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주는 사랑을 싣고. feat. 세 번째 페스토
나는 최근 며칠을 연달아서 안주를 먹었다. 그런데, 오직 안주만. 술은 없이!
나는 사실 술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아직 인생의 쓴 맛을 못 보아서 그런가 소주는 나에게 너무나 쓰고, 맥주는 뱃속에 커다란 풍선을 넣어주는 것처럼 더부룩한 느낌을 줘서 잘 먹지 않는다. 작년에 우연히 와인을 맛볼 기회가 많았어서 나 치고는 꽤나 자주 마셨다. 하지만 그것도 일 년 동안 아마 10번을 넘기지는 않았을 것이고, 이번 연도에 들어서는 단 한 번도 먹지 않았다. 아무튼 나는 이렇게 술과 친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내가 안주를 매일 먹게 되었다. 그 시작은 다름 아니라 나의 세 번째 페스토였다!
두 번째 페스토인 셀러리 페스토까지만 해도 이전 글에서 이야기했듯이 까다로운 캐스팅 과정을 거쳤지만, 세 번째 페스토의 주인공은 꽤나 단순하게 정해졌다. 어느 날, 요리에 진심을 다한 지난 몇 달 동안 내가 식재료에 돈을 아주 많이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나도 절약이라는 것을 해보자!"라고 다짐을 할 때 즈음 두 번째 페스토였던 셀러리 페스토와 눈물을 머금고 작별인사를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감자 구이와 페스토의 조합은 포기할 수 없었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다른 야채들보다 비교적 저렴하지만, 감자 구이와 잘 어울릴 맛이라...' 그렇게 고민을 하던 참에 우리 집 냉장고에 있던 양파가 "이제 내가 나설 차례이군!" 하며 선글라스를 쓰고 팔짱을 낀 채로 냉장고 벽면에 기대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우리 집에 없는 날이 없는 양파. 캠핑을 가서 숯불에 감자와 양파를 구워 호호 불며 한입에 넣는 것을 상상했다. 바로 엉덩이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행동 게시이다! 그렇게 세 번째 페스토인 어니언 페스토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재료(500ml 분량):
- 큰 양파 1개 반
- 마늘 3쪽
- 캐슈너트 한 움큼(볶기 전 썰어둔 생 양파의 반 정도의 분량)
- 두유 100ml, 물 50m
- 레몬즙
- 올리브유 (혹은 코코넛 오일) 2스푼
- 뉴트리셔널 이스트(생략 가능)
- 소금, 후추
(참고: 양파 반 개, 마늘 3쪽 그리고 두유 대신 두부 100g을 넣으면 갈릭 캐슈 스프레드가 된다. )
방법:
1. 양파를 작게 썰어서 마늘과 함께 볶으며 캐러멜라이징한다.
2. 캐슈너트를 에어프라이어나 프라이팬에서 구워준다.
3. 모든 재료를 믹서기에서 윙 갈아주면 완성!
페스토를 만들 때에 묘미가 하나 있다. 믹서기에 재료를 갈아준 후, 완성된 것을 용기에 담고 믹서기 벽에 남은 것을 깨끗이 긁어먹는 것이다. 마치 처음 맛보는 요플레 뚜껑을 핥아먹는 기분이랄까? 이번에도 실리콘 주걱으로 믹서기 벽에 남은 것을 야무지게 모아 '냠!' 하고 먹었다. 짝짝짝! "캬~"하고 탄성이 나왔다. 설탕이 한 꼬집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캐러멜라이징으로 아주 달달해진 양파와 구운 캐슈너트의 고소함이 내 혀의 모든 미뢰들을 깨웠다. 이 페스토와 함께하는 첫 밥상은 어니언 페스토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동글동글한 양파 스테이크까지 곁들여 한 접시를 차렸다. 새송이 버섯 구이, 감자 구이, 양파 스테이크 그리고 어니언 페스토. 딱 이 조합, 그야말로 최고였다. 나중에 내가 식당을 차린다면 간단한 메뉴로 하나 넣어야겠다. 메뉴 이름은 '주인장이 가장 좋아하는 구이 한상'.
