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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훈 Apr 22. 2022

[M :신과 악마의 내기] #9. 운명의 창

강한 햇빛이 율의 얼굴에 드리웠다. 예루살렘의 기후는 언제나 뜨겁고 강했다. 하린과의 평범한 하루를 보내던 율에게 갑자기 더그의 호출이 들려왔다. 순간 불길함이 엄습했다. 율의 예상처럼 더그의 호출은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더그는 율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건넸다.

“최근 예루살렘에서 어둠이 강하게 느껴진 적이 있었어. 다른 귀신들은 기를 보고 숨기 바빠 목격한 귀신은 없더라고. 급하게 미가엘이 천군 1개 대대를 이끌고 갔지만, 딱히 특이사항은 없었고. 너도 한 번 가보는 게 좋을 거야.”

분명 이상한 일이긴 했다. 위에서 어둠이 느껴진 정도로 대천사가 직접 그곳에 내려가진 않는다. 게다가 천군 1개 대대를 이끌고 갔다는 것은 그것이 대악마 무어일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루살렘은 따로 귀신이 없었다. 신의 아들인 예수가 죽은 장소. 선과 악이 공존한 곳. 종종 천사와 악마의 영혼이 소멸되는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날 정도로 천사와 악마가 대치하는 장소였다. 그런 이유로 귀신들은 감히 이곳에서 활동할 수 없었다. 율이 예루살렘 이곳저곳을 돌아보다 이내 한 교회에 도착했다. 곧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율이 죽었을 때 본 경비 천사 숀이었다.

“대천사님 오랜만입니다. 이곳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안녕하세요 숀. 전에 어둠이 강력하게 느껴진 적이 있다고 해서 와봤습니다.”

직급이 높은 율이 숀의 상관이었기에 편하게 말을 해도 됐지만, 율이 죽었을 때부터 천사였던 숀에게 말을 놓는 것은 참 힘들었다. 숀도 몇 번 이야기했지만 고쳐지지 않는 율의 말투에 지금은 익숙한 듯 대화했다.

“이안은 어디 있나요?”

“이안은 위에서 할 일이 있어서요. 여기 이 교회는 제 담당으로 다른 천군들과 관리하고 있습니다.”

교회 곳곳에 있는 많은 수의 천군들이 율에게 인사했다. 교회에 이렇게 많은 천군들이 있다는 것이 의아할 수도 있었지만, 이곳은 그냥 교회가 아니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맞이한 뒤 안장된 묘지에 세워진 교회 ‘성묘교회’였다. 악마와 천사가 공존한 곳. 결국 그 악이 하늘의 높은 존재를 죽음에 까지 이르게 한 곳. 인간사에도 종교사에서도 비극적이고 중요한 역사를 가진 곳이었다. 율은 숀에게 천천히 둘러보겠노라 말하고 교회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미가엘과 더그의 말처럼 다른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렇게 교회 밖으로 나온 율에게 순간 소름 끼치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어둠이었다. 강력하게 흘러나오지 않았지만 미세하게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작은 힘에도 그것이 엄청난 힘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천군들 심지어 숀도 이 기운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저 율의 얼굴에만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히 나타났다.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어둠이 자신을 부른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율은 눈을 고쳐 뜨고 기운이 흘러오는 곳으로 이동했다.          

율이 문을 통해 나와 바라본 곳은 예루살렘이 한눈에 보일 정도로 높은 곳이었다. 어딘지 알기 위해 발밑을 보는 율의 눈에 거칠어 보이는 돌이 있었다. 성전이었다.

“여기서 예수를 시험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갑자기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경계하듯 소리가 난 쪽을 쳐다봤다.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빼입은 흰색 정장과 넥타이, 그의 성격을 대변하듯 꽤나 거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머리칼. 율만이 알 수 있게 내뿜던 미세한 기운과 달리 지금은 그 힘의 끝도 알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기운. 그의 모든 것이 그가 지옥을 관리하는 대악마 ‘무어’ 임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율은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팔을 붙잡고 그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너는 분명 대악마 무어인가”

“오 이거 영광인데? ‘M’이 내 이름도 알고말이야”

율을 바라보며 비꼬는 말투로 말하는 무어에게 두려움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이 느껴졌지만 율은 이내 정신을 다잡았다. 이곳에서 그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자신은 물론 하린까지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다.

“율. ‘M’이 아니라 율이다. 내 이름.”

뜻밖의 대답에 무어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어는 곧 성전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웃어댔다. 빌처럼 자신에게 달려들까 경계했지만, 다행히 그는 그저 웃고 말았다.

“그래 율. 내가 널 여기로 부른 이유는 알고 있고?”

“안다면 겨우 너 보러 여기까지 오진 않았을 거고”

무어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이곳은 내가 시험 한, 그리고 너희들이 떠받드는 예수가 죽은 곳이라는 건 알고 있지? 그토록 믿던 인간의 손에 말이야. 그때 참 볼 만했는데. 사실 내가 죽으러 가는 예수를 따라가며 계속 유혹했거든. 살려달라 한마디만 하면 내가 널 그곳에서 꺼내 주겠노라고. 근데 끝까지 안 하더라고. 그리고 인간의 손에 죽을 때의 예수의 그 표정이란 정말..”

