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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아 Sep 11. 2024

그날의 밤공기

03 겨울과 인옥


 유난히 캐모마일차 주문이 많은 한 주였다. 아마도 그 여자 때문일 것이었다. 매일 마감 때만 되면 문을 열고 들어와 신경 쓰이게 하고 가는 사람.     


 온종일 손님이 많았던 탓에 일찍 마감을 하고, 문을 닫으려던 그 순간 한 손님이 찾아왔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여자는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카운터에 현금을 올려두고는 바로 구석진 자리로 가 앉았다. 준우는 난처해졌다. 이미 기계를 정리한 탓에 커피를 내릴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이 상황을 안내해야 했지만, 그녀는 이미 의자에 앉자마자 테이블에 엎드린 상태였다. 긴 머리로 온몸을 감싸고 있던 그녀에게 준우가 조용히 다가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저, 혹시… 지금 기계를 마감해서 만들 수 있는 종류가 차 뿐인데, 죄송하지만 허브티로 대체해 드려도 될까요?”

 대신 그녀가 건넨 돈은 정중히 돌려주는 준우였다. 여자는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어깨를 들썩였다. 이내 준우가 그녀의 테이블 위로 캐모마일차 한 잔을 건넸을 때, 그제야 그녀는 퉁퉁 부은 눈으로 준우를 쳐다보았다.     


 “왜 이렇게 캐모마일차를 많이 주문하셨어요?”

 오늘도 발주서를 넣는 준우를 옆에서 곁눈질로 보던 가을이 물었다. 여자는 그 뒤로 밤늦게 올 때마다 커피 대신 캐모마일차를 시키고는 같은 자리에 앉아있었다. 어느 날은 정신분석학에 관한 전공서적을 공부하기도 했고, 우울증에 관한 책을 읽기도 했으며, 가끔은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다 카페를 나서기도 했다.  

    

 너무도 서럽게 울던 그녀에게 준우가 손수건 한 장을 건네준 날이 있었다.

 “… 실례했습니다.”

 그날은 다 마신 찻잔과 함께 똑같은 인사를 건넨 뒤, 카페를 나서는 그녀에게서 준우가 시선을 떼지 못한 날이었다.     


*


 “주임님, 소개팅하실래요?”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 겨울이 무음으로 돼있던 핸드폰을 이내 진동으로 풀어두었다. 함께 퇴근한 유리가 또다시 겨울에게 물었다. 이제는 대답하기도 지쳤다는 표정으로 거절하는 겨울의 말에 늘 그렇듯 유리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대체 왜 주임님은 남자를 안 만나는 거예요? 얼굴 예쁘지, 능력 좋지, 뭐 하나 빠질 게 없는데!”

 유리가 아쉬움 가득한 얼굴을 한 채 뒤돌아 걸어갔다.      


 유리를 보낸 뒤, 겨울은 정류장 의자에 앉아 두통약을 챙겼다. 아직 버스가 도착하려면 꽤나 많은 시간이 걸릴 터였다. 손바닥에 올린 알약 더미를 보는 겨울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33살에 매일 약을 챙겨 먹어야 하는 신세라니. 겨울이 손바닥을 털어 알약을 입안에 들이부었다. 그런 겨울의 패딩 주머니에서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아니나 다를까 인옥이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 자신을 못살게 구는 사람. 타이밍은 기가 막히게 알아서, 꼭 약을 먹고 힘들 때만 괴롭히는 대단한 사람. 일을 보기 전에는 꼭 휴대폰을 무음으로 해두는 습관이 생겨버린 것도 다 인옥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해 핸드폰이 울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런 겨울을 주변 사람들도 이상하게 여길 터였다. 


 겨울이 잔뜩 인상을 쓴 채로, 날카롭게 전화를 받았다.

 “왜 이렇게 전화가 안돼? 상철이 돈 보내줘야 돼. 돈 보내라고 난리다, 얘. 안보내면 나와서 이모 막 때리고 그런다니까!”

 아니나 다를까 인옥은 전화를 받자마자 알 수 없는 말들을 횡설수설하며 길게 늘어뜨려놓았다. 듣다 못한 겨울이 끝내 소리쳤다. 다들 나한테 왜 그러냐고, 내가 뭘 잘못한 거냐고. 겨울의 앞으로 기다리던 버스가 도착했지만, 그녀는 탈 수가 없었다. 이미 흘러버린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으니까.     


 “이번엔 또 어디 다니는 사람인데?”

 유리는 최근 소개팅으로 만난 다섯 번째 남자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았다. 조만간 그 남자와 잘 안 됐다며 울고불고할 게 뻔했다. 사람의 외모를 보지 말고, 인성과 성격을 보라는 겨울에게 유리는 늘 검지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주임님이 뭘 몰라서 그래요. 사랑 없이는 살 수 있어도 돈 없이는 못 사는 게 사람이라고요-”

 유리는 겨울이 일만 하다가 젊은 시절을 다 보내겠다며, 언제든지 소개팅할 마음이 생기면 얘기하라고 당부했다. 겨울은 그저 평범한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란 유리가 부러웠다. 아무도 신경 쓸 일 없이 오롯이 제 인생, 자신만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미래가 불안이 아닌 희망일 수 있다는 것이.     


