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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훈 Apr 22. 2022

[M :신과 악마의 내기] #10. 지독한 인연

한 남자가 급히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곧 문을 열고 들어간 곳에는 가만히 앉아 창문 너머를 바라보는 대천사 율이 앉아 있었다. 말없이 앉아있는 율의 옆으로 꽤 오래되어 보이는 검 한 자루가 있었다. 율은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말을 건넸다.  

“왔어?”

다급히 율을 만나러 온 사람은 용주였다. 율은 성물을 찾고 고민하다 이내 용주에게 연락했다. 그간 하린이 사라진 줄도 모르고 있던 용주는 하린이 사라졌다는 소식에 다급히 율의 카페로 달려왔고, 그곳에서 예상과는 다르게 의외로 침착한 율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린은 어디 있고, 어떻게 된 일이냐며 율에게 따지듯 물었지만, 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책상에 있는 물건만 만지작 거리더니 곧 입을 열었다. 율의 입에서 나온 말은 용주를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하린을 지옥으로 데려간 이야기부터 운명의 창이라는 성물을 거래 조건으로 내건 이야기까지. 용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 율은 바라볼 뿐이었다. 율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게 바로 그 성물이야.”

율이 운명의 창이라 이야기하던 성물의 모습은 창이 아닌 검의 형태였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검. 오래된 시간을 증명하듯 칼집은 먼지로 가득했다. 하지만 칼집에서 꺼내 본 칼은 세월이 무색하리만큼 날이 서있고, 빛이 났다. 용주가 무언가에 이끌리듯 성물을 만지려 하자 율은 재빨리 검을 낚아채고는 말을 돌렸다.

“마지막일지 몰라서 인사하러 온 거야. 돌아오지 못할 확률이 크거든.”

“간다고? 어딜?”

용주의 다급한 물음에 율은 잠시 망설이더니 곧 대답했다.

“지옥”

“그렇지만 무어가 네가 가져온 성물만 가져가면 그땐 어떻게 하려고? 하린도 너도 그곳에서 영영 돌아오지 못할 수 있어.”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이게 유일한 방법이니까. 너무 걱정 마. 성물만 가져간다고 해결되지 않을 거야. 성물을 사용하기 위한 조건이 적힌 대성경 역시 내가 가지고 있거든. 함부로 하린이나 나를 죽이진 못할 거야.”

“그래도 너무 위험한 거 아냐?”

“말했잖아. 어쩔 수 없다고.”

짧은 대화를 마치고 율은 곧 카페의 1층 문을 항해 내려갔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율은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었다. 혈혈단신으로 지옥에 찾아가는 일은 아무리 대천사라지만 떨리고 두려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율이 문을 여는 순간 뒤에서 용주가 다급히 부르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용주를 향해 돌아본 율의 복부로 뜨거운 것이 소리 없이 들어왔다. 어둠으로 만든 검이었다.

“아무리 범이 강하고 빠르다고 해도 이것까지 보호해 줄 수는 없겠지.”

용주의 손에는 율의 배를 찌르고 뽑은 검과 율의 따뜻한 피가 흥건히 묻어있었다. 처음 느껴보는 고통이었다. 빛에 찔렸을 때와는 그 고통의 크기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무릎을 꿇고 가쁜 숨을 내쉬며 용주를 올려다보며 율이 힘겹게 말했다.

“도대체 왜.. 형이 어떻게 그걸..”

용주는 피가 흥건하게 묻은 손으로 성물을 만지며 대답했다.

“이걸 얻기 위해 참 많은 시간을 참았어. 이제 이 지긋지긋한 몸도 안녕이네.”

“너 뭐야? 용주가 아니야?”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무어가 신과 내기를 통해 너를 택할 때부터 난 너의 옆에 있었어. 내 이름은 ‘미드’ 신과 무어의 첫 번째 내기에서 선택받은 자다.”

자신과 같은 선택을 받은 ‘미드’가 신과 무어에게 두 번째로 선택받은 율 위에 서있었다. 그의 모습은 무어만큼이나 차갑고 싸늘해 보였다.

“언젠가 무어가 네게 운명의 창을 요구할 걸 알고 있었어. 그때 무어보다 먼저 그것을 얻기 위해 오랜 시간 이 나약한 몸뚱이 속에 숨죽이고 있었다. 그 노력이 결실을 맺은 날이 바로 오늘이고.”

평생을 함께해 온 용주가 율이 알고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죽을듯한 고통이 느껴지는 배를 움켜잡고 가쁜 숨을 내쉴 뿐이었다. 용주는 그런 율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운명의 창을 완벽히 내 손에 넣고 싶었는데, 대성경을 네가 가지고 있다니 좀 애석하네. 그래서 죽이진 않았어. 내가 알아내지 못하면 네가 또 쓸모가 있을 테니. 어디 잘 치료해봐. 죽진 않을 거니까.”

말을 마치고 나가는 용주를 잡아 세워야 했지만 그럴 힘이 없었다. 이미 정신마저 흐릿해지고 있었다. 용주 아니, 미드는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율은 간신히 몸을 벽에 기대앉았다. 곧 범이 율의 곁에 다가와 정신을 잃어가는 율의 상처를 핥아댔다. 그렇게 졸음이 쏟아지더니 율은 곧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 율은 카페의 1층 바닥에 그대로 누워있었다. 자연스럽게 상처가 난 배로 손을 가져가 확인했지만 피는 굳어있었고, 큰 상처도 어느 정도 회복되어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은 율 옆에는 범이 엎드려 자고 있었다. 범의 입 주변에 피가 흥건했다. 아마도 범이 밤새 율의 상처를 핥아댄 것 같았다. 율은 기억 속에서 미가엘이 해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범은 상처를 치료하는 능력이 있으니까 이승에 혼자 내려가더라도 너무 걱정은 말라고.”

