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록사막 Feb 09. 2021

사랑

 아버지의 이마엔 열기가 가득하고 들숨과 날숨에 힘이 없었다.

깊숙한 폐부에서 올라오는 그르렁 소리가 솟구칠 때마다 거실에 둘러앉은 우리는 더욱 숨을 죽였다.

"목 좀 축여요"

엄마는 빨대컵에 물을 담고는 누워계신 아빠의 어깨를 능숙히 잡아 올려 아빠께서 물을 드실 수 있도록 도와드렸다.

"이게 무슨 일이냐. 진작에 응급실에 갔어야 했는데.. 고집을 부리시니."

엄마의 푸념에 아빠는 몇 모금 물을 빨아 삼키시고는

"월요일에 의사 만나면 되지 뭐하러 응급실에 가!" 라며 버럭 하시는 것이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평상시의 위엄과 고집 그 자체였다. 이 목소리를 듣고 누가 암환자라고 하겠는가.

큰 딸 내외 앞이어서 그런지 아빠는 목소리에 더욱 힘을 주시는 것이다.

"잔말 말고 머리 좀 주물러라"

나는 거실 바닥에 요를 깔고 누워계신 아빠 머리 쪽으로 자리를 잡고 앉아 군말 없이 마사지를 시작했다.

얇은 머리카락들이 둘러싸고 있는 아버지의 두상에는 잡히는 살이 하나도 없었다. 머리를 살살 만져드리고 어깨와 팔을 주물렀다. 그리고 뼈가 드러난 아빠의 두 다리를 번갈아가며 주물러드렸다.

일주일째 아빠 입으로 들어간 음식이 없다는 엄마의 한탄을 뒤로하고 아빠는 들릴락 말락 한 작은 소리로 혼잣말을 하셨다.

"아이고 시원하다... 큰딸이 최고다.."

 내가 내 아들만큼 어렸을 적에 무서움을 많이 탔었다. 한밤중에 자다 말고 밖에서 부스럭 소리가 난다고 울면서 엄마 아빠를 깨우기가 일쑤였다. 그러면 엄마는 아무 소리도 안 난다고 꿈쩍도 안 하셨지만 아빠는 주무시다 말고 일어나 문을 열고 집 밖을 한 바퀴 돌아보시고는 "아무것도 없어. 이제 자" 하셨다. 그러면 나는 안심하고 다시 잠을 청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아빠는 어린 나를 지켜주셨다.

잊고 있다가 문득 떠오른 기억 때문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뜨거운 감정을 삭히고 가만히 아빠의 검붉은 두 발을 주물렀다. 노랗게 변한 아버지의 발톱. 쇠 빠지게 일하신 세월의 흔적이었다. 평생 일해서 여섯 식구를 먹이고 입히신 것은 얼마나 숭고한 일인가. 지금은 잠시 아프셔서 가족들이 힘들지만 우리는 아버지의 수고로 여기까지 살아왔다. 아버지의 땀방울이 있었기에 우리는 존재 할 수 있었다.

 나는 어느새 아버지의 어린 딸이 되어있었다. 아빠께서 내가 탈 자전거를 사 가지고 들어오시던 모습, 나란히 앉아 아침밥을 먹던 기억, 퇴근하실 때 두 손에 들려진 검은 귤 봉지... 아버지와의 기억들이 빛나는 무지개처럼 내 가슴 한복판에 활짝 피어났다.

그동안 미처 몰랐다. 나는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받는 사람이었음을.


  


작가의 이전글 입국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