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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훈 Apr 22. 2022

[M :신과 악마의 내기] #8. 길

무언가 말할 틈도 없이 하린의 입술에 율의 입술이 포개어졌다. 당황한 나머지 율을 밀어내려던 하린의 팔이 서서히 율의 허리를 감쌌다. 율 역시 자신의 손으로 하린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 안았다. 눈을 감고 입술을 맞대던 하린의 몸이 살짝 떨려오는 게 느껴졌다. 곧 하린이 참았던 숨을 짧게 내뱉었다. 율은 그런 하린을 말없이 쳐다보다 다시 입술을 맞대고는 서서히 하린의 옷가지를 벗겨나가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옷가지를 벗기던 조금 전의 행동과는 다르게 율은 하린을 거칠게 벽으로 밀어붙였다. 하린의 짧은 신음이 율을 더욱 흥분시켰다. 율의 손이 하린의 가슴을 강하게 부여잡았다. 그와 동시에 율은 하린의 입술에서 목으로, 목에서 가슴으로 점점 핥아나갔다. 율의 뜨거운 입김이 하린의 몸 아래로 내려갈수록 하린의 신음소리는 커져갔다. 곧 율이 하린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하린도 기다렸다는 듯 율과의 거리를 가깝게 밀착시켰다. 율과 하린이 서로의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다시금 서로의 모든 것을 가지게 된 밤이 지나고 새벽이 찾아왔다. 언제나 같은 시간에 마주하는 새벽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어스름한 새벽빛이 율의 눈에 비쳤다. 그리고 그 옆으로 그토록 그리던 자신의 연인 ‘하린’이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얼마나 바랐던가. 백 년을 넘는 시간 동안 오직 하린을 생각하며 버텨왔다. 볼 수 있었지만, 애써 욕심을 억누르기도 했고, 모른 척 하린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이제 다시 율의 옆에 누워있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상황에 율은 한 손으로 하린의 머리칼을 쓸었다. 부드러운 감촉이 율의 손으로 전해졌다. 꿈만 같은 상황에 율은 한참을 그렇게 하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린이 눈을 떴을 때 어디에도 율은 없었다. 매일 잠을 자고 일어나는 익숙한 공간. 꿈이라도 꾼 것일까. 여러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애써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방 문을 열고 나갔다. 하지만 그곳엔 익숙한 거실이 아닌 웬 카페가 있었다. 알 수 없는 상황에 놀라 제자리에 얼어있던 하린의 귀에 계단을 타고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하린은 본능적으로 몸을 돌리며 소리가 나는 쪽을 경계했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나타난 것은 율이었다. 순간 안심이 되어서인지 하린은 깊은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다시 율을 쳐다봤다. 꿈이 아니었다. 죽으면 만날 수 있을까. 그렇게만 생각하고 그리워했던 율이 다시 하린의 눈에 비쳤다. 함께 밤을 보냈지만, 다시 눈에 눈물이 고였다. 율은 그런 하린을 안아주다 곧 말을 건넸다.

“일어났어? 커피 내려왔어. 이제 아침에 커피를 안 마시면 좀 허전해서.”

율의 뒤편에 방금 내린 커피와 갓 구운 듯한 빵이 함께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나 방금까지 내 방에 있었는데.”

“그게, 설명하자면 좀 길어. 일단 커피부터 마셔.”

애써 대답을 피하는 율의 모습이 하린의 눈에는 모두 보였다. 하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율이 2년 만에 다시 나타난 것도,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도, 쉽게 설명할 일은 분명 아니었다. 그저 꿈이라도 좋으니, 이 꿈이 깨지 않기만 바랄 뿐이었다.           

하린과 거리를 두는 것이 실패했다면, 오히려 가장 가까운 곳에 그녀를 둘 필요가 있었다. 그 어떤 악마도 그녀를 건드릴 수 없도록 낮에도, 밤에도 항상 그녀 옆에서 그녀를 지켜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선 하린이 율의 카페에서 일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하린은 예전부터 그리 쉬운 성격은 아니었다. 율의 예상대로 하린은 율의 제안을 매몰차게 거절했다. 일부러 율에게 손을 벌리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율 역시 그 정도로 포기할 성격은 아니었다. 그 길로 하린이 일하는 카페로 찾아갔다. 유니폼을 입고 손님을 응대하고 있는 하린을 보며 천천히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오래전 그랬듯, 그녀의 아름다움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머리를 뒤로 묶은 모습이 여전히 수수하고 아름다웠다. 율의 얼굴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녁에 보자던 율이 지금 하린의 눈앞에 있었으니까. 놀라 멍하니 율을 쳐다보던 하린에게 율이 새침하게 말을 건넸다.