정신을 차린 율이 범을 쓰다듬으며 미안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곧 범이 기척에 깨어 다시 정신을 차린 모습의 율을 보고는 꼬리를 흔들며 율에게 몸을 비볐다. 범이 기특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성물도 빼앗기고 몸 상태도 좋지 않았지만 율의 눈은 무언가를 결심이나 한 듯 비장했다. 율은 운명의 창을 찾은 것은 물론 미드를 만나 부상을 입은 것 역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분명 더그와 미가엘, 가브리엘이 있다면 큰 전력임이 분명했지만, 그들은 하린이 아닌 천국을 위해 싸울 확률이 컸다. 게다가 운명의 창이 미드의 손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지옥으로 가겠다는 율을 말릴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율은 카페에서 나와 통로로 향했다. 오늘은 늘 타던 엘리베이터가 아닌, 다른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곧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하지만 쉽게 발을 들일 수 없었다. 두렵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율은 한참을 망설이더니 이내 옆에 있던 범을 보며 말했다.

“여기서부턴 함께 할 수 없어. 카페로 돌아가 있어. 만약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대로 천국으로 올라가. 알았지?”

범은 빤히 율을 쳐다보더니 이내 엘리베이터로 몸을 실었다. 놀란 율이 엘리베이터를 한 손으로 잡은 채 범을 끌어내려했다. 하지만 범은 그대로 자리에 앉아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미 범에게 얻은 것이 많았다. 하린을 지켜준 것도 범이었고, 운명의 창을 찾아준 것 역시 범이었다. 그런 범을 사지로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참을 그곳에서 씨름했다. 힘으로도 꺼내보려 하고, 설득도 해보려 했지만 범은 그 자리에 엎드려 절대 비킬 생각이 없다는 듯 눈을 감아버렸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범이 탄 엘리베이터에 타자 그제야 범이 일어나 율의 옆에 섰다. 처음엔 하린만 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단 율이었다. 자신의 목숨 따위 얼마든지 버릴 수 있었지만 이제 점점 그곳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가 생겨갔다. 율은 밑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꼭 하린과 범을 데리고 그곳을 나오리라 스스로 되뇌고 또 되뇌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곳은 B1층이라 적힌 곳이었다. B7층까지의 버튼이 있어, 하는 수 없이 B1층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조심스레 엘리베이터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율이 내린 지옥엔 단 한 명의 사람도 없었다. 지옥의 모든 곳은 검은색에 가까운 적색 배경이 펼쳐져 있었고, 여기저기 먼지바람이 눈에 보일만큼 강하게 불어왔다. 먼지바람이 걷히자 곧 멈춘 지 한참은 되어 보이는 기차가 눈에 들어왔다. 율은 여기저기 끊긴 철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기차 위에 반쯤 찌그러진 콘크리트 안에서 당장이라도 무엇인가 튀어나올 것 같아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오히려 누군가라도 나와줬으면 할 정도로 적막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율 앞에 나타난 것은 거대한 싱크홀이었다. 싱크홀 안쪽은 어둡다 못해 짙은 검은색이었다. 지옥이 어두운 탓도 있겠지만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싱크홀이 지옥에 있는 조금의 밝음마저 먹어 치운 것만 같았다. 싱크홀의 한쪽에서는 계단이 시작되고 있었고, 가장자리를 따라 계속해서 밑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계단을 타고 내려갈 시간이 율에게는 없었다.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깊은 어둠 속으로 자신의 몸을 던졌다. 얼마나 떨어졌을까. 바닥이 보이기 시작하자 떨어지는 속도가 무색할 만큼 사뿐히 착지했다. 밑으로 내려온 지옥은 위에서 보았던 곳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기차와 철길이 없을 뿐 검은색에 가까운 적색이 퍼져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율은 지옥의 깊은 곳으로 조금씩 들어갔다. 그제야 사람들이 보였다. 광장 같이 넓은 곳에 사람들이 여기저기 있었고, 광장 밖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이야기를 하기도,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특이한 것은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들에게 미소라고는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옥에서 미소를 찾는 자신의 생각이 조금 우습다는 것을 깨닫고는 조심스레 광장 안으로 들어갔다.          

율은 이곳에서 완전한 외부인이었다. 일반적인 외부인도 아닌 지옥에 온 대천사. 하지만 사람들은 율을 경계 하기는커녕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의구심이 들었다. 분명 자신이 꿈에서 본 지옥과 천국에서 본 지옥의 모습은 이렇게 평화롭지 않았다. 아니 지금 이 자리에서 평화를 논하는 것 자체가 우스웠지만, 사람들이 고통받고 절규하며 소리 지르는 그런 지옥은 아니었다. 이런 지옥이면 그래도 괜찮겠다 싶은 생각을 하자마자 한 곳에서 싸움이 일어났다. 율이 놀라 그곳을 쳐다봄과 동시에 말릴 틈도 없이 사방으로 싸움이 번졌다. 처음 두 사람으로 시작한 싸움은 이내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염되어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몽둥이로 사람의 머리를 내리치고 칼로 서로를 찌르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서로 이야기 나눌 때에도 없던 미소가 모든 이의 표정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심지어 칼에 찔리면서도 그 흥분을 감출 수 없다는 듯 그들은 모두 보란 듯이 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곳은 한 명의 악마도 없었다.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악마는 한 명도 없었지만,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고통이 되어주고 있었다. 이곳이 지옥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모여 있기에 이곳이 지옥이 되었다. 그때 가만히 서있는 율에게 한 사람이 몽둥이를 들고 달려왔다. 율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 존재였지만, 굳이 그를 죽이고 싶지 않아 몸을 돌려 그의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율에게 달려들었다. 결국 손에서 빛을 꺼낼 무렵, 한 어둠이 율과 남자 사이에 나타나더니 곧 남자의 목을 한 손으로 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 그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넌 뭐하는 놈인데 여기까지 아무도 없이 혼자 온 거야?”

