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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훈 Apr 22. 2022

[M :신과 악마의 내기] #11. 충돌

율이 처음으로 이상함을 느낀 것은 용주와의 대화에서였다.

“무어가 하린이를 데려가지 않을 수도 있는 거잖아. 어쩌면 네가 다시 이곳에 온 것도 신의 계획이 아닐까?”

용주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대답하려던 율이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용주의 입에서 뜻밖의 이름이 들렸다. ‘무어’ 분명 용주의 입에서 무어의 이름이 나왔다. 

‘어떻게 용주가 무어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순간 멈칫했지만 용주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얼른 대화를 이어갔다. 하지만 용주와 대화를 하면서도 율의 머릿속에는 문득 든 물음이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분명 율은 용주에게 무어의 이름을 말한 적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천국과 지옥에 관해 말하길 꺼렸다. 그런데 어째서 용주는 무어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일까. 머릿속 물음이 의심으로 바뀌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때부터 율은 조심스레 용주를 따라다녔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제외하고는 항상 용주를 지켜봤다. 용주가 회사에 있을 때도, 고모 가족과 있을 때도. 하지만 용주에게서 다른 이상함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용주가 종종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조금 전에 말한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해 애를 먹는 경우도 있었다. 단지 우연이라 보기에는 힘들었다. 용주에 대한 율의 의심이 점차 확신으로 바뀌고 있었다.          

율은 성물을 찾은 후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성물을 가지고 무어에게 그대로 가지고 간다면 하린을 구하기는커녕, 천국마저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었다. 자신이 죽는 건 상관없었지만 자신의 욕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는 없었다. 율은 성물과 똑같이 생긴 검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길로 용주를 불렀다. 카페로 찾아온 용주에게 성물을 찾았다는 소식을 전했다. 순간 용주의 눈빛이 미세하게나마 떨렸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느낄 수 있었다. 심장이 떨렸다. 만약 용주가 율의 추측대로 다른 존재라면 필시 율을 이 자리에서 그냥 보내지 않을 것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문을 잡았을 때 뜨거운 것이 율의 몸속으로 들어왔다. 용주의 검이었다. 죽을 만큼 아팠지만 죽지 않았다. 미드에게는 아직 율을 죽일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렇게 율의 눈앞에서 가짜 성물을 가지고 사라진 용주를 바라보며 율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항상 자신의 힘이 되고, 누구보다도 자신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던 용주가 그를 대적하는 미드였다는 사실이 율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렇게 미드는 율의 눈앞에서 매정하게 사라졌다.                     

 가짜 성물이 활성화될 리 없었기에 미드는 분명 율을 찾을 것이다. 율은 시험의 날을 이용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물론 신의 뜻에 반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율에게 이미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하린만 구할 수 있다면 신이 내릴 벌은 달게 받겠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지옥에 가서 보란 듯 난동을 피우고, 무어를 찾아 시험의 날에 이승으로 올라오도록 했다. 무어가 온다면 미드 역시 율을 찾아올 것이다. 율의 계획은 완벽히 들어맞았다. 하지만 여전히 한 가지 문제가 남았다. 저 둘과 혼자 맞서 싸울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율은 한 내기를 계획했다. 두 악마가 한 사람을 타락시킬 수 있느냐에 대한 내기였다. 하지만 내기를 계획하면서도 율의 머릿속에는 확신이 없었다.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

인간은 악마가 속삭이기만 해도 타락하고 범죄 하는 존재였다. 그만큼 사람은 나약한 존재였다. 그제야 신의 뜻이 궁금해졌다. 도대체 무엇에 대한 확신으로 무어와 내기를 한 것이며, 무어와의 내기에서 진 후에도 어떻게 자신을 두고 같은 내기를 반복할 수 있었을까. 신은 그만큼 사람을 믿었던 것일까. 답은 알 수 없었지만,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자신처럼, 혹은 다른 더 많은 선한 사람들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무어와 미드를 향해 내기를 제안했다.      

