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류지 Aug 30. 2024

접시 위에 천천히 피우는 꽃.

당근 꽃, 애호박 꽃, 그리고 가지 꽃.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후다닥 요리사였다. 아침도 최대한 후다닥 차려 후다닥 먹고, 학교에서 후다닥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아주 적은 양의 도시락을 싸갔다. 또, 그나마 여유가 있었던 저녁조차도 습관이 되어서인지 후다닥 요리하고 후다닥 먹고 치웠다. 해 먹은 것을 치우기 시작할 때 몇 시인지 확인하는데, 어제보다 이르면 괜히 안심이 되고, 그 반대인 날에는 불안해졌다. 그것이 단 5분 정도의 차이일지라도. 


    그랬던 내가 이제는 느릿느릿 요리사가 되었다. 학자의 삶에서의 방황이 먼저인지, 요리에 대한 흥미가 먼저인지, 또는 그 둘의 동시 발생인지는 모르겠다. 학업과 그것을 마주한 나의 마음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왕창 받은 날, 요리는 나를 '치유'해 주었다. 그 시간만큼은 아무런 걱정도 나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못했다. 이 행복한 시간을 더 오래 만끽하기 위해 천천히 요리하기 시작했다. 또, 소중한 나에게 더 정성이 가득하며 건강하게 조리된, 맛있는 것들만을 대접하기 위해 나는 느려졌다.


     버섯이나 가지 구이를 할 때면, 기름을 잘 먹고 더 촉촉해지도록 칼집을 내는데, 이전보다 더 정교하고 예쁘게 냈다. 또, 삶은 감자를 그저 납작하게 눌러 에어프라이어에 굽기보다, 손으로 조몰락조몰락하여 동글동글 예쁘게 만들어 구웠다. 

예쁘게 칼질을 낸 가지와 새송이 버섯을 구웠다.

    

감자와 병아리콩을 동그랗게 빚어 에어프라이어에 구웠다.

    느려짐이 나에게 선사한 변화는 요리하는 과정 속에서 얻는 행복을 더 오래 누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우선, 같은 음식을 먹어도 더 천천히 음미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직접 하였기에 무엇이 들어가고 어떻게 조리되었는지 잘 알고 있다는 것은, 완성된 요리의 맛을 천천히 볼 때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는 기분이 들게 했다. 어찌나 재미있던지. 


'발사믹 식초와 간장을 같이 쓰니 하나를 쓸 때보다 감칠맛이 배가 되는구나.'

'파슬리 가루는 참 은은하게, 천천히 향긋함을 더해주는구나.'

'가지와 애호박을 굽기 전에 물기를 잘 제거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달라진다니! 흐물거리지 않고 힘 있는 구이가 되는구나.'


더불어 내 앞에 놓인 음식들에게, 그리고 이것들이 농장, 산 혹은 바다에서부터 여기까지 오는 데에 거친 수많은 손길들에 감사함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더 예쁘게 만들어진 음식을 먹는 나 자신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얼마 전부터는 종종 나의 접시에 느릿느릿 꽃꽂이를 하는 중이다. 당근 꽃, 애호박 꽃, 그리고 가지 꽃을 만들어 살포시 올렸다. 

당근 꽃, 애호박 꽃, 그리고 비건 리코타
<당근 꽃과 애호박 꽃> 
1.  당근은 필러를 이용해서 얇고 길게 자른다. 애호박은 2mm 정도의 두께로 길게 포를 뜨듯이 칼로 자른다. 
2. 전자레인지에 넣고 2분 정도 익혀서 부드럽게 만들어준다. 
3. 아몬드 가루 1스푼, 찹쌀가루 (또는 전분가루) 반 스푼, 올리브 오일 1스푼, 파슬리 가루, 소금과 후추를 섞는다. 
4. 3의 양념을 익힌 당근과 애호박에 골고루 묻혀준다. 
5. 꽃처럼 돌돌 말아 오븐 전용 머핀 틀에 넣고 에어프라이어에서 150도에 20~25분간 구워주면 완성.

노트: 11화에서 소개한 비건 리코타 치즈를 곁들여 먹으면 참 맛있다. 
로즈메리 두유 크림 위의 가지 꽃.
<가지 꽃>
1. 가지를 2~3mm 정도의 두께로 길게 포를 뜨듯이 자른다. 
2. 전자레인지에 넣고 2분 정도 익혀서 부드럽게 만들어준다. 
3. 올리브오일, 소금과 후추를 2의 가지에 잘 묻혀준다. 
4. 꽃처럼 돌돌 말아 오븐 전용 머핀 틀에 넣고 에어프라이어에서 150도에 20~25분간 구워주면 완성.
 
노트: 4화에 소개한 로즈메리 두유 크림과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


물론 같은 채소에 같은 양념을 묻혀 그냥 구워도 같은 맛이 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맛은 아주 다르다. 당근 꽃과 애호박 꽃의 꽃잎을 한 겹씩 떼어내어 비건 리코타를 올려 한 '잎'을 먹으면, 그 잎이 나의 마음에 살포시 앉아 다시 예쁜 꽃을 만든다. 부드러운 가지 꽃잎을 로즈메리 두유 크림에 푹 찍어 먹으면, 나의 마음은 보드랍고 고운 꽃 이불로 덮인다. 




일부러 안 서두르기, 

일부러 돌아가기,

일부러 꽃 만들기.


이렇게 가끔 누려보는 '일부러 느려짐' 속에서
우리는 하마터면 지나칠뻔한 행복을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오늘도 그 행복을 만나기 위해,
그리고 소중한 나를 위해,
부엌에서 느릿느릿 평온한 시간을 보낸다. 


이전 11화 가지, 너도 홀로 설 수 있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