익숙한 목소리였다. 율이 처음 천국으로 향할 때, 지귀를 보호할 때, 하린이 율의 눈앞에서 사라질 때 그 모든 곳에 있던 자 빌이었다. 율의 눈이 분노로 가득 찼다. 눈 주위에 핏줄이 드러났고, 얼굴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대답 없는 율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려 율을 쳐다보려 할 때 그보다 먼저 율이 빌의 목을 낚아채 공중에서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네놈을 여기서 다시 만나는구나”

얼마나 세게 빌의 목을 잡았는지 율의 손을 따라 빌의 목에서부터 얼굴에 핏줄이 나와 터질 것만 같았다. 율은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 빌의 목을 더욱 강하게 조르며 말을 이어갔다.

“무어는 어디 있나”

율이 너무나도 강하게 빌의 목을 잡고 있는 탓에 빌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율은 마지못해 잡은 손의 힘을 조금 풀어주었다. 그제야 빌이 숨을 헐떡이며 조금씩 말하기 시작했다.

“니까짓 게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는 분이다.”

빌의 대답은 율의 화를 돋우기에 충분했다. 빌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를 잡고 있는 손으로 벽에 던져버렸다. 벽에 부딪히고 그가 튕겨 나오기도 전에 율은 다시 한번 그에게 달려들어 목을 잡고 땅으로 내리꽂았다. 그리고는 땅에 누워있는 빌의 목을 잡고 억지로 세워 다시 한번 물었다.

“한 번만 더 묻겠다. 무어는 어디 있는가”

빌의 눈이 두려움에 떨렸다. 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여전히 율에게 맞서고 있었다.

“네까짓게 감히...”

빌의 말이 끝나기 전에 그의 한쪽 팔이 날아갔다. 율의 손에는 칼 모양으로 변한 빛이 들려있었다. 빌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는 고통을 주는 것에만 익숙할 뿐 당하는 것엔 익숙하지 않았다. 율은 빌의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말했지. 다음엔 다른 게 꽂혀있을 거라고. 다시 물겠다. 무어 어디 있어?”

“나도 몰라. 그분이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몰..”

빌의 말이 끝나기 전에 이번엔 그의 복부에 검이 꽂혔다.

“이번엔 내가 원한 대답이 아니었고. 마지막으로 묻겠다. 무어 어디 있어. 이번에 대답하지 못하면 이 지옥에서 누구보다도 큰 고통 속에서 소멸당할 거야.”

그제야 빌은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빌이 무어의 위치를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감히 한 악마가 모든 악마를 다스리는 무어의 위치를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율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무어의 위치는 핑계였을 뿐, 율은 그저 하린을 데려간 빌에 대한 분노로 그를 벌하고 있던 것뿐이었다. 여전히 대답을 하지 못하는 빌에게 율은 나지막이 말했다.

“방금 네놈에게 준 마지막 기회도 날아갔다.”

율이 그대로 빌의 복부에서 검을 꺼내어 심장에 꽂으려 할 때 율의 등으로 수백 개의 창이 날아왔다. 하지만 창은 모두 율의 날개에 작은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한 채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빌을 그대로 땅에 던져버리고 뒤를 돌아봤다. 수백 명은 되어 보이는 악마들이 율을 두려움과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원래의 계획은 자신이 천사라는 사실을 철저히 숨기고 무어를 만나는 것이었지만, 이미 계획과는 한참 멀어졌다. 빌을 본 순간부터 율의 이성은 평소 같지 않았고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율은 곧 손에서 동그란 원 모양의 빛을 하늘로 던졌다. 그리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하늘비'

율이 말을 마치자마자 어두웠던 지옥이 한없이 밝아지더니 곧 수백 개의 창이 악마들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떨어졌다. 악마들은 그 광경에 놀라 몸이 굳은 채 그대로 창에 맞아 소멸되기도 하고, 창을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대천사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악마는 적어도 그 자리에 없었다. 순식간에 빌을 구하러 온 수백 명의 악마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율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대로 뒤를 돌아 주저앉아 있는 빌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제 네 차례구나.”

곧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짙게 깔렸다. 빛이 사라진 곳에는 조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수의 악마들이 서있었다. 모두 두려움에 떨고 있었지만, 천사의 영혼이라는 달콤한 유혹에 이기지 못한 흥분 상태이기도 했다. 율은 그런 악마를 대적하며 두려워하기는커녕 자신도 모르게 점차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악마를 소멸하는 것이 이 정도의 희열을 가져다 줄지 율 자신도 알지 못했던 일이다. 율이 다시 한 곳으로 모인 빛을 칼로 만들었다.

“계획을 바꿔야겠다. 네놈을 처리하고 저놈들마저 소멸시킨다면 무어가 알아서 기어 나올 테지.”

