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수를 처음 만난 것은 바야흐로 2018년에 엄마와 함께한 베트남 여행에서이다. 우리 둘은 평소에 가리는 야채가 없었기에 처음 만나는 고수에 대해서도 두려움이 없었다. 그래서 쌀국수 옆, 다른 그릇에 따로 나온 고수를 왕창 한꺼번에 쌀국수 국물에 넣어 휘휘 저었다. 국물을 퍼서 첫 입을 맛보는 순간, 엄마도 나도 아주 당황했다. "으잉? 엄마.. 진짜 야채에서 세제 맛이 나는데...? 이게 뭐야..?" 같이 맛을 본 엄마도 컥컥 거리며 황급히 고수를 다시 빼내었다. 하지만 우리보다 고수가 한발 빨랐다. 이미 국물은 고수의 향에 지배된 바다가 되었다. 그 이후로 엄마와 나는 고수를 즐겨 먹지 못했다.
그로부터 시간이 꽤나 흐르고, 나에게 고수란 그저 베트남 음식점에 가면 있는 야채가 되었다. 고수를 사서 직접 요리해 먹는 것처럼 즐겨 먹지는 않았을 뿐, 고수가 "야채"라는 사실은 나에게 부정보다는 긍정의 느낌을 주기는 했다. 그랬다. 딱 그 정도였다. 내가 좋아하는 야채의 가족 구성원이지만, 세제 맛이 나는 것. 그런데, 난 지금 고수의 향긋한 바다에서 유유자적 떠 다니며 나갈 생각이 없는 휴양객이 되었다!
시작은 (이제 지겨울 수도 있겠지만..) 페스토였다. 다만, 미리 말하지만 고수 페스토를 만든 것은 아니다. 이색 페스토에 관심이 생긴 얼마 후, 고수 페스토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고수가 주인공인 페스토를 만든다면, 내가 6년 전에 베트남에서 맛본 그 충격적인 세제 맛과 재회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것은 분명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러니 꼭 한 번은 해보아야 했다. 하지만 내가 원래부터 좋아했던 향긋한 셀러리(7화 참고)와, 절약하고픈 나의 마음을 도와주었던 양파(8화 참고)에 순서가 밀렸다. 또, 친구들이나 엄마를 우리 집으로 초대해 '류스토랑'의 오픈 준비를 할 때, 그들에게 싫어하는 야채가 있냐고 물어보면, 하나같이 고수를 말해서 더더 밀렸다. 그리고 마침내 드디어, 많이도 기다려준 고수의 차례가 왔다. 나의 궁금증을 풀 때가 온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캐슈너트은 소량만 넣고, 두부를 많이 넣어 더욱더 부드러운 질감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나의 첫 고수 요리, "고수 두부 크림"이 탄생했다!
<고수 두부 크림>
고수 40g + 두부 120g + 구운 캐슈 40g (선택 사항) + 물 80ml + 올리브오일 (혹은 코코넛 오일) 두 스푼 + 레몬즙 + 뉴트리셔널 이스트 한 스푼 + 소금&후추를 믹서기에서 돌리면 완성이다.
노트:
- 나는 크림의 질감을 얻고 싶어서 두부의 물기를 빼지 않았다. 하지만 더 꾸덕한 느낌을 원한다면, 물 양을 줄이거나 두부의 물기를 빼주어야 할 것이다.
- 구운 캐슈를 소량 넣으면 고소함이 추가된다. 그렇지만 정말 부드럽고 가벼운 크림을 원한다면, 생략하는 것을 권장한다.
믹서기가 열심히 일을 하여 고운 연둣빛의 크림을 만들어주었다. 뚜껑을 열자마자 마치 고수 민들레 홀씨가 날아 퍼지는 것 마냥 향긋함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첫 입을 맛보는 순간, 나는 정지. 너무 맛있어서 충격을 받았다. 한 입 더 먹고 싶었지만 냉장고에서 숙성을 한 후 먹으면 더 맛있어질 것이 분명하기에 순간의 욕망을 꾹꾹 눌렀다.
단언컨대, 이것은 세제 향, 세제 맛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 향기가 약한 것은 또 아니다. 오직 질감을 위해 두부를 넣은 것이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두부의 은은한 맛과 고수의 강한 향이 참 잘 어우러졌다. 거기에 소량만 넣은 구운 캐슈너트가 고소함을 적당히 더해주었다. 두부, 캐슈너트, 그리고 고수 이렇게 셋은 서로의 손을 잡고 경쾌한 스텝을 밟으며 빙빙 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행복에 취한 내가 있었다.
이후, 나는 이 크림을 매 끼니 먹었다. 우선, 감자 구이나 감자채 부침개 등의 감자요리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바삭바삭하게 구워진 감자를 부드러운 이 크림에 푹 찍어 한입 먹으면, 그릇을 뚫어지게 바라보게 된다. 너무 맛있어서 진지해질 정도이기에. 또, 남은 고수와 각종 버섯을 이용해 만든 리소토 위에 고수 크림을 듬뿍 올려 함께 먹었다. 입 안에 아리따운 고수 꽃이 한가득 핀 것 같았다.
난 이제 고수를 좋아하게 되었다. 부정적인 감정은 조금도 남지 않은 채로, 좋지 않았던 첫 만남이 그저 재미난 추억이 된 채로. 그리고 그 사이에는 고수를 마주하고자 했던 나의 용기와 시도가 있었다. 이것이 고수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지 않을까 하며 괜히 긍정적인 마음을 품어본다.
고등학교 때부터 진지하게 수학을 공부해 온 지 어느덧 10년이 되었다. 그리고 이번 연도 초부터 조금씩 조금씩, 나는 이 학문이 싫어졌다. 무언가를 싫어하는 감정이 무척이나 나를 힘들게 한다는 사실을 몸소 느꼈다. 하지만, 고수를 좋아하게 된 것처럼 다시 수학이 좋아질 수 있을까? 다시 내가 수학이라는 학문을 웃으며 마주할 수 있을까?
원래는 휴학을 하고자 했던 2024년의 가을학기가 다가왔다. 휴학을 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도 내 마음속에 수학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만일 지금 학문의 세상에서 나온다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적기에,
나의 20대의 절반 이상을 바쳐 참 열심히도 해온 것이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수학과 함께한 추억 속에서 얻은 행복을 무시할 수 없기에,
나는 나와 수학을 다시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추후에 내가 새로운 길을 나서든 아니든, 지금 내가 학문의 세상에 다시 진지하게 들어가 보겠다는 이 도전은 분명 나의 인생에 멋진 나이테를 만들어주리라 믿는다.
싱숭생숭한 심정으로 9월 개강을 맞이한다. 나의 마음을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지만, 설렘의 풍선에 아직 공기가 남아있는 것이 분명하다. 아주 조금이어서 그 풍선은 위태위태하며 날아다니고 있지만, 내가 이것에 다시 바람을 불어넣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힘 있게 날아다니게 할 수도 있으니까.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니까. 나의 의지로 고수를 다시 만난 것처럼, 용기를 가지고 다시 한번 수학을 마주해 보기로 했다.
고수의 마법이 수학의 마법으로 이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