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피에르 롱사르
나는 뼈와 해골만 있네.
앙상하고 힘없고 나약한 나는
가혹한 죽음이 엄습했음을 느끼네.
나는 떨리는 두려움이 아니고는 감히 나의 팔을 쳐다보지 못한다네.
즐거운 태양이여 안녕, 나의 눈은 메워졌네.
나의 몸은 모든 것이 해체되는 그곳으로 내려가 사라진다네.
- 피에르 롱사르의 시 中 -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시대, 경제공황 등 스펙터클하고도 글로벌한 이슈들이 전세계를 강타했던 20세기는 수 많은 변혁 덕분인지 혁신적이고 독창적인 많은 예술가를 탄생시켰다. 말도 안되게 컴퓨터와 핸드폰이 등장했고, 해외여행이 평범해졌다. 1900년에만 해도 한복입고 초가집에서 살던 사람들이 100년이 흘러 1999년에는 아파트에서 보일러켜고 살았다! 20세기는 그야말로 격변의 시기였다. 그럼에도 죽음은 변함이 없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땅에 묻히나 한줌의 재로 변하나 인간은 100년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인간은 죽는다.
이 똑같은 주제는 고대부터 어느 시대, 장소를 막론하고 많은 예술가들의 관심사였다. 그 중 데미안 허스트는 이 읍습하고 어둡고 은밀한 주제인 '죽음'을 그야말로 말도 안되게 표현했다! 어떻게? 해골에 8,601개의 다이아몬드를 쳐박아서 말이다!
죽음이란 공포의 대상이다. 모두가 바라지 않는 끝이다. 때문에 보통 죽음이라는 주제는 어둡고 우울하며 서글프고 안타깝게 표현된다. 간혹 성인 또는 순교자의 죽음을 우아하고 고귀하게 표현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그렇지 않다. 메멘토 모리의 정석과도 같은 필립드 샹페뉴의 <바스티스 정물>이나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에서 해골은 어둡고 섬뜩하며 다소 무섭게 표현되었다. 죽은 자의 삶이 얼마나 가치있었는지 그런거는 모른다. 엄청난 선행을 베푼사람이건 나쁜 놈이건 해골은 무서운 모습의 해골이며, 모두 죽음의 상징일 뿐이다.
그러나 데미안 허스트는 이를 완전히 뒤바꿨다. 18세기 유럽인의 실제 해골에 다이아몬드를 촘촘히 박았더니 그 어떤 장식품보다도 빛나고 가치가 있는 940억의 초고가 예술작품이 되었다. 그야말로 해골의 대변신이다.
그러나 아무리 화려한 다이아몬드로 치장하여 몇백억이 넘는 값어치의 작품이 되었을지라도 이 해골의 주인은 결코 살아돌아 올 수 없다. 그것이 죽음이다. 어떤 비싼 값으로도 치를 수 없는 인간의 숙명. 죽음이란 이처럼 화려하게 포장을 한다고 해도 의미가 없다.
화려하게 장식한 죽음의 상징물은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모두가 죽는다는 것을. 죽은 뒤의 화려함은 무용지물임을. 그러나 인간이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니 나약해지고 낙담하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누구나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 끝을 생각하며 지금 이 현실을 - 이 현재를 더 의미있고 치열하게 살아가야 함을 말한다. 유한한 삶에 슬퍼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한정된 시간을 어찌 보낼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더욱 열정적으로 현실을 살아갈 것을 촉구하는 것 - 그것이 죽음의 진정한 가치다.
이를 '메멘토 모리'라 한다. 메멘토 모리는'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뜻의 라틴어로, 로마시대에 원정에서 승리를 하고 돌아온 장군이 시가 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외치게 하는 말이었다. 이는 단순히 승전보를 알리기 위함이 아니라 '승리에 도취하지 말고 겸손하라, 너도 언젠가는 죽으리니 자만하지 말라'라는 의미의 구호였다. 프랑스 시인 피에르는 죽음을 앞둔 노년의 한 때, 가혹한 죽음에 두려움을 느끼며 시를 남겼지만, 그 또한 죽음이 있었기에 삶을 의미있고 가치있게 살아 시인으로써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죽으면 빛나는 태양도 볼 수 없기에 죽음이 다가오는 그 시점까지도 그는 살아냈다.
누구나 그러하다. 누구나 죽음을 앞둔 유한한 삶을 살고 있기에, 더욱 간절하게 현재를 살아내고 있다. 화려한 해골의 다이아몬드 뒤에 가려진 죽은 자, 그의 삶은 그 어떤 귀금속을 덧발라도 돌아올 수 없는 것임을 알기에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지금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러니 카프페 디엠 -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라.
꽃이 영원히 피어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더욱 아름답게 느낀다.
- 데미안 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