작정한 듯 빌의 심장에 검을 꽂으려 할 때 무엇인가 그 앞을 막았다. 무어였다.

“드디어 나오셨나.”

“남의 동네에 와서 너무 소란 피우는 것 같은데”

“누가 나한테 그렇게 하더라고”

강한 두 힘이 부딪혀 둘 사이에 격렬한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어떤 것도 맞대지 않았지만, 두 명이 가지고 있는 기운만으로 지옥에 강한 파장이 일었다. 파장은 이내 서로를 반대편으로 밀쳐냈다. 율은 이내 피식 웃더니 빛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싸우러 온 거 아니니까 진정하고”

무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분명 무어가 예루살렘에서 율에게 똑같이 한 말이었다. 무어는 평정심을 찾기 위해 노력하더니 역시 어둠을 집어넣고 율에게 대답했다.

“내가 원하는 건 찾고 이 난리를 피운 거겠지? 그게 아니라면 아무리 대천사라도 이곳에서 곱게 나가긴 힘들 거야. 네 여자도 그렇고”

하린의 얘기를 하며 율을 도발하는 무어였다. 하지만 율은 이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덤덤히 말을 이어갔다.

“운명의 창 그거? 그거 나한테 없어.”

무어의 얼굴에서 점차 분노가 차올랐다. 그런 무어를 더 자극하기라도 하려는 듯 율은 계속해서 무어를 도발했다.

“아니 차라리 못 찾는 게 나았으려나? 찾긴 했는데 미드가 가져갔거든. 네가 처음 내기의 대상으로 고른 그 첫 번째 ‘미드’ 말이야.”

이제 참을 수 없다는 듯 무어가 이를 깨물며 말했다.

“죽여주마. 네가 보는 앞에서 네 여자를 죽이고 그 뒤에 너를 죽여주마. 하찮은 천사 주제에 나를 도발해놓고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무어의 모습이 점차 태초의 모습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태초의 뱀. 모든 생물 중에 가장 강했던 생물로 변하고 있었다. 두려웠다. 하지만 주도권을 뺏기면 하린은커녕 자신도 이곳에서 무사히 나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드가 운명의 창을 가지고 가긴 했지만 그걸 사용할 순 없을 거야. 대성경은 주지 않았거든.”

이야기를 들은 무어가 조금 진정이 된다는 듯 점차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직도 완전히 율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둘 사이에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을 깬 것은 무어였다.

“그래서 미드가 널 찾아올 거다?”

“그렇지. 아니면 성물은 녹슨 철 덩어리나 마찬가지거든”

“그럼 당장 이곳으로 부르는 게 좋을 거야. 죽는 게 싫다면.”

무어의 눈에 살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율은 미드의 위치를 알지도 못했고, 설령 안다 해도 이곳에서 부르는 것은 말이 안 됐다. 신과의 계약도 지키지 않는 존재가 악마였다. 모든 걸 그들에게 넘긴다 해도 지옥에서 멀쩡히 다시 돌아갈 수는 없으리라. 율은 다시 한번 강한 어조로 무어에게 말했다.

“내가 미드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아. 악마들의 왕이라 불리는 네가 불러야지. 그리고 미쳤다고 내가 여기서 거래를 하겠어?”

율의 대답이 무어의 신경에 거슬렸으나 율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만했다. 그렇다고 무어가 천국에 올라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럼 다른 좋은 방도라도 있는 건가?”

“시험의 날. 거래는 시험의 날에 진행한다. 셋의 물린 악연은 셋이서 끊어야 하지 않겠어?”

순간 무어의 눈이 커졌다. 꽤나 놀란 눈치였다. 시험의 날은 음력으로 1월 15일. 율이 살던 나라에서는 그날을 달이 가장 밝은 정월대보름이라 불렀고, 도교에서는 천관이 복을 내리는 날이라 불렀다. 그만큼 달이 밝은 날이었다. 신은 무어와의 첫 번째 계약 이후로 ‘시험의 날’을 만들었다. 지옥과 천국의 통로를 닫아 이승에 단 한 명의 천사와 악마도 없게 했고, 오직 인간들만 이승에서 하루 동안 살아가도록 했다. 그리고 그 약속으로 가장 밝은 달을 이승에 띄웠다. 물론 인간들이 그 사실을 알아채지는 못했다. 그저 절기의 하나였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어쩌면 신은 매년 오는 그날 언제부터 인간들이 하늘의 개입 없이 또는 악마의 유혹 없이 그들 스스로 선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그들에게 던진 것이리라. 하지만 그 시험의 날은 지금껏 유지되고 있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인간들은 그들 스스로 기회를 놓쳐왔다.           

신이 만든 그런 중요한 날에 이승에 남아있다면 천사와 악마를 막론하고 벌을 받을 수 있었다. 아니 그 자리에서 소멸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미친 짓이야. 신이 정한 날을 어길 수는 없어. 소멸당할지도 모른다.”

“그런 놈이 신과 내기할 때 그렇게 계약을 어기나?”

무어는 건방진 율의 말에 순간 울화가 치밀었지만 애써 화를 참아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미드를 견제하고, 언젠가 신에게 대적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 성물은 꼭 있어야만 하는 물건이었다.

“시험의 날은 당장 내일인데 준비는 필요 없나 보군”

“너는 하린이를 데려오면 되고, 나는 대성경을 가져가면 되고, 한 놈은 성물을 가져오면 되고. 간단하잖아?”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볼 일이 있는 셈이군.”