“네 놈의 혓바닥은 듣던 대로 길구나”

율의 표정은 지금껏 볼 수 없을 정도로 험악하게 굳어있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달려가 무어의 입을 찢어 놓을 기세였다. 먹구름이 몰려왔다. 해가 강렬하게 내리쬐던 조금 전의 날씨와는 달리 구름 사이에서 일어난 바람이 성전 주위를 덮었고, 율의 손에는 한껏 흥분한 듯한 빛과 어둠이 꿈틀댔다. 아무리 무어라지만 표정에 당황함을 감출 수 없었다. 기껏해야 백 년 남짓 된 천사가 이런 힘을 내리라고는 무어 본인도 생각지 못했다. 일단 이 상황을 넘기기 위해 무어는 율을 진정시켰다.

“싸우러 온 거 아니니까 일단 진정해봐. 여기서 싸우면 상관없는 인간들도 무사하진 못할 거야.”

율이 시선을 옮겨 성전 밑을 바라봤다. 갑자기 불어온 먹구름과 돌풍에 서둘러 산을 내려가는 사람들과 그 속에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서로 뒤엉켜있었다.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마음이었지만 진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먹구름이 서서히 걷히자 무어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운명의 창에 대해 알고 있겠지?”

운명의 창. 신의 아들인 예수의 몸에 상처를 내고 피를 묻힌 성물이었다. 사람들은 그 창을 롱기누스의 창. 또는 운명의 창이라 불렀다.

“인간들은 그 창을 손에 넣으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하더군. 참 어리석어. 그런 위대한 창으로 겨우 세상을 지배하겠다니. 게다가 그런 성물을 고작 박물관에 전시해놓는 것이 전부라니. 어쨌든 난 그 창이 필요해. 그리고 그걸 네가 가져다줬으면 좋겠고.”

자신에게 뜬금없이 말하는 무어의 말에 율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첫째, 내가 왜 그래야 하며, 둘째, 위치도 알고 있으면서 본인이 직접 가져가지 그래?”

“인간들이 박물관에 고이 가져다 둔 창은 진짜가 아니야. 진짜였다면 내가 진작 가져갔을 테고. 성물의 위치는 오직 대천사만이 볼 수 있다.”

“그럼 내가 너를 위해 그 창을 가져다줘야 하는 이유는?”

“아무리 강한 네 파트너가 지키고 있다 해도 여기로 온다면 말은 달라지지.”

말을 마치자마자 무어가 순식간에 율에게 달려드러 목덜미를 잡았다. 처음 빌에게 당할 뻔했던 것보다 배는 빠른 속도였기에 채 피할 틈도 없었다. 율이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성전에 가득 찼다. 곧 굉음이 일어나더니 연기와 번개가 둘 사이에 번쩍였다. 동시에 무어가 원래 있던 자리로 튕겨져 나갔다. 연기가 걷힌 자리에는 범이 원래의 모습을 하고 율을 감싸 안고 있었다.

“와 생각한 것보다 더 빠른데? 내 속도를 지구 반대편에서 따라오다니.”

무어가 범이 올 것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웃으며 말했다. 문득 하린이 떠올랐다. 범에게 하린을 맡기고 온 터였다. 지금 하린의 곁엔 그 누구도 없었다. 율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더니 곧 범과 함께 자리에서 사라졌다. 무어는 율이 사라진 허공을 쳐다보며 예전같이 만족한 듯한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었다.          

율이 도착한 곳은 하린이 있는 카페였다. 재빨리 날아왔지만, 눈앞에는 이미 하린의 목덜미를 감싸 안은 빌이 보였다. 전에 일에 대한 복수라는 듯 미소를 띠고 있는 빌과 겁먹은 하린의 모습이 검은 문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율이 문을 향해 빠르게 날았다. 하지만 문은 비정하게도 닫힌 후였다. 인간이었을 때도, 대천사가 된 지금도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하나 지킬 수 없는 나약함은 변하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는 율의 눈가에 핏줄이 섰다. 곧 하늘이 율의 절규하는 소리로 가득 찼다. 율의 눈이 시뻘겋게 변해있었다. 그와 동시에 율의 몸에서 빛과 어둠이 순식간에 뿜어져 나왔다. 두 힘은 서로 뒤엉켜 율 본인도 감당할 수 없는 힘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대로 주위의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곧 율은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건물엔 금이 갔고, 땅은 갈라졌으며, 가로등은 모두 깨져가고 있었다. 마치 세상의 종말이 오는 것처럼 거리가 어두워졌다. 율이 자리에서 일어나 날개를 폈다. 인간들이 보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율이 고개를 돌려 예루살렘에 있을 무어를 쳐다봤다. 공간을 넘어 본 그곳에서 무어는 여전히 율을 보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자리를 박차고 날아가려던 율의 주위에 무언가 나타났다. 더그와 미가엘이었다.