하지만 미드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타락과 본능 사이를 교묘하게 파고들어 남자가 아이를 구하지 못할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이 만들었다. 만약 남자가 아이를 구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을 타락으로 보긴 힘들었다. 하지만 결과만을 놓고 보면 구할 수 있음에 구하지 않았기에 범죄 했다고도 볼 수 있었다. 율은 찰나의 순간에 남자의 생각을 읽었다. 복잡했다. 둘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갈등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의 선택은 아이를 구하는 것이었다. 지금 달리면 남자는 죽어도 아이는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남자를 보고 미드가 차의 속도를 올렸다. 아이를 구할 확률을 낮춰 지금이라도 남자를 멈춰 세우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망설이지 않고 계속 달렸다. 그리고 아이를 자신의 품에 넣은 채 자신의 등으로 트럭을 막아 아이만을 살리기 위해 애썼다. 그때 율의 귀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와주소서 하나님. 아이만은 살릴 수 있게 도와주소서.”

생각할 틈도 없이 그대로 남자와 아이 앞으로 달려오는 차를 막아섰다. 내기에서 이기는 것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을 구할 수 있음에도 구하지 않는다면 내기에서 이겨 하린을 구한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자신의 욕심으로 또다시 자신과 같은 슬픈 운명을 만들 수는 없었다. 그런 운명은 율 자신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차를 멈춰 세우자 미드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기에 개입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을 텐데!”

이대로 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율에게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들어라'

들어보지 못했지만 분명 신의 목소리였다. 알 수 있었다. 신의 말대로 고개를 들어 본 곳에는 건물에 달린 커다란 시계가 있었는데 율이 보는 순간 시계의 큰 바늘이 움직이더니 11시 1분이 되었다. 율의 승리였다.           

대성경을 본 무어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새하얀 종이만이 무어의 눈에 비췄다. 애초에 성물에 사용법 따위 없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 분했는지 무어가 율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하지만 이내 율에게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한방 먹었구나. 그래도 괜찮다. 성물은 내 손에 들어왔으니.”

“그럴까?”

율이 빈정대며 손에서 빛을 꺼냈다. 곧 작았던 빛이 커지더니 그 안에서 커다란 무언가가 점차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수를 죽인 성물인 운명의 창이었다. 율이 성물을 칼집에서 빼내어 들었다. 순간 율의 빛과 어둠이 성물 안으로 빨려 들어가 듯 들어가더니 곧 성물이 하늘에 무섭게 울렸다. 칼은 그 울림만으로 땅을 갈라지게 했으며, 구름을 불러들였다. 하늘에 있는 모든 구름이 한 곳으로 모인 것처럼 가득했고, 구름은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칼을 빼내어 든 율조차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놀란 건 율뿐만이 아니었다. 무어 역시 말도 안 되는 광경에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한 채 멈춰 서있었다. 동시에 무어의 손에 있던 성물이 힘없는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성물의 힘이 이 정도인가.”

율은 짧게 말을 마치고는 무어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칼에서 나온 파장이 순식간의 무어의 눈앞까지 갔다. 무어가 재빨리 방패를 만들어 막았으나,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무어의 방패가 깨져버렸다. 놀란 무어가 자리에 그대로 멈췄다. 하지만 율은 공격을 쉴 생각이 없는지 계속해서 성물을 휘두르기 작했다. 성물의 끝에서부터 나간 수많은 공격이 무어에게로 향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무어가 율의 공격을 받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받아낸다기보다 그저 피하기에 급급해 보였다. 곧 율이 하늘의 구름을 무어에게 던졌다. 구름은 무어에게로 향하더니 곧 강하게 무어를 조이기 시작했다. 그 강한 무어도 성물의 힘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당하기 시작했다. 무어 역시 뱀의 모습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도망쳐.’

무어의 본능이 무어에게 도망치라는 신호를 보냈다. 대악마 무어를 한순간 나약한 존재로 만들 만큼 성물은 강력한 것이었다. 점점 힘이 빠져갈 무렵, 순간 그들을 묶고 있던 구름이 풀렸다. 성물을 쥔 율의 손이 강하게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뜨거운 고통의 순간 율이 성물을 놓쳤다. 성물은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하더니 곧 바닥 깊숙이 자신의 모습을 감췄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무어가 구름에서 빠져나왔다. 열이 받을 대로 받은 무어가 기회라 생각했는지 날개를 펼쳤다. 곧 무어의 뒤에 공간이 열리며 익숙한 지옥의 모습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악마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옥의 부대 ‘마군’이었다.           