“그렇지. 어떻게 참 기구하게 됐어”

무어는 한참을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고민했다. 그러더니 곧 율에게 말을 건넸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미드는 올 거야. 네가 말한 것처럼 대성경이 필요하니까. 어쩌면 이미 이 대화를 듣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꽤나 약삭빠른 놈이거든.”

“이해가 빠르니 다행이네. 그럼 곧 보자고.”

뒤를 돌아 이승으로 향하려 하는 율에게 무어가 말했다.

“네 여자는 안 보고 가도 되나?”

순간 율의 몸이 떨렸다. 기대도 안 했지만 하린을 보여줄 것처럼 말하는 무어의 말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손은 떨렸고,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곧 무어에게 애써 담담한 척하며 대답했다.

“내일이면 앞으로 계속 볼 텐데 뭐.”

말을 마치고 율은 이승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로 빠른 속도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무어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그는 분명 웃고 있었을 것이다. 하린의 이름을 듣자마자 파르르 떨리는 그의 손을 대악마 무어가 놓쳤을 리 없었다. 율을 그렇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지옥을 방문하고 이승으로 돌아왔다.          

이승에 돌아와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하린은커녕 이승에 있는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두 명이 서로에게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는 거래 따위가 아니었다. 세 명이 얽히고설킨 거래였다. 필시 좋게 끝나지는 못하리라. 신과의 내기에서도 약속을 어긴 무어가 율에게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두려웠다. 아무리 대천사라지만 그런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런 율을 위로하는 건 오직 범뿐이었다. 그때 카페의 문이 열리며 익숙한 누군가가 들어왔다. 더그였다. 오랜만에 보는 더그여서일까.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기 전날 이어서일까. 율은 더그가 한없이 반가웠다.

“좀 괜찮아졌어?”

오자마자 자신부터 걱정해주는 더그 때문에 눈물이 나려 했다. 율은 눈물을 감추기 위해 1층으로 내려가 포도주를 가지고 오겠노라 말하며 사라지더니 곧 그가 가장 아끼는 포도주 하나를 가지고 올라왔다.

“이건 익숙한 포도주인데?”

더그가 율이 들고 있는 포도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처음 천국에 간 날 제게 준 포도주였어요. 천국에서 받은 첫 선물이라서 아직 입도 못 대고 있었죠.”

“그럼 오늘 한 잔 할까?”

그렇게 둘은 2층 카페 밖에 있는 작은 평상에서 말없이 포도주를 마셨다. 속도 없이 맛이 좋았다. 한껏 고민이 있는 율의 얼굴을 보고 더그가 재차 무슨 일이 있냐 물었지만 율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계속 대답을 회피했고, 더그도 그런 율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은 말없이 포도주만 연신 들이켰다.

“왜 저였나요?”

“응?”

“대천사 자리 준 거 말이에요. 아무리 제가 신과 무어의 내기에 선택됐다지만 단지 그런 이유로 그 자리를 제게 주진 않았을 거잖아요.”

더그는 말없이 포도주를 들이켜더니 곧 말했다.

“글쎄. 나보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어떤 면에서요?”

“촉이지 뭐”

이유도 없이 단지 천사의 촉으로 자신을 골랐다는 더그의 말에 웃음이 났다. 더그는 천사의 촉을 우습게 보지 말라며 자신의 느낌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고 말을 덧붙였다. 웃으면서도 더그에게 미안한 감정뿐이었다. 어쩌면 더그의 느낌을 틀리게 하는 첫 번째 천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이면 무고한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었고, 지금 포도주를 나눠 마시는 이곳이 없어져버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더그에게 도움을 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율을 이해하고 배려해주는 더그였지만, 이것마저 이해해주진 않으리라 스스로 생각했다. 그 후로 더그는 한참을 율과 함께 포도주를 마시다 이제 가보겠다며 카페 문을 나섰다.

“참 그리고 내일 늦지 않게 올라오도록 해. 무슨 날인지는 알지?”

“알고 있습니다. 시험의 날인 거요.”

“그래 내일 보자고”

더그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율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더그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한참이 지나서야 율은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날이 밝자마자 율은 바로 옆에 있는 궁으로 향했다. 조선시대 왕이 살던 경복궁이었다. 저녁에 올 존재들과의 싸움에서 인명피해를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서는 제일 사람이 없는 곳으로 골라야 했다. 다행히 이곳은 밤에 사람의 출입이 통제되는 곳이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궁 주위로 결계를 쳤다. 무어와 미드가 본격적으로 소란을 피운다면 금방 깨질 결계였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이 근처로 오지 못하게 할 수는 있었다. 천국과 지옥을 통하는 통로에 사람들이 무관심한 것처럼 이곳도 그렇게 만들면 되었다. 율이 모든 일을 마치고 궁 한쪽 돌 위에 무심하게 걸터앉았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어느새 통로가 닫힐 시간이었다. 저 문이 닫히기 전 무어와 미드가 이곳에 도착할 것이다. 통로가 닫혀 율은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을 것이고 오늘 죽음을 맞이할지도 몰랐다. 달이 밝아졌다. 통로가 닫혔다는 뜻이었다. 밝은 달이 궁을 비춰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지만 곧 어디선가 어둠이 밀려왔다. 무어의 기운이었다. 무어는 천천히 율에게로 걸어왔다. 셔츠마저 검은색인 정장 차림이었다. 율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무어 때문만이 아니었다. 무어의 옆에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하린이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눈이 흔들리고 눈물이 떨어졌다.