“진정해 율. 여기가 이승이란 거 잊었어?”

율은 대꾸도 하지 않은 채 허공을 향해 도약했다. 순간 두 명의 대천사가 율을 향해 빛으로 만든 줄을 던져 율의 다리를 감았다. 간신히 날아오르는 율을 막긴 했지만, 아무리 대천사 둘이라도 빛과 어둠을 모두 가지고 있는 율을 진정시키긴 힘들었다. 그 큰 미가엘도 조금씩 율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정신 차려 율!”

더그마저 조금씩 율에게 끌려가고 있을 무렵 하늘에서 빛이 나더니 곧 그들 사이로 떨어졌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한 여자가 율의 가슴에 검을 꽂은 채 서 있었다. 꺼져가던 가로등의 불이 다시 들어와 거리를 환하게 비췄다.          

구름이 바다처럼 일렁이는 곳이었다. 마치 성난 파도처럼 빠른 속도로 일렁이는 구름. 그 구름을 보며 율은 정처 없이 걷고 있었다. 지쳤다. 몸과 마음은 이미 구겨지다 못해 너덜너덜해져 찢어지기 전과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중 이내 자리에 멈추어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이곳이 하늘이었지만 그보다 높이 있을 매정한 그의 신에게 소리쳤다. 그것은 절규인 동시에 원망이었다.

“어찌 이러십니까! 제가 무엇을 했기에 이승에서도 천국에서도 제가 가진 것을 가져가지 못해서 안달이십니까!”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답은 없었다. 예상했다는 표정의 율이었다. 그의 눈이 더욱 날카롭게 변했다

“차라리 죽이시지요! 그녀가 차라리 죽었으면 적어도 지옥에는 가지 않았겠지요!”

일렁이는 구름 소리만 들릴 뿐 여전히 아무 대답도 없었다.

“제 스스로를 평생 원망하며 살라고 그러시는 겁니까? 도대체 어디까지 해야 속이 시원하시겠냔 말입니다!”

율은 대답 없는 하늘에서 시선을 옮겨 구름을 바라보았다. 분명 저 밑은 지옥이었다. 저곳으로 내려가면 하린이 있는 바로 그 지옥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지옥은 그곳이 아니라 하린을 지켜내지 못한 후회가 남아있는 이곳이었다. 적어도 저곳에 가면 하린을 만나 용서를 구할 수 있으리라. 아니 운이 좋으면 자신이 하린 대신 지옥에 남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자리에서 한참 동안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대답 없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기다리는 것처럼. 혹시나 자신을 부를 누군가의 목소리를. 하지만 그 한참의 시간에도 하늘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율은 고개를 떨구더니 이내 일렁이는 구름 아래로 자신의 몸을 던졌다. 율의 눈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율이 눈을 뜨고 처음 바라본 것은 익숙한 집이었다. 율이 대천사가 되기 위해, 하린을 만나기 위해 천국에서 머물렀던 미가엘의 집이었다. 역시나 꿈이었다. 한 번쯤 신이 자신의 앞에 나타나 도움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율의 바람이 처참히 무너졌다. 지옥에 가는 것조차 율의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 비참했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 자리에서 일어났다. 꿈이던 현실이던 상관없었다. 그저 현실이 될 때까지 지옥으로 떨어지면 되었다. 그의 발 주변을 맴도는 범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율은 집 밖으로 나섰다. 율이 지옥으로 통하는 곳으로 가려할 때 미가엘이 율을 붙잡았다. 다급해 보였다. 거친 숨을 내쉬며 미가엘은 율에게 말했다.

“지금 가서 뭘 어떻게 하려고. 그 몸으로 지옥에 가서 무어에게 맞서고 하린을 데려오겠다고?”

비참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지금의 몸 상태로 아니, 굳이 지금의 몸이 아니더라도 대천사 혼자 지옥에 가서 살아 돌아올 가능성은 매우 적었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렇게 간절했다. 하린을 데려오지 못할 걸 알면서도 가야 할 만큼.

“무어가 그녀를 데려갈 때 너에게 따로 한 말은 없었어?”