지옥의 모든 악마들이 이승으로 온 듯 수많은 악마가 이승을 매웠다. 신의 약속의 증표인 보름달마저 가릴 정도로 많은 수의 악마였다. 성물의 힘이라면 그들 모두를 제지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 막 대천사가 된 율이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힘이었다. 성물은 율에게 강한 힘을 주는 동시에 아직 성물을 제어하지 못하는 율의 힘을 빼앗아 가기도 했다. 게다가 자신의 뒤에 있는 하린을 보호하면서 이만큼의 악마를 혼자서 상대하기란 무리였다. 무어가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율에게 소리쳤다.

“이제 성물이 내게 들어올 때가 된 것 같구나.”

곧 무어의 눈이 새빨갛게 변하더니 율을 죽일 듯이 노려보기 시작하며 마군에게 지시를 내렸다.

“마군. 공격.”

무어의 짧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수히 많은 수의 악마가 율을 향해 달려들었다. 급히 어둠으로 방패를 만들어 공격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힘의 차이는 분명했으나, 많은 수의 악마를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율이 점점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율이 빛으로 창을 만들어 내 하늘로 날려 보냈다. 곧 하늘이 밝아지더니 무수히 많은 창이 악마들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악마들이 창에 맞아 소멸되기 시작했다. 막아보려 했지만, 대천사인 율의 공격을 일반 악마가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하늘이 다시 검게 물들었다. 그토록 많은 악마를 한 번에 소멸시켰지만, 마군의 수는 전혀 줄어들지 않은 것 같았다. 오히려 무어의 뒤쪽에서 계속해서 나오는 마군으로 인해 이승이 점차 검게 물들고 있었다. 팔이 떨리기 시작했다. 힘을 모두 써가고 있었다. 겨우 막아내고 있었지만 이대로라면 율의 몸도, 성물도, 하린도 위험해질 것이 분명했다. 순간 좋지 않은 예감이 율의 등줄기를 타고 몸 전체로 퍼졌다. 하린이 있는 쪽이었다. 급하게 고개를 돌려 본 곳에는 한쪽 팔을 잃은 빌이 하린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막아야 했다. 하지만 율의 주위에는 이미 수많은 악마들로 인해 가득 차 있었다. 빌이 섬뜩한 표정으로 하린에게 달려들었고, 곧 파장이 일었다. 먼지가 걷히고 난 곳에는 무언가 빌의 공격을 간신히 받아내고 있었다. 불을 다루는 귀신, 지귀였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무어가 율의 등 뒤를 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뒤를 돌아본 곳에는 그가 보살피던 수많은 귀신들이 서있었다. 마군에 비하면 적은 수였지만 그래도 많은 수였다. 그리고 그 선봉에는 지귀가 있었다. 하나같이 두려운 표정이 역력했다. 귀신의 힘이 아무리 강해도 악마의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고, 이대로 마군과 싸우게 되면 그들이 소멸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율을 위해 모든 귀신들이 마군 앞에 선 것이다. 그것도 대악마가 이끄는 마군 앞에. 눈물이 났다. 그래도 자신이 대천사의 업무를 잘 해낸 것 같아 마음 한편에 알 수 없는 감정이 파고들었다. 고마웠다.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겨서일까. 율은 다시금 자세를 고쳐 잡으며 무어에게 말했다. 

“이쪽도 이겨야 할 이유가 좀 많아서 말이야.”

“그깟 하찮은 귀신들로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제대로 성물을 다루지도 못하는 너 또한 할 수 있는 게 남아있는가!”

애석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율은 끝까지 싸우겠다는 듯 자세를 취했다. 그런 율을 향해 곧 마군의 수많은 창이 율과 귀신들을 향해 날아왔다. 곧 율의 옆에서 무언가가 나가더니 곧 날아오는 모든 창을 막아섰다. 율의 것만큼, 아니 율의 것보다 훨씬 커 보이는 날개였다. 얼마나 크고 강한 날개인지 수많은 공격이 날개에 상처하나 내지 못했다. 펼쳐진 날개 사이로 본래의 모습을 한 범이 사나운 표정으로 무어를 노려보고 있었다.        

