내 삶의 모든 것을 차지하지 않고, 나의 중요한 것들을 침범하지 않게끔 밸런스를 유지하면서 하고 싶은 것 같아.”     


요즘의 고민은 이전만큼 일이 설레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만큼 일에 익숙해졌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럴 때일수록 성실함을 무기로 가진 자들은 멈추지 않고 제 일을 해낸다. 유진은 일이 있음에 감사하며 그렇게 현재를 지나가고 있다. 크게 한 스텝 뛰어올라 경지에 이른 베테랑들이 그러하듯이.      





     

언젠가 유진이 ‘작지만 단단하고 깨끗한 그릇’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에 “보통 ‘큰 그릇’이 되고 싶다고 하지 않아?”라고 받아치며 짓궂게 웃었던 장면이 기억난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이제야 유진이 ‘작지만’ 이라고 말한 이유도, 그리고 ‘단단하고, 깨끗한’ 그릇이 되기 위해 걸어온 길들도 훨씬 선명하게 이해되었다.


유진의 남편은 (유진과 달리) 요리를 좋아하고 살림에 재능이 있는 가정적인 사람이다. (물론 본업에도 충실하다.) 유진은 남편이 물심양면으로 보필해주어 온전히 일에 집중할 수 있다면서 만족스러운 직업생활의 공을 남편에게 돌렸다. 덕분에 통번역 필드에서 김유진이라는 ‘작지만 단단하고 깨끗한’ 인재를 오래도록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남편분, 지금처럼 오래 오래 힘내주시길!

이 글을 통해 유진 부부에게 응원의 마음을 보내본다.

이전 04화 주임에서 주인이 되는 길_선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