“율아!”

“하린아..”

하린이 율에게 달려가려 하자 무어가 재빨리 하린을 묶어 뒤쪽으로 보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을 텐데.”

율이 미소를 띠며 말하는 무어를 매섭게 쳐다봤다. 하지만 지금 모든 일을 망칠 순 없었다.

“미드는 어디 있지?”

“저기 오네”

무어가 쳐다보는 쪽을 바라봤다. 율이 쳐다보는 곳에 처음 보는 한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용주의 모습이 아니었다. 남자는 호리호리한 체격으로 무어와 율을 향해 걸어왔다. 걸음걸이는 가벼웠으나 그 기운만큼은 가볍지 않았다. 그의 한쪽 손에는 성물이 들려있었다. 무어가 성물을 보더니 흥분을 감추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남자가 어느 정도 무어와 율에게서 떨어진 곳에 멈추더니 무어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대악마 무어님”

듣던 것과 다르게 무어에게 공손했다. 둘 사이에 세력 싸움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거짓일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곧 들려오는 무어의 대답으로 소문은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헛소리 집어치워라. 미드”

미드는 그런 무어의 대답에 익숙한 듯 미소를 보인 후 율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대천사님은 찔린 곳은 좀 괜찮으시고?”

“덕분에”

그렇게 셋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막상 세 명이 만나긴 했지만 이대로 싸워 서로 가진 것을 빼앗으려 든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힐 것이다. 이미 신의 명령을 어긴 세 명이었기에 멋대로 힘을 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미드가 정적을 깨고 율을 바라보며 말했다. 율은 하늘에 있는 상자 하나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계약의 상자. 모두 알고 있겠지?”

계약의 상자는 천사 혹은 악마들끼리 거래할 때 많이 사용되었다. 천사들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지만, 악마들은 그들 사이에서도 불신이 있기에 자주 사용하곤 했다. 하지만 천사와 악마가 계약을 하고 상자를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율은 상자에서 둘에게 시선을 옮기더니 말을 이어갔다.

“사람을 타락시키는데 얼마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둘은 예상치 못한 율의 질문에 잠시 대답하지 못하였지만 곧 무어가 대답했다.

“사람 하나 타락시키는 것쯤 아주 잠깐의 시간이면 된다. 너희 인간들은 나약하거든”

“이제부터 내가 내기를 제안할 거야. 너희들이 한 사람을 골라 한 시간 안에 그 사람을 먼저 타락시키는 사람이 여기 있는 모든 것을 가지는 걸로. 하지만 너희 둘 다 타락시키지 못하면 모든 것은 내가 가져갈 거야.”

무어와 미드는 자신들에게 너무나도 유리한 내기를 제시하는 율의 말에 다른 뜻이 숨어있진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뜻은 없었다. 율은 진심으로 인간을 믿고, 내기를 하고 있었다. 마치 율의 신이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무어가 궁이 떠나가라 큰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는 계약을 하겠노라며 가장 먼저 상자 앞으로 다가왔다. 미드 역시 잠시 멈칫하더니 곧 상자 앞으로 걸어 나왔다. 율도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이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세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성물도, 대성경도, 하린도 모두 손을 뻗으면 잡힐 거리에 있었다. 율은 애써 하린을 외면한 채 상자 앞에 섰다. 셋은 삼각형 모양의 상자 각 면에 손을 대었고, 곧 계약의 내용을 동시에 읊었다. 그렇게 계약을 마치니 작은 상자가 커지며 한쪽 면이 열렸다. 그리고 그 문으로 자신들이 가진 조건을 하나씩 넣었다. 하린이 상자에 들어가기 전 겁먹은 표정으로 율을 바라봤지만 율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내기에서 이겨 하린을 무사히 데려오는 방법뿐이었다.

“조금만 기다려. 커피 마시러 가자.”

하린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애써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하린도 끄덕이며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상자는 끼익 소리를 내더니 그대로 굳게 닫혔다. 셋은 그렇게 궁을 나와 거리로 향했다.          

무어와 미드, 그리고 율은 공중에 뜬 상태로 내기의 시작이 될 사람을 고르기 시작했다. 무어는 사람을 고르는데 신중했다. 이미 율을 고르며 한 번 실패했기 때문에 완전히 타락할만한 사람을 골라야 했다. 하지만 무어의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미드와 율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렇게 한참을 대상이 될 사람을 고르던 중 미드가 한 남자를 골랐다. 무어와 율도 남자를 쳐다봤다. 그리고 곧 그의 과거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가정환경도 나쁘지 않았고,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며 만난 여자와 결혼을 하기 위해 오늘 청혼을 하러 가는 길이었다. 율이 남자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자신의 과거와 비슷한 남자였다.

“그럼 저 사람으로 하자고.”