“주문 안 받나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는 듯 포스기를 만지며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물을 것이 많았지만 둘만 있는 공간이 아니었기에 차마 묻지 못했다. 하린은 애써 처음 본 사람인 척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어떤 걸로 드릴까요?”

“일 언제 끝나요?”

“네?”

“일 언제 끝나냐고요. 할 말이 있어서.”

“늦게 끝나요”

“끝나고 잠깐 봐요”

“주문 안 하실 거면 다른 손님 주문받겠습니다.”

하린이 목청을 높여 기다리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율은 다급한 목소리로 하린의 말에 끼어들었다.

“할 건데! 주문!”

순간 카페에 많은 사람들이 율을 쳐다봤다. 그만큼 큰 목소리였다. 손님들이 수군대며 킥킥대고 웃기 시작했다. 손님뿐 아니었다. 율에게 딱딱하게 굴던 하린마저 피식하고 미소를 내보였다. 다행히 율은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재빨리 미소를 집어넣은 하린이 계속해서 주문을 받았다.

“어떤 걸로 드릴까요?”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드시고 가시나요?”

“네.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들으라는 것처럼 한 말이었지만, 정작 하린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율의 카드를 영수증과 함께 돌려주었다. 실망하고 자리에 와서 앉은 율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영수증에는 익숙한 글씨체로 무언가 쓰여있었다.

‘9시에 끝나’          

“싫어”

하린의 당찬 대답이 율의 심장에 꽂혔다. 심장이 쿵하고 땅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거절당한 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아 하린의 직장에 찾아와 같이 일해볼 생각이 없느냐며 던지는 제안이었으니까.

“월급도, 복리후생도 지금 직장의 두배”

“그래도 싫어.”

“아 진짜로 내가 필요해서 그런 거라니까!”

“카페에 손님 안 오던데?”

“아.. 아니 그건 그날만 그런 거고. 손님 안 와도 할 게 많아!”

“그래도 싫어.”

하린의 성격만큼이나 시원시원한 대답이었다. 율이 살아있을 때도 그랬다. 돈보다는 자신의 신념이 중요했고, 가끔은 빠른 길이 아닌 느린 길로 돌아가는 하린이었다. 하린에게는 돈보다 지금 속한 직장에서의 책임이 중요했다. 그런 하린의 여전한 모습에 자신의 제안이 거절당한 건 까맣게 잊은 채 율 자신도 모르는 새 웃음이 났다. 그런 율을 하린은 이상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언제든 생각 바뀌면 말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어느 정도 포기한 듯 보이는 율의 모습에 하린은 안도감과 함께 알 수 없는 후회를 느꼈다.          

하린이 그렇게 대답했다고 한들 율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살아있을 때도 그랬다. 하린도 한 고집했지만 율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으니까. 율의 집에 살면서 일을 하겠다는 하린의 고집을 꺾은 것도 결국 율이었다. 매일을 하린의 카페로 출근했다. 한 번 가면 일어날 생각도 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앉아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을 넘기자 이미 율은 카페에서 비공식적으로 하린의 남자 친구 정도 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럼에도 하린은 자신의 고집을 꺽지 않았다. 직장에서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매일을 율과 함께 시간을 보냈지만, 무턱대고 자신의 직장을 옮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매일같이 반복되는 지루한 자신의 일상에 율이 들어온 것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가끔은 바보 같은 율의 행동에 웃기도 하고, 매일 같은 시간에 찾아오는 율을 기다리기도 했다. 하린 자신도 모르는 새 율이 그녀의 삶으로 서서히 들어오고 있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찾아오던 율이 오늘은 카페를 찾지 않았다. 그동안 밀린 업무들도 있었고, 북쪽의 귀신이 사람을 홀려 죽게 만들고 자취를 감추는 바람에 며칠 동안 북쪽을 수색해야 할 판이었다. 하린을 혼자 두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지금껏 아무 일도 없었고, 하린 때문에 자신의 일을 소홀히 한다면 대천사의 직위를 잃고 하린을 보지 못할 수도 있었기에 율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율이 며칠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다고 말해주긴 했지만, 매일 같이 찾아오던 율의 부재에 하린은 자신도 모르게 하루 종일 근심 어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율이 다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영영 다시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기다린 것은 아니었지만, 기적처럼 다시 하린의 눈앞에 나타난 율을 전처럼 무기력하게 놓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다른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직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었기에.     