율이 곧 양손에 빛과 어둠을 꺼내 들었다. 꺼내 든 빛과 어둠은 잠시 동안 율의 손 위에 떠있더니 다시 율의 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율의 양팔이 점차 빛과 어둠으로 물들었다. 손톱은 날카롭게 변했고, 팔 주위에는 각기 다른 기운이 넘실대고 있었다. 

“시작해볼까.”

짧은 말을 마치고 율이 범의 등에 올랐다. 범이 하늘이 울릴 정도의 소리로 포효하고는 이내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무어가 무언가를 알았다는 듯 급히 자신의 칼로 허공을 갈랐다. 율의 팔과 무어의 칼이 부딪히며 큰 파장을 일으켰다. 범이 지나온 자리에 곧 불길이 생기더니, 그 자리에 있던 악마들이 불에 타들어가며 소멸되기 시작했다. 

“어디 주제도 모르고 덤비느냐. 고작 백 년 된 천사가 태초의 존재인 나를 이길 수 있겠더냐!”

“지금이라면 불가능한 것도 아닌 것 같군.”

율의 말처럼 둘의 기세는 호각이었다. 이미 미드와 성물을 든 율을 상대로 2번이나 전투를 한 무어였다. 태초의 존재이자 대악마였지만, 힘이 빠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무어가 율의 팔을 강하게 밀쳐내며 뒤로 빠져나갔다. 율은 놓칠 생각이 없다는 듯 왼쪽 손으로 사슬을 만들어 무어에게로 던졌다. 무어가 가까스로 율의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애초에 무어에게 공격을 하기 위해 던진 사슬이 아니었다. 사슬은 이내 무어의 몸을 감싸더니 무어의 몸을 강하게 조이기 시작했다. 빠져나가기 위해 애쓰는 무어에게 율이 빛으로 만든 커다란 창을 꺼내 들었다. 무어의 가슴팍을 노리고 창을 던지려던 찰나 무어가 자신의 발로 사슬을 감더니 율의 중심을 무너뜨렸다. 율의 창이 무어의 옆을 빠르게 스쳤다. 곧 무어가 커다란 낫을 만들어 율을 향해 무섭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낫에서 나온 파장이 율에게로 빠르게 다가왔다. 하지만 율은 무어의 공격을 피할 생각이 없다는 듯 제자리에 선채 커다란 장막을 만들어 무어의 공격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얼마나 흘렀을까. 공격이 멈춘 곳에 율이 멀쩡한 상태로 무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곧 비아냥 거리는 말투로 무어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태초의 존재라고 떠들더니, 겨우 이 정도인가?”

그런 율의 말에 무어가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죽여버리겠다!”

무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무어의 뒤에 있던 지옥에서 무수히 많은 검은손이 율을 향해 뻗어왔다. 가까스로 피하는 듯했으나, 너무나 많은 탓에 율의 발목이 잡혔다. 잡힌 발목을 타고 점차 많은 손이 율을 잡기 시작했다. 무어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낫을 들고 율에게로 달려들었다. 율이 무어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잡힌 손을 잘라내고 급히 방패로 만들어냈다. 하지만, 무어의 목적은 율이 아니었다. 무어는 빠르게 성물로 향하고 있었다. 

“안돼!”

율이 날개를 접어 재빨리 무어를 따라갔지만,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무어의 눈이 떨리고 있었다. 성물이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이내 성물의 손을 가져가려 할 때 무언가 무어의 눈앞에서 성물을 채갔다. 하린이었다. 멍하니 하린을 쳐다보던 무어가 정신을 차리고 하린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같은 것을 두 번 당할 만큼 율은 약한 상대가 아니었다. 율이 하린의 손과 함께 성물을 들고 무어를 막아냈다. 하지만 율도 이미 힘을 다한 상태였다. 미세하게 떨리는 율의 손을 놓치지 않고 무어가 곧 전 마군에게 짧게 지시를 내렸다.