순간 율의 눈이 커졌다. ‘운명의 창’ 분명 무어는 율에게 ‘운명의 창’을 가지고 오라는 말을 남겼다. 하린에 대한 생각과 무어에 대한 분노로 잠시 잊고 있었지만 분명 그것이 하린을 구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였음을 이제야 느낄 수 있었다. 미가엘에게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율은 혼자 생각에 잠겼다. 운명의 창을 가지고 가면 그녀를 되찾아 올 수 있을까. 만약 그 말이 거짓이라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런 강한 힘을 가진 무기를 무어의 손에 넘긴다면 천국은 어떻게 되는 걸까. 많은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율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하지만 그 모든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는 ‘운명의 창’의 위치였다. 무어조차도 천국 어딘가에 기록되어있다고만 할 뿐,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는 성물이었다. 더그나, 미가엘, 가브리엘은 이미 그 창이 어디 있는지 알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미가엘에게 창의 위치를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린이 지옥으로 사라지고,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창의 위치를 물어본다면 아무리 미가엘이라도 무어가 ‘운명의 창’을 요구했음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무어는 미가엘에게 무어가 자신에게 별다른 말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고 말하고 상황을 일단락시켰다. 하지만 언젠가 대천사 중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시간이 흐른 뒤 더그가 율을 찾아왔다. 그날의 일에 대해 율에게 화를 낼 줄 알았지만 더그는 그 일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잠시 이승을 맡을 테니 천국에서 휴식을 취하라는 말 뿐이었다. 그런 더그에게 고맙고 미안해 율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랜만에 온 천국인데 감회가 어때?”

더그는 풀 죽어있는 율에게 일부러 말을 건넸다.

“글쎄요. 좋은 일로 온 것도 아니고, 마음이 복잡하네요.”

“내가 인간이었던 적은 없지만, 나라도 그랬을 거야. 저 위의 양반도 믿음, 소망, 사랑 중 제일은 사랑이라고 그랬고”

더그는 율에게 장난스럽게 말을 건네며 웃어 보였다. 율은 지금껏 더그가 자신처럼 인간이었다가 천사가 된 줄 알았건만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런 물음을 더그에게 던졌을 때 오히려 놀란 건 자신이라는 듯 더그가 말했다.

“뭐야 너 그것도 모르고 있던 거야? 천국에 와서 천국의 성경을 읽은 적 없어?”

“네. 미가엘과는 항상 제가 가진 힘을 통제하는 법을 익히며 시간을 보냈으니까요”

더그는 눈을 질끈 감은 후 이내 율에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미가엘이 그런 걸 설명해줬을 리 없지. 간단히 말하면 천국에도 성경이 있어. 물론 이승의 성경보다는 그 내용이 더 많고, 인간이 알지 못하는 사실 또한 많지.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실과 비밀을 가지고 있는 성경도 있는데 그게 바로 대성경. 악마는 물론 일반 천사들도 볼 수 없는 성경이야. 오직 대천사들만 볼 수 있는 성경이지. 네가 대천사가 되었다면 한 번쯤 아니, 한 번은 읽어 봐야 할 책 이기도 하고.”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은 듯, 율의 눈이 빛났다. ‘운명의 창’에 대한 비밀과 위치가 대성경 안에 있을 수도 있었다. 아니 있어야만 했다. 율은 시간이 될 때 읽어보라는 더그의 말을 끊고 다짜고짜 대성경의 위치를 물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운명의 창을 찾아야만 했다. 더그는 그런 율을 이상하게 쳐다보다 이내 대성경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천국의 성전. 그곳에서 가브리엘을 찾아. 대성경은 가브리엘이 관리하고 있으니까.”

더그는 말을 마치고는 곧 이승으로 내려갔다. 자신이 자리를 비워 무어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말과 함께. 하지만 율은 무어가 이승에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무어가 관심 있는 것은 율 본인이 가져갈 운명의 창이었기에.           

더그가 내려가자마자 그 길로 성전으로 달려갔다. 성전 안은 조용했다. 몇몇 기도를 하는 천사들 외엔 자리가 비어있었다. 하늘처럼 높이 뻗은 천장. 성전의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은 곳에서 율은 가브리엘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한참을 찾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가브리엘 때문에 잠시 자리에 앉을 무렵 뒤에서 익숙한 느낌이 느껴졌다. 아니 본능이었다. 가브리엘의 칼에 찔린 율의 몸에서 가브리엘이 가지고 있는 힘에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재빨리 뒤를 쳐다본 율의 눈에 보인 것은 한 여자였다. 천사에게 성별은 의미가 없었지만 분명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 손에는 책을 들고 한 손으로는 안경을 만지고 있는 여자가 율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토록 찾아다닌 가브리엘이었지만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그저 그녀에게서 나오는 위압감 때문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가브리엘은 책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깨어나셨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

자신에게 예를 갖춰 말하긴 하지만, 그것이 진정 율을 배려해서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율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가브리엘과 대화를 이어갔다.

“덕분에요. 그때는 감사했습니다.”

“그대의 몸을 찔렀을 뿐인데 감사는요.”

여전히 율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말을 이어나가는 가브리엘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율은 곧 대성경의 위치를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율을 쳐다보며 의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서둘러 더그의 핑계를 댔다.

“더그가 당신을 찾아가라고 해서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을 한 가브리엘이었지만 이내 율을 한 장소로 데려갔다.          