가게문이 열리는 걸 알리는 종이 울릴 때면 하린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율은 없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아쉬워하는 건 하린뿐만이 아니었다. 매일같이 찾아오며 다른 직원들과도 안면을 트고 지내던 율이었기에, 직원들 또한 말은 하지 않지만 내심 율이 언제쯤 다시 나타날까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율은 일주일 넘도록 카페에 찾아오지 않았다.             

율이 다시 나타난 건 정확히 열흘 후였다. 문이 열리고 손님이 들어왔지만 이제 기대하지 않는다는 듯 하린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인사를 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주문을 하러 와서야 그의 얼굴을 봤다. 율이었다. 처음 율이 카페에 왔을 때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율만 보면 자신의 생각이 멈추고 할 말이 없어졌다.

“주문 안 받나요?”

율이 처음 왔을 때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며칠이면 된다더니 어디 멀리 다녀오셨나 봐요?”

하린이 조금은 토라진 말투로 율에게 말을 건넸다. 그 모습이 귀여워 율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이 있어서요.”

“열흘이나 넘게 못 오실 정도로 바쁘셨나 봐요”

“네 조금은.”

말을 이어가던 둘 사이에 다른 여자 직원들이 끼어들었다. 왜 이제야 왔는지, 무얼 하다 왔는지, 심지어 오늘은 뭐하냐며 율에게 저녁 식사를 제안하는 직원도 있었다. 하린의 표정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갑작스레 쏟아지는 질문에 대답을 못하고 있는 율에게 하린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끊었더.

“제안 준 거 생각해봤는데. 오늘 말해야 할 것 같아요.”

당황한 표정의 율의 얼굴이 곧 웃음 넘치는 표정으로 변했다.          

그 길로 하린은 율의 카페에서 일하게 되었다. 매일 바쁘다는 율의 말은 역시 거짓말이었다. 손님이 없는 날도 있었지만, 손님이 온다 해도 겨우 한 두 명이었다. 심지어 그 손님에게 주는 커피 역시 하린이 아닌 율이 준비했다. 신기한 것은 카페에 오는 손님들 모두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었다. 보통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 카페에 오는 손님이 대부분인데, 율의 카페는 무언가 달랐다.

“근데, 여기 오는 사람들은 뭐 귀신 그런 거야?”

하린의 뜬금없는 질문에 율은 웃기다는 듯 한참을 웃었다.

“아니야. 모두 다 산사람들이야.”

“그럼 왜 맨날 너랑 이야기하는 거야? 보통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러 카페에 오는 손님이 대부분이잖아.”

율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연한 천국의 일이었다. 인간이 알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 하늘의 법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위에서 내려온 하린에 대한 내용과 처리방법은 그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았다. 더그의 말에 따르면 이것은 대천사에게 ‘자율’을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중 팩스기가 요란하게 울려댔다. 율이 팩스기에서 나온 종이를 보더니 이내 작정한 듯 하린에게 말했다.

“내일은 출장인데, 같이 갈래?”

하린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이 되어 율을 따라 문을 나섰다. 문을 열고 나가자 이내 서울 강남 한복판으로 장소가 옮겨졌다. 여전히 공간을 이동하는 것은 하린에게 익숙지 않은 것이었다. 율은 그런 하린을 데리고 거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평일 오후. 거리의 대다수는 점심을 먹기 위해 나온 직장인들로 가득했다.

“어디 가는 거야?”

“거의 다 왔어.”

웃으며 대답한 율은 곧 하린을 데리고 한 건물로 들어갔다. 높은 건물들 사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높고, 거대한 빌딩이었다. 건물의 외관처럼 로비의 규모도 대단했다. 로비에만 10명이 넘는 경비원들이 근무를 하고 있었고, 로비 이곳저곳에는 다른 회사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담당자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로 가리라 생각했던 율은 로비 한쪽에 자리 잡은 카페로 들어갔다. 이곳 역시 직장인들로 가득했다.

“뭐 마실래?”

“응?”

“뭐 마실 거냐고.”

“난 괜찮아.”