무어가 미드와 율에게 말했다. 율은 지금부터 한 시간을 주겠다며 둘 사이에서 약간 뒤로 물러났다. 남자를 타락시키는 것쯤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무어와 미드 두 남자가 같은 사람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제야 둘은 율이 의도한 것을 눈치챘다. 둘 사이에 전투가 일어나면 저 남자를 타락시키기는커녕 오늘이 가기 전 승부가 나지 않거나 어느 한쪽이 죽을 수도 있었다. 동시에 율을 쳐다봤지만, 율은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속절없이 시간이 흘렀다. 누구 하나 먼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정적을 먼저 깬 것은 무어였다. 무어는 자신이 결국 미드의 상급자라는 것을, 아무리 미드가 힘이 강해졌다고는 하나 지옥에서 군림하는 것은 자신이라는 것을 내세우며 미드에게 남자를 자신에게 넘기라 말했다. 하지만 말을 들을 미드가 아니었다. 성물만 미드의 손에 들어온다면 무어를 제치고 자신이 지옥의 왕으로 군림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뿐 아니었다. 어쩌면 신의 아들 예수를 죽인 것처럼 자신도 신을 죽이고 그 자리를 꿰찰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단지 무어가 지옥에서 군림하는 왕이기에 그 커다란 이점을 놓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둘 사이에 팽팽한 기싸움이 흘렀다. 곧 미드가 자리에서 순식간에 없어졌다. 무어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봤지만, 그곳에 미드는 없었다. 미드는 남자를 노리지 않았다. 무어를 둔 채로 남자를 노린다면 실패할 것이 분명했다. 적은 확률에 자신의 운명을 걸기엔 이번 내기가 너무 컸다. 똑같이 적은 확률이었지만 조금이나마 높은 방법은 무어를 공격하고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 남자를 타락시키는 방법이었다. 미드는 무어의 등에 창으로 만든 검을 꽂아 넣었다.

“역시 넌 약아빠졌어.”

“역시 쉽게는 당하지 않는다는 거군요”

무어가 자신의 날개로 무어의 검을 막아냈다. 둘의 기운이 부딪히는 탓에 그 충격파가 거리에 퍼졌다. 사람들은 갑자기 울리는 진동에 여기저기 둘러보았지만, 둘의 모습을 볼 순 없었다.  

“어둠이 아니라 빛이라.. 진짜 해보자는 건가?”

“포기하기엔 너무 큰 건이라서요”

무어도 이제는 결심했다는 듯 양손에 빛과 어둠으로 만든 창 두 개를 꺼내더니 이내 두 개를 합쳐 무어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창을 하나 만들었다. 창의 한쪽에는 짙은 어둠이, 한쪽에는 빛의 밝음이 빛나고 있었다. 무어 역시 천국에서 있던 날이 있었다. 그것도 첫 번째 천사로서. 미드와 율만 두 가지 힘 모두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무어의 날개 끝에 있는 하얀색 날개가 무어가 천사였음을 나타내 주고 있었다.           

미드도 이내 양손에 두 개의 칼을 꺼내 들었다. 둘 다 막을 생각은 없었다. 이미 한 사람은 죽어야만 이 싸움이 끝난다는 것을 둘은, 아니 셋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이승을 울리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하늘은 전쟁이라도 난 듯 벼락이 내리쳤고, 땅은 울렸으며 건물은 흔들렸다. 결계가 있었지만 두 악마의 힘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미드와 무어의 힘은 얼핏 보면 대등해 보였지만, 점차 기세가 꺾이는 것은 미드였다. 아무리 미드가 두 가지 힘을 모두 사용하며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해도 미드가 탄생할 때부터 그를 선택하고 내기의 대상으로 쓴 무어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점차 밀리는 미드를 완전히 끝내려는 듯 무어는 곧 그의 큰 날개를 꺼냈다. 날개는 점점 커지더니 무어의 몸 또한 변하기 시작했다. 발에서는 발톱이 나고, 몸은 점차 커졌으며 날개 역시 마찬가지였다. 얼굴마저 변했을 때 그것이 태초의 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몸집은 넓은 궁 전체에 어둠을 드리울 만큼 거대했고, 발을 옮기는 것만으로도 건물을 쓰러뜨렸다. 무어의 원래 모습까지 보게 되어 당황한 것은 미드만이 아니었다. 율 역시 더그에게 이야기로 들었을 뿐 무어의 원래 모습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율 역시 무어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지금 미드와 같이 무어를 대적해도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만큼 무어는 강력했다.

“신에게 소멸시켜달라 시위하시는 겁니까?”

“성물을 네게 넘기느니 차라리 그 편이 낫겠구나”

하지만 신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무어가 미드를 향해 앞발을 올려 내리쳤다. 그제야 미드가 빛을 방패 모양으로 바꾸어 미드의 공격을 받아냈다. 곧 귀를 찢는 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미드의 방패가 산산이 부서졌다. 빛은 소멸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다시 만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무어와 어느 정도 가까워졌다 생각했건만, 여전히 너무나도 큰 힘의 차이였다. 가망이 없었다. 하지만 가망이 없는 것은 율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 율은 둘이 최대한 대적하기를 바랐다. 미드가 무어의 세력에 대항할 정도로 강력한 세력이 있다는 소리에 주어진 시간 동안 아니 그 시간을 넘어 둘이 대적하기를 바랐다. 그럼 자연히 율이 내기의 승리자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너무 빨랐다. 내기의 시간이 5분 정도 남았지만, 그 5분은 저 두 악마가 사람을 타락시키고도 남을 충분한 시간이었다. 미드의 패배가 확실시된 상황에서 율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미드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곧 어둠을 넓은 형태로 만들어 무어의 눈에 던졌다. 무어가 성가시다는 듯 커다란 발톱으로 쳐냈다. 하지만 그새 미드는 사라졌다. 급하게 미드를 찾은 곳은 남자의 옆이었다.           