그녀를 따라 들어간 곳은 성전 십자가 옆에 작게 있는 문이었다. 들어간 곳에는 사람 한 명이 앉을 정도의 작은 공간과 그 공간의 반을 차지할 것만 같은 성경책. 그 위에는 십자가 모양으로 난 창에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것이 대천사들만이 읽을 수 있는 대성경이에요. 대충 설명은 들었겠지만, 이곳은 대천사 말고는 출입이 되지 않는 곳이에요. 그 말인 즉, 여기서 읽은 대성경의 정보 하나라도 밖으로 새어나가면 안 된다는 거죠.”

가브리엘이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율을 쳐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이내 다 읽은 후에 문만 잘 닫고 나오라는 말을 남긴 채 성전 안으로 사라졌다. 가브리엘이 사라지고 율은 펼쳐져있는 대성경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성경은 얼마나 큰지 책 한 페이지 넘기는데도 한참의 시간이 걸렸고, 책의 무게 또한 상당했다. 율이 이 성경을 다 읽으려면 적어도 100년은 더 걸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율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운명의 창을 가지고 하린을 구하러 가야만 했다. 빠르게 신의 아들인 예수가 죽은 부분의 성경을 찾기 시작했다. 그 부분은 이미 이승에서도 있는 부분이기에 찾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그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한복음 19장 34절.’          

율은 곧 이승에서 봤던 구절을 찾아내었다. 예수님이 죽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한 군병이 옆구리를 찔렀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앞에도 뒤에도 이승의 성경과 같았다. 다른 것은 요한복음의 마지막이었다. 본래대로라면 요한복음은 21장에서 끝나야 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대성경은 그 뒤의 일을 기록하고 있었다. 짧지만 율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율은 그곳에서 한참 동안을 대성경을 읽으며 점차 그 속에 빠져들었다.  


<요한복음 22장>

이것은 후대에 기록되지 않을 이야기이니, 그것은 나의 뜻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늘의 뜻이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수 날이 지난 후 내 꿈에 천사가 나타났다. 아니, 그것은 정확히 말하면 꿈보다는 현실에 가까웠다. 그만큼 생생한 꿈이었다. 그 천사는 자신의 이름을 가브리엘이라 말하며 나를 흔들어 깨웠다. 그런 나에게 가브리엘이 하는 말은 놀라웠다.

“요한아, 오는 새벽에 한 남자가 너의 집 문을 두드릴 것이다. 그럼 문을 열고 그가 주는 것을 받아 후대에 악으로 쓰이지 못하도록 너의 방법으로 숨겨라. 너와 하늘의 사자 말고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게 하여라”

말을 마치자마자 가브리엘은 내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동시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이 시간에 오는 사람에게 경계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지만, 대천사의 말 때문에 문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문을 열고 본 남자의 얼굴은 어디선가 익히 본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곳이 어딘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남자는 무언가에 쫓기는 듯 두려운 표정으로 내게 무엇인가를 건네고 급히 새벽어둠 사이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곳을 한참 바라보다 이내 문을 닫고 거칠게 쌓여있는 천을 풀었다. 귀중한 물건이라도 되는 듯 여러 겹의 천으로 싸인 물건은 다름 아닌 대가 없는 창의 끝부분이었다. 그 날카롭고도 거친 쇠에는 검붉은 색의 무엇인가가 딱딱하게 굳어있었는데 그것을 만지자마자 나는 그것이 어떤 물건이며, 조금 전의 다녀간 사람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놀란 나머지 의자에서 굴러 넘어졌다. 그는 필시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던 로마의 병사였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그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남자가 분명했다. 투구를 벗은 모습에 잠시 기억하지 못했지만 분명 그였다. 예수님의 죽음이 있던 날 그토록 당당하던 자가 이렇게 은밀히 나에게로 온 이유를 그때의 난 알지 못했다.           

내 나름대로 창을 숨길 방법을 모색하던 중 곧 한 소문이 내 귀로 들어왔다.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며 신의 아들을 찌른 창이 로마 황제의 손에 들어갔다는 이야기였다. 그것은 거짓이었다. 필시 황제의 눈을 피해 병사가 다른 창을 건넨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나에게 창을 건넨 그 병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로 자신의 집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 길로 병사의 집으로 달려갔다. 수많은 인파를 뚫고 본 그곳엔 나에게 창을 건네던 병사가 목을 매단 채로 있었다. 가브리엘의 말처럼 이제 이 창에 대해 아는 사람은 하늘과 나뿐이었다. 수일을 생각하다 나는 그 창을 들고 마을의 한 남자를 찾아갔다. 그는 마을에서 무기와 갑옷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이 창을 녹여 달라 부탁했다. 멀쩡한 창을 왜 녹여 쓸모없는 철로 만드냐는 그의 말에 의아함이 있었지만, 그저 사정이 있다는 말을 하고 돈을 넉넉히 쥐어주었다. 예수님의 피를 닦아두기도 했고, 돈을 넉넉히 준 탓에 남자는 별 의심 없이 그 자리에서 창을 녹여 철 덩어리로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수일을 불안함 속에서 살았다. 깊게 잠이 들지도 않았고, 눈을 뜨면 항상 성물이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 대한 박해가 심한 이 시기에 언제 죽음을 맞이 할지도 몰랐고, 그렇게 되면 성물 또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기도했다. 성물을 악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어찌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나의 신에게 답을 구했다. 그리고 그날도 다른 날과 같았다. 불안함 속에서 얕은 잠에 빠진 무렵에 가브리엘이 다시 나에게 찾아왔다. 그리고는 하늘에서 나를 보며 내게 말을 건넸다.