 인옥에게 돈을 부치고 난 겨울이 불안함에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 돈을 가지고 인옥은 또다시 상철의 면회를 가 전해줄 터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겨울은 충동적으로 내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처럼 나도 그냥 모든 걸 내버려 둔 채 무책임하게 사라져 버릴까, 아니면 아무도 모르게 죽어버릴까. 자신을 힘들 게 하는 모든 걸 다 끊어내고 싶었다. 현실이 꿈이라면 악몽에서 언제쯤 깨어날 수 있을까,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아무런 계획도 하고 싶지 않은 겨울이었다.

 그녀가 소개팅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처음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을 때 앞으로 자신의 인생은 꽃길만 펼쳐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돈을 벌고, 연애를 하고, 어쩌면 새로운 가정까지 만들 수도 있겠다는 기대는 결국 자신의 망상에 불과했다. 그녀에게 인생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다.    

 

 겨울이 하차 벨을 눌렀다. 어디라도 내려 콧바람을 쐬어야만 했다. 마냥 길을 걷다 보니 한 가게에 발길이 닿았다. 동네에서 너무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유일한 카페. 처음 방문하던 날, 이상하게 마음이 안정되던 곳이었다.     


*     


 오늘도 사장으로 보이는 남자 혼자 매장을 지키고 있었다. 너무 힘들어 울고 있던 내게 손수건을 건네주었던 사람. 늘 그렇듯 캐모마일차를 시키고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겨울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왜 눈물은 한 번 흐르면 주체할 수 없는 걸까…. 오늘도 창피함을 무릅쓰고 고개를 푹 숙인 채 겨울은 울어버렸다. 그리고 빨개진 눈으로 얼굴을 들었을 때 그녀의 앞에는 늘 따뜻한 연기가 나는 캐모마일차가 올려져 있었다. 카운터에 선 남자는 정말로 바빠서인지, 겨울을 배려해서인지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겨울은 늘 한참을 그렇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편히 울다가 카페를 나서곤 했다.     

*


 주민센터에 가까워질수록 멀리서 누군가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안 그래도 꼬여있던 인생을 더 엉망으로 만들게 한 장본인, 교섭이었다. 여기는 왜 또 온 건지, 당황한 겨울이 걸음걸이를 멈춰버렸다. 그대로 뒤를 돌아 공터로 향하는 겨울의 뒤를 교섭이 쫓아갔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안 찾아온다고 했잖아요!”

 겨울이 소리쳤다. 안 그래도 마음을 졸이고 있던 겨울에게 근처에 콧바람 쐬러 나왔다가 들렀다며 안심시키는 교섭이었다. 오랜만에 본 그의 안색은 좋아져 있었다. 자신과는 달리. 그가 비밀스러운 얘기를 전하려는 듯 겨울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교섭은 얼마 전 상철이 절도 및 폭행치사로 재수감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도박에 빠져 망치로 사람의 머리를 때리고, 타인의 차를 부수다 못해 석방될 때마다 온갖 새로운 방법으로 인옥을 폭행했다는 것이었다. 몇 번이나 이웃 주민들로부터 가정폭력으로 신고가 들어갔지만 그때마다 겁에 질린 인옥은 아무 일도 없다며 상철을 보호했다. 정부에서 인옥의 이름으로 나오는 지원금도 모두 상철의 몫이었다. 그랬기에 인옥은 늘 배고픔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고, 최근에는 정신없이 동네를 배회하다 인근 상인에게 발견되어 기적적으로 단칸방을 구할 수 있게 된 인옥이었다.

 교섭이 어떻게 모든 소식을 알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겨울은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그가 인옥의 유일한 보호자였다는 것을. 얼른 들어가 봐야 한다는 교섭에게 겨울은 다시 한번 당부의 말을 전했다. 

 “저희 여기 산다는 거, 진짜 이모한테 말하시면 안 돼요. 아셨죠?”

 “아이! 걱정 말아-”

 교섭이 걱정은 붙들어 매라며 큰소리친 채, 걸음을 재촉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다시 주민센터 문을 여는 겨울이었다.     


*     


 “저기요!”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겨울의 뒤를 누군가 불러 세웠다. 카페 사장이었다. 뒤돌아 그를 쳐다보는 겨울에게 준우가 숨이 차는 듯 헐떡이며 다가왔다. 혹시 뭘 두고 온 걸까, 자신의 주머니를 뒤지는 겨울에게 준우가 겨우 말을 이었다.

 “… 드셔도 돼요.”

 “네?”

 “내일부터는 커피 드실 수 있게 기다리겠다고요.”

 그의 말에 겨울의 손이 멈춰버렸다. 차가운 밤공기가 어느새 둘의 기온으로 높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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