냉장고에 페스토가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든든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 오랜만에 바삭바삭하고 짭조름한 김부각이 먹고 싶어졌다. 우연히 안국역 앞의 서울 동행 상회라는 곳에서 당류가 없는, 귀리 김부각을 발견해서 데려왔다. 그날 저녁, 김부각이라는 반찬이 추가된 것 이외에는 특별한 것 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저녁상을 차렸다. 아쉽게도 감자가 다 떨어져서 감자 구이와 어니언 페스토의 조합은 없었지만. 그런데, 김부각 포장을 뜯고 접시에 옮겨 담다 보니 '어? 이거 페스토에 찍어 먹으면 맛있겠는걸?'싶었다. 역시 나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이런 말을 해서 감자 구이에게 미안하지만, 어니언 페스토는 김부각을 더 좋아했다. 미안해 감자야.. 하지만 너를 버린 것은 아니란다! (어제도 너를 위해 새로운 페스토를 만들었으니^^)
오랜만에 느끼는 이 바삭함. 아무리 요리를 좋아해도 기름을 왕창 쓰며 튀김을 만드는 수고를 괜히 나서서 하지는 않는 자취생인 나에게 "바삭함"이란, 산속에서 수련을 하다가 조금 지루해질 때쯤 만난 속세와 같은 것이다. 그 순간, 나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캔 맥주! "아, 술이 생각나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물론, 실제로 마시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이 날 이후로 바삭바삭함과 어니언 페스토가 만나는, 안주상에 빠져버린 것이다.
안주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지. 바로 부침개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한동안 감자부침개, 당근부침개 등 모든 야채를 부침개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다가 무지 맛있는 양념의 버섯부침개 레시피를 발견하기도 했다. 내가 연달아 5번은 해 먹은 것 같은 이 바삭한 버섯부침개의 레시피는 다음과 같다.
바삭한 초간단 버섯 부침개:
1. 홀그레인 머스터드 반 숟가락, 간장 한 숟가락, 물 3 숟가락, 감자 전분 한 숟가락 그리고 후추를 섞어 양념을 만든다.
2. 잘게 썬 양파와 팽이버섯을 위의 양념에 넣고 버무린다.
3. 에어프라이어에서 120도에 20분간 구워주면 완성! (중간에 자주 확인할 것을 추천한다. 재료 특성상 홀라당 타버리기 쉬우니!)
참고로, 전과 부침개는 다른 요리이다. 나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둘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출처: 위키피디아)
전은 생선이나 고기, 채소 등을 얇게 썰거나 다지고 양념을 한 후, 밀가루와 달걀물을 씌워 기름에 지진 음식이다. 부침개와 달리 재료의 형태를 최대한 유지한다. 굴전, 새우전, 버섯전, 고추전, 호박전 등이 대표적이다
부침개는 잘게 썬 재료를 넣은 걸쭉한 반죽을 기름에 얇고 넓적하게 부쳐 낸 음식이다. 전과 달리 재료의 형태를 무시하고 잘게 썰어 밀가루와 함께 반죽한다. 애호박을 채썰어 만든 호박부침개나 배추김치를 잘게 썰어 만든 김치부침개 등이 대표적이다.
내가 만든 너무나도 맛있는 이 안주상 앞에 앉으면 혼자보다는 누군가와 같이 맥주를 '짠!' 하고파 진다. 그러면서 미래에 내가 사랑하게 될 누군가와 함께하는 삶을 생각해 본다. 정말 신기하다. 내가 만든 맛있는 음식들이 꽤 오랜 기간 사랑이 없던 내 마음에 자꾸만 사랑의 꽃을 심어준다.
사실은, 지금 내 마음에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다. 5년이 넘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참 좋고 편한 사람이다. 솔직히는 이전에도 가끔 그와의 미래를 생각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사랑을 할 용기도, 용기를 낼 마음도 없었기에, "나는 혼자 재미나게 잘~ 살 거야!"라고 항상 말하고 다녔다. 그러던 와중, 최근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 앞에서는 내가 진짜 나로 있을 수 있는 것 같다.' 사랑을 잘 모르는 사람으로서 지금 내 마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사랑이라는 것인지 확신은 못하겠지만 요즘따라 더 많이 생각나는 사람임은 분명하다. 특히 맛있는 것을 혼자 해먹을 때면 이 사람이 꽤나 자주, 아니 거의 매번 떠오른다.
내가 만든 코코오버나이트 오트밀로 달달하게 같이 아침을 열고,
퇴근을 한 저녁에는 뜨끈한 두유 채소 스튜로 피곤을 녹이며 함께 편히 쉬고,
가끔은 이 안주와 함께 술을 짠! 하며
서로의 고민을 얘기하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하는
그런 저녁을 보내는 것은 어떨까.
이 얘기를 적을지 말지 한참을 고민했다. 정말 아무에게도, 그 당사자에게 조차 내색하지 않은 나의 마음속 이야기이다. 하지만, 나라는 사람은 단 하루 동안에도 초대형 트럭 10대의 분량에 해당하는 생각을 하는 생각 부자인 것 같아서, 그래서 나중에 내가 이 글을 읽을 때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그렇지만 분명히 기억하고픈 참 예쁜 감정이니까. 용기를 내어서 소심하게나마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