“요한아, 네 수고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아시니 날이 밝는 대로 거리에 나가 다리를 절며 물건을 사고파는 잡상인에게 그것을 주어라.”

문득 걱정이 되었다. 과연 잡상인에게 성물이 들어가도 괜찮은 것인가. 악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근데 그것이 겨우 잡상인의 손에 들어가서 정말 괜찮은 것인가. 그런 물음을 가브리엘에게 던졌다.

“언제 죽을지 몰라, 그래서 그것이 혹 악의 손에 들어갈까 봐 답을 구했던 것뿐, 이 일에 불평은 없습니다. 제가 맡은 소임을 다하고, 대대로 물려주어 안전하게 보관하도록 할 테니 제게서 제가 맡은 책임을 가져가지 말아 주시옵소서.”

가브리엘은 그런 요한을 쳐다보며 답했다.

“너에게는 주님이 주신 다른 소임이 있지 않느냐. 성물을 이승에 두어 사람이 행한 악이 후대에 똑같이 악으로 풀릴지, 선으로 풀릴지, 또는 지독한 운명으로 풀릴지 하늘에서 개입하지 않겠다는 것이 신의 뜻이다.”

가브리엘은 요한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허공으로 사라져 없어졌다. 나는 새벽의 어둠을 쫓는 해가 밝을 때까지 성물의 옆에서 잠이 들 수 없었다. 날이 밝는 대로 가브리엘이 아니 신이 말한 일을 행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많은 인파 중에서 다리를 저는 상인의 모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성물을 내어주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를 떴다. 그리고 그게 내가 본 성물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요한복음의 뒷이야기는 그렇게 끝나버렸다. 율은 그 뒤로 대성경을 모조리 뒤져보았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운명의 창에 관한 이야기를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허탈함을 가지고 예배당을 나온 율이 마주친 사람은 가브리엘이었다. 가브리엘은 무슨 일인지 오랜 시간 동안 율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아마도 갑작스럽게 그녀를 찾아온 자신이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그랬으리라 율 스스로 생각했다. 애써 가브리엘을 지나쳐 교회의 문으로 걸어가던 중 율은 다짐이나 했다는 듯 어금니를 꽉 깨물고 뒤를 돌아 가브리엘을 향했다. 그리고 곧 가브리엘을 불러 세웠다. 결국 성물의 위치를 알 확률이 높은 것은 요한의 꿈에 나타나 그것을 지시한 가브리엘이었다.

“성물은 어디 있죠?”

“무슨 말씀이시죠?”

“요한복음의 뒷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운명의 창이 그저 인간의 손에 넘어갔더군요. 그 성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브리엘은 약간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 갑자기 왜 궁금한 것인지 모르겠네요.”

“짧은 시간 동안 대천사가 된 제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 저도 당신과 같은 대천사입니다. 그래서 더그가 저를 이쪽으로 보낸 것이고요. 가르쳐주기 싫다면 그러셔도 됩니다. 단순한 의문에서 물어본 것뿐 다른 의미는 없었습니다.”

율은 말을 마치고 미련 없다는 듯 뒤돌아 교회 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빨리 뛰고 있었다. 이렇게 성물의 위치를 모르게 되는 걸까. 차라리 가브리엘에게 모두 사실대로 말하고 창의 위치를 물어봤어야 할까.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교회 문고리를 잡는 순간에 가브리엘이 어느샌가 율의 옆으로 와서 문을 막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이내 율을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따라오세요. 성물의 뒷이야기를 해드리죠.”          

가브리엘은 율을 데리고 교회 뒷자리 한 구석에 앉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는 성물이 상인의 손에 들어간 후로 계속해서 성물의 위치를 파악했어요. 어디에 있던지 우리가 그것이 필요할 때, 악이 그것을 가져가려 할 일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요. 신의 뜻에는 반하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악마의 손에 들어가게 놔둘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천사가, 그것도 천사들을 관리하는 위치에 있는 대천사가 신의 뜻에 반하는 일을 할 정도면 그 운명의 창이 가진 힘이 도대체 어느 정도일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지금 그 운명의 창을 무어에게 내어주기 위해 가브리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웠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성물의 위치를 확인한 곳은 당신이 살던 나라예요.”

“네?”

당연히 예루살렘이나 멀어도 그 근방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줄 알았던 성물이 율이 살고 있던 한국에 있다니 놀라웠다. 아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성물이 작은 나라 한국에 들어갈 수 있었는지. 그런 물음을 가브리엘에게 던지자 그녀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당신이 살던 나라는 강대국에 의해 항상 침략당하던 나라였죠. 그런 그대의 나라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이 과연 우연일까요?”