남자는 오늘 그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청혼을 하러 가는 길이었다. 몇 년 전, 아니 몇 백 년 전의 율과 같이. 좋은 식당을 예약하고, 그의 품속에 반지를 넣은 채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이런 중요한 날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울리고 벼락이 내리쳤다. 안 그래도 급한 마음이 더욱 급해져 이곳저곳 여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한 신호등에서 여자를 찾을 수 있었다. 여자는 반대편에서 자신을 향해 빨리 오라며 손짓하고 있었다. 신호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기에 서둘러 신호등을 건넜다. 그가 여자 앞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뒤쪽에서 경적소리가 울렸다. 뒤를 돌아본 남자의 눈에 보인 것은 아직 교차로를 건너고 있는 한 아이에게 무섭게 질주하고 있는 트럭이었다. 트럭 기사는 어딘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경적소리를 내며 아이에게 비키라며 손짓하고 있었다. 성인 남자였다면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그 트럭을 피할 만큼 넉넉히 거리가 있었기에 충분히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놀란 듯 트럭을 쳐다보며 그 자리에 멈춰서있었다. 남자의 머리에 채 1초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수 만 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아이를 구할 수 있을까. 둘 모두 살 수 있을까. 혹시나 잘못되면 어떡하지. 여러 괴로운 생각들이 그의 머리를 스쳐갔다. 사랑하는 여자 바로 앞에서 뒤로 돌아 그 여인 앞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건 그에게도, 그녀에게도 고통일 것이 분명했다. 사실 남자가 아이를 구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를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구할 수 있음에도 구하지 않았다는 것은 평생 그를 따라다닐 것이고, 결과적으로만 본다면 남자는 생명을 살릴 수 있음에도 살리지 않은 것이었기에 타락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드의 선택은 그만큼 영악하고 사악한 것이었다. 미드는 승리를 예상한 듯 웃고 있었고, 무어는 한발 늦었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모든 건 남자의 선택에 달렸다. 남자는 잠시 고민하더니 아이에게 시선을 옮겨 달리기 시작했다. 남자가 망설였던 그 짧은 시간 때문에 아이를 들고 함께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미드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한 남자에게 놀라 미드가 차의 속도를 더욱 올렸다. 아이조차 구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게 하여 남자가 지금이라도 자리에 멈추고 여인에게 돌아가기 바라면서. 하지만 남자는 방향을 틀지 않은 채 아이에게로 달려갔다. 가까스로 아이에게 도착했지만, 아이를 데리고 자리에서 피할 수도, 아이를 밀쳐낼 수도 없었다.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아이의 몸을 꽉 안은 채 자신의 몸을 트럭 쪽으로 돌리는 것뿐이었다. 적어도 아이만은 살리고자 하는 남자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곧 굉음이 하늘에 울렸다. 자리에는 연기 가득한 차가 멈춰있을 뿐이었다.          

조심스레 눈을 뜬 남자의 눈에 보인 것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찌그러진 차와 그 차를 한 손으로 막아 세운 한 남자였다. 그 남자는 율이었다.

“오늘 너의 그 선택으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주저앉아 율을 쳐다봤다. 한 손으로 달려오는 차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건 어디서도 듣지 못했다. 정신이 빠져있는 남자에게 여자가 달려왔다. 한 손으로 차를 세운 율이 신기할 법도 한데, 여자는 율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살아있는 남자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내기에 개입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을 텐데!”

미드가 눈이 빨갛게 변해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진정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악마는 시계 보는 방법도 모르나 봐?”

미드가 손에 찬 시계를 쳐다봤다. 시간은 11시 1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기의 시간이 끝났다. 내기에서 승리한 사람은 무어도 미드도 아닌 율이었다. 율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를 안전한 곳으로 옮긴 후 상자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무어와 미드를 쳐다보며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내가 가져가도록 하지”

“웃기는 소리!”

미드가 소리치며 상자에 달려들었다. 무어 역시 이번만큼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빠른 속도로 상자로 날아갔다. 곧 상자에서 굉음과 연기가 났다. 연기가 모두 걷혔을 때, 성물과 대성경을 손에 잡은 무어와 그런 무어를 쳐다보는 미드, 그리고 하린을 안고 있는 율이 있었다. 애초에 무어와 미드는 하린의 목숨에 관심이 없었기에 성물을 향해 돌진했고, 율은 그런 성물을 포기하고 하린을 보호했다. 하린을 커다란 날개로 감싸 보호할 수 있었지만 성물은 결국 무어의 손에 들어갔다.

“계약의 내용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 텐데.”

율이 경고하듯 미드에게 말을 건넸다.

“아. 직위를 잃고 지옥으로 떨어진다. 뭐 그런 거?.”

“아무리 대악마라도 계약의 내용을 어길 수는 없다.”

“그렇지. 아무리 대악마라도 계약의 내용을 어길 수는 없지.”

무어는 말을 마치더니 이내 쓰러져있는 미드의 목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싸늘한 웃음과 함께 미드를 계약의 상자 안으로 던져 넣었다. 미드의 울부짖는 소리가 상자 밖으로 새어 나왔다. 곧 상자 바닥이 열리더니 끝없는 어둠이 짙게 깔렸다. 곧 상자를 집어삼킨 바닥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닫혀 주변이 적막해졌다. 무어는 만족한 듯한 웃음과 함께 율을 쳐다보고 있었다. 곧 자신의 손에 있는 성물을 보더니 대성경을 펼쳤다. 그토록 오래 바랐던 신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 신의 피를 묻힌 성물은 그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무어는 만족한 듯 대성경을 펼쳤다. 하지만 점차 무어의 표정이 굳어갔다. 그리고는 매섭게 율을 노려보며 말했다.

“네놈이 감히....!”

율은 하린을 일으켜 세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율의 얼굴에 웃음이 번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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