주문을 마친 율과 하린이 카페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율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업무를 하러 왔다는 사람 치고는 굉장히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하린이 율에게 물었다.

“업무 안 해? 뭐 하는지 궁금해서 온 거란 말이야. 커피 마시러 온 게 아니라.”

“저기 구석에 정장 입고 온 여자 보여?”

율이 미소와 함께 가리킨 곳에는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고 자리에 앉아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꼭 율처럼 특별한 능력이 아니더라도 여자가 이 회사에 면접을 보러 온 사람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잔뜩 긴장한 표정. 얼음처럼 굳어있는 몸. 혼자 중얼거리며 면접을 준비하는 자세는 다른 여유 넘치는 직장인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하린은 율에게 말을 이어갔다.

“저 사람 회사 합격시켜주려고 온 거였어?”

“아니.”

예상외의 대답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던 하린에게 율이 더 황당한 대답을 덧붙였다.

“떨어뜨리려고 왔어.”

율은 대답을 마치고는 눈짓으로 여자 옆을 지나가는 사람의 중심을 무너뜨렸다. 곧 커피를 들고 가던 사람은 중심을 잃고 여자 쪽으로 넘어지며 들고 있던 커피를 여자의 하얀색 와이셔츠와 정장치마에 그대로 쏟았다. 남자는 주섬주섬 일어나더니 연신 여자에게 죄송하다며 사과를 했고, 여자는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하며 이미 물든 셔츠를 연신 닦아냈다. 카페가 순식간에 적막해지고, 모든 시선이 그 둘을 향했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는지 여자의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이제 가자.”

말을 마친 율이 하린을 데리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말없이 거리를 걷던 둘의 적막을 깬 것은 하린이었다.

“나쁜 사람이었어?”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지.”

“반대?”

“응. 어려서부터 갖은 고생 겪어가며 오늘 여기까지 온 여자였어. 학자금 대출받아 학교 다니고, 대출금 갚으려고 온갖 아르바이트를 했지. 졸업 후에는 대출금 갚겠다고 아직까지 아르바이트하고 있고. 한 2년 그렇게 준비했나? 이번에 서류전형 붙어서 오늘 면접 보러 온 거야. 이 회사에.”

“근데 왜 그랬어? 여기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회사잖아. 그만큼 고생했으면 상을 줄 수도 있지 않았어?”

하린이 걸음을 멈추더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율을 쳐다봤다. 율이 하린의 손을 잡고 다시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어나갔다.

“저 회사에 들어가면 행복할까?”

“그토록 바랐으니, 행복하겠지.”

“회사에 들어가면 무시를 당할 거야. 유명대학 출신이 아니라고. 또 하는 업무는 얼마나 많은지 매일이 야근일 테고, 주말출근은 당연하게 생각하게 될 거야. 돈? 돈은 많이 벌겠지. 하지만 점차 허탈함을 느낄 거야. 자기가 이곳에서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를 테지. 한 10년 다니나? 건강이 나빠져서 회사에서 쫓겨나듯 나와서 치료를 받다가 결국 사망. 그게 이 여자의 미래야.”

율의 말을 들은 하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하린을 쳐다보며 율은 걸음을 멈춘 뒤 말을 이어갔다.

“오늘 면접을 망친 여자는 다시 몇 개월 동안 취업이 되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제야 느끼겠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보자고. 그렇게 여자는 드라마 극본을 쓰는 작가로 활동하게 되고, 처음 쓴 드라마가 곧바로 히트를 칠 거야. 돈은 물론이고, 이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다 여자의 작품에 출연하고 싶어 줄을 서게 될 거야.”

“그럼 결국 도와준 거네?”

“난 그저 여자에게 다른 길을 보여줬을 뿐이야. 그 길을 갈 것인가는 여자의 선택이고. 길은 누구에게나 보여줘. 보여준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

실제 많은 사람들이 율의 말처럼 기회를 놓치곤 했다. 자신이 가진 재능을 알면서도 안정적인 삶을 위해 포기한 사람도 있었고, 자신의 능력을 채 알기도 전에 사회가 정해준 버스에 탑승하기도 했다. 율은 그저 이런 사람들의 인생에 아주 작은 부싯돌 역할을 해줄 뿐이었다. 자신의 인생의 선택은 결국 각자의 몫이었다. 그렇게 요란한 하루의 마무리를 알리는 듯 거리가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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