가브리엘의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실제로 많은 침략을 받았던 것은 역사가 말해주고 있었다. 나라의 위쪽엔 강대국인 중국이 끊임없이 침략하고 군신관계를 맺어 나라를 조롱하는 것은 물론, 밑에서는 일본이 기회가 될 때마다 나라에 침략해 그들의 육로로서 나라를 짓밟았다. 실제 식민지가 된 역사도 있었으며 더욱 비참한 것은 후에 나라 스스로 분열하여 서로가 서로의 적이 되었고, 그것은 현재까지도 그러했다. 그럼에도 다른 나라의 속국이 되지 않고 세계에서도 어느 정도의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자원도 없는 작은 나라에서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단지 우연은 아니었으리라. 생각을 정리한 율이 성물의 마지막 위치를 묻자 가브리엘은 오히려 율에게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역사를 잘 아는 편인가요?”

갑작스러운 가브리엘의 질문에 율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대답했다.

“모르는 편은 아니라고 자부합니다.”

“그럼 당신의 나라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 있다면 누구라고 생각하나요?”

“아무래도 처음 떠오르는 사람은 이순신 장군이겠죠. 역사적으로 훌륭한 업적도 많이 쌓았고. 불가능한 전투도 승리로 이끌었고.”

“불가능한 전투. 맞는 말이에요. 불가능한 전투가 꽤 많았죠. 그럼에도 나라를 구했고. 그게 단지 그 사람의 능력으로 된 일이라고 생각하나요?”

율이 들었던 사실을 반박하는 가브리엘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당연히 그렇다고 알고 지냈으며 그렇게 배웠다. 율이 알고 있는 사실에 물음을 던지는 가브리엘의 질문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조선의 작은 장수에게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성물이 들어가 그것을 알고 쓰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게다가 불교가 국교인 나라에서.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율의 생각을 무참히 짓밟듯 곧 가브리엘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작은 나라 조선으로 흘러 들어간 성물은 한 대장장이의 손에서 칼로 제작되어 그 장수에게 들어갔죠. 그는 후에 어렴풋이 알게 되었죠. 그 칼이 단순한 칼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도 죽으리라 생각했던 전투에서 살아 돌아오는 것뿐만 아니라 대승을 하고 돌아오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요.”

성물이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에 있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것을 칼로 만들어 사용했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율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뒤에 이어진 가브리엘의 말은 율을 더욱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당신 나라의 장수 다행히도 ‘악’이 아닌 ‘선’이었죠. 그는 그 검의 비범한 힘을 알고는 2m의 장검을 만들고, 전투가 있는 날이 아니면 성물 대신 항상 그 칼을 차고 다녔어요. 성물로 만든 칼이 정확히 어떤 칼인지는 모르지만, 자신도 이 칼이 적에게 들어가면 위험할 것이라는 것을 인지한 거죠.”

“그럼 그 칼은 뭐죠?”

“성물로 제작된 그 칼을 당시에 조선의 그 장수는 ‘쌍룡검’ 또는 ‘원융검’이라는 말로 부르더군요.”

이순신 장군에게 다른 칼이 있었다니. 율이 이승에 살 때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그만큼 그 칼을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고, 많은 비밀이 감춰져 있었다.

“정확히 어떤 힘이 있었던 거죠 그 칼에?”          

‘주득쌍룡검 천추기상웅’

‘쌍룡검을 만들어 얻으니 천추에 기상이 웅장하도다’           

“당시 그 장수가 칼에 새겨놓은 말 중 일부입니다. 기상이 웅장하다는 것은 그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었죠. 천사도 악마도 아닌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의 인간이 그 칼을 이용해 기상을 바꾸고, 바람을 부를 수도 있었죠. 그 칼은 그만큼 강력한 성검이었습니다.”

실제로 장수는 많은 전투에서 기상과 물살 같은 기상을 이용하여 이긴 전투가 많았다. 그것이 단지 우연이 아닌 성물에서 나오는 힘을 이용한 전투였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율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알지 못하는 역사를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성물의 위치였다.

“그래서 지금 그 성물 아니, 쌍룡검은 어디에 있죠?”

“당신 나라의 그 장수는 자신이 죽으면 그 칼이 적군의 손에 들어갈 것을 예견했죠. 그리고 배 위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 그 칼을 자신의 부하에게 건넸습니다. 아무도 사용할 수 없도록 숨기라는 말과 함께.”

“그럼 지금 그 칼은 어디에 있나요?”

가브리엘은 잠시 망설이더니 대답했다.