“전 마군. 공격.”

율과 하린을 향해 셀 수 없이 많은 공격이 날아오고 있었다.          

율은 재빨리 성물을 들어 결계를 만들고 하린과 다른 귀신들을 감쌌다. 버티고는 있었으나 마군의 공격은 끝도 없이 날아들고 있었다. 아무리 성물을 가진 율이었지만 그런 공격에서 모두를 보호하는 것은 힘들었다. 곧 결계 곳곳에 금이 가기 시작했더니 곧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남아있던 결계가 무참히 깨졌다. 그 틈을 노리지 않고 무어가 율을 향해 달려들었다. 도망가야 했다. 하지만 하린과 함께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율이 재빨리 자신의 날개로 하린을 감싸 안았다. 마치 조금 전의 아이를 구한 남자처럼. 무어의 날카로운 손이 율의 앞까지 다가왔다. 

“이번 생에도 너를 지켜주지 못하는구나.”

율의 혼잣말과 함께 강한 빛이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빛이 멈춘 자리에 곧 나팔소리가 울리더니 미가엘과 더그, 가브리엘이 이끄는 천군이 나타났다. 방패를 든 천군과 창과 검을 든 천군. 화살을 든 천군까지. 자유분방하게 공격하던 마군과 다르게 질서 정연하게 서있는 천군의 모습이 가히 장관이었다. 마군에 비해 그 수는 조금 적어 보였지만, 오히려 더욱 강하고, 단단해 보였다.

“우리가 좀 늦었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율에게 말을 건네는 미가엘을 보자 율은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성물을 가진 손을 힘없이 내렸다. 

“오랜만이야 무어.”

더그가 무어를 향해 말을 건넸다. 조금 전까지 한껏 흥분해 달려들던 무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싸늘할 정도로 차분한 모습의 무어만이 남아있었다. 언뜻 침착한 듯 보였으나, 율은 느낄 수 있었다. 무어가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을.       

힘이 빠질대로 빠진 무어에게 천사의 군대와 대천사 네 명을 상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무어에게 가장 큰 공포를 주는 대상은 다름 아닌 더그였다. 알 수 없었지만, 본능이 무어의 행동을 제지했다. 자칫 잘못 더그를 건드리면 소멸당할 것이라는 생각에 발조차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오랜만입니다. 더그.”

갑자기 나온 무어의 존대에 더그를 제외한 모두가 놀라 무어를 쳐다봤다. 

“이승을 이 이상 어지럽히면 신이 그냥 넘어갈 것 같진 않은데?”

“저도 바보는 아닙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이만 돌아가지요.”

무어는 말을 마치자마자 마군을 전부 지옥으로 돌려보냈다. 땅이 열리더니 검고 붉은 지옥으로 마군들이 빨려 들어갔다. 그토록 시끄럽던 이승이 한순간에 적막해졌다.           

한순간에 상황을 정리한 더그를 어이없게 쳐다보는 것은 율 만이 아니었다. 미가엘과 가브리엘 역시 더그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미가엘이 더그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무어를 알고 있던 건가 더그?”

“태초의 존재라고 우리 알고 있지 않나.”

“하지만 만난 적은 없었지. 이야기로만 들었을 뿐.”

“꽤 오래된 이야기라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해주겠네.”

더그는 더 이상 이야기를 꺼내는 게 곤란했는지, 서둘러 미가엘과 가브리엘을 천군과 함께 올려 보내려 했다. 

“아무리 의도가 어쨌든, 성물을 가지고 악마와 내기를 한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텐데요?”

가브리엘이 율을 노려보며 강한 어조로 쏘아붙였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성경은 가짜였지만, 성물은 진짜였다. 더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자칫 이승과 천국 모두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율을 대신해 더그가 말했다.

“그 부분은 내가 보고하도록 하지. 안 그래도 위에 볼 일이 있어서 말이야.”

“그렇지만..”

“내가 하겠다고 했네.”

가브리엘의 말을 끊고 더그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순간 느껴지는 위압감에 가브리엘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미가엘과 천군과 함께 하늘로 올라갔다. 

“잠깐 걸을까?”

더그가 율에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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