“아쉽지만 그 뒤로는 우리도 몰라요. 우리는 장수가 죽은 후 바로 그 성물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두려 했지만, 신이 우리의 행동을 알고 제지했죠. 그 뒤로는 그저 칼이 누군가에게로 들어가 아무도 찾지 못하기만을 바랄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가브리엘도 위치를 알지 못했다. 다만 희망적인 것이 있다면 성물의 단서를 알게 된 것 하나였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앉아있는 율에게 가브리엘은 만족할만한 대답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성전을 떠났다. 성전을 떠날 수 없었다. 하린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왔지만, 결국 바뀐 것은 없었다. 이 정도 단서만을 가지고 성물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율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나 성전을 나섰다.          

율은 곧 이승으로 내려왔다. 더 이상 이승을 더그에게 맡겨 놓을 수도 없을뿐더러, 천국에 있다고 하여 하린을 구할 방법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더그와 미가엘은 자신들이 방법을 찾아볼 테니 일단 이승에서 기다리라는 말뿐이었다. 하지만 율은 가만히 앉아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이승에 내려오자마자 성물의 마지막 위치가 담긴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 온다고 뚜렷한 방도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답답함이 율을 그곳으로 이끌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가브리엘에게 들은 단서로 이곳에 왔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게 더욱 자책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율의 마음과는 상반되게 바다는 솩솩 소리를 내며 끝없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옛날에는 이렇게 물살이 세지 않았다는 것 알고 있나?”

백발의 허리 굽은 노인이 다짜고짜 율에게 물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저 말 몇 마디 하고 헤어졌겠지만, 아쉽게도 율은 전혀 그럴 마음이 아니었다. 율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계속 바다만 바라봤다.

“아무리 좁은 해로라지만, 원래 이렇게 유속이 빠르지는 않았다고 하더군.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그랬다고 하니.”

“그렇습니까.”

율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래. 우리 집안의 옛 어르신은 조선의 어부였다고. 이래 보여도 울돌목은 고기가 참 많았다고 하더군. 줄만 넣으면 고기가 잡혔다고 할 정도니까 말이야. 근데, 어느 날부터 울돌목 물살이 세져서 낚시는커녕 배가 휙휙 돌아 들어갈 수조차 없더란 말이지. 참 이상해.”

“그래서 이곳 전투에서도 이긴 것 아닙니까.”

“명량해전을 말하는 겐가? 그것도 그렇지만, 그전에는 물살이 항상 세지는 않았더란 말이지. 어느 시기에는 물살이 세지고, 어느 시기에는 잠잠하고 말이야. 근데 일본놈들이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고 난 후부터, 이상하게 이곳의 물살이 항상 세더란 말이지. 우리는 이곳에 죽은 수많은 병사들의 혼이 아직도 울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저리 솩솩 소리를 내는 것은 아닐까 생각만 하는 게지.”

문득 가브리엘에게서 들은 성물의 내용이 떠올랐다. 분명 조선의 장수가 기상을 바꾸고 바람을 불러 이긴 전투가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장수가 죽은 뒤로 물살이 계속 세진 것이라면, 여전히 이곳 어딘가에 성물이 있을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노인에게 물을 것이 많아졌다. 급하게 노인에게로 말을 건네려던 찰나, 노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절벽 위의 소나무 한 그루만 있을 뿐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알 수 없는 바람만이 율에게 불어왔다.      

망설일 틈도 없이 울돌목에서 가장 물살이 센 곳을 찾다, 이내 조류가 시작되는 한 지점에 다다랐다. 울돌목 전체에 울리던 소리가 이곳에서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수심이 깊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물속에서 주변을 밝혔다. 유속이 시작되는 곳을 계속 따라가다 이내 한 동굴을 발견했다. 바다 한가운데에 물에 잠기지 않는 동굴이 있을 리 만무했다. 점차 율의 머릿속에 성물이 이곳에 있으리라는 확신이 생겨났다. 계속해서 동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내 동굴의 막다른 벽에 이르렀다. 이럴 리가 없었다. 아니 여기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율의 그런 바람을 처참히 무시하듯, 성물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바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정말 방법이 없었다. 지옥에 직접 내려가야 할까. 내려간다면 하린을 데려올 수 있을까. 그때 율의 뒤에서 낯선 인기척이 들렸다. 재빨리 몸을 튼 곳에는 범이 있었다. 그제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놀랐잖아.”

하지만 범은 율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율의 옷을 잡아끌고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범의 모습에 마지못해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자.”

동굴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 율을 따라가기는커녕, 범은 제자리에 앉아 율이 앉았던 바위를 긁어대고 있었다. 율이 범을 데리러 가까이 다가갔을 때, 문득 바위에서 돌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곳에는 조금이나마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칼이 보였다. 떨리는 손으로 바위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형체를 알아볼 순 없었지만, 익숙한 글귀가 율을 반겼다.  


‘鑄得雙龍劍 千秋氣尙雄 盟山誓海意 忠憤古今同’

‘쌍룡검을 만드니 천추에 기상이 웅장하도다. 산과 바다에 맹세한 뜻이 있으니 충성스러운 의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도다 “          

그토록 찾아 헤매던 성물, 아니 성물로 만들어진 ‘쌍룡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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