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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류지 Sep 13. 2024

건나물이 생기를 되찾는 시간

우리에게도 그런 시간이 온다.

    날씨도, 요리에 대한 나의 열정도 굉장히 뜨거웠던 여름이 끝나가는 9월 초. 대목은 대목인지 요즘 물가가 놀랍기 그지없다. 파프리카 하나가 거의 3000원에 달하고, 상추 등의 쌈채소도 한 봉지에 3000원을 넘는 것이 기본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특가로 990원까지 내려가던 애호박 또한 4000원 선에 가까이 왔다.

    

    요리에 대한 나의 열정은 사계절이 없다. 오직 무더운 여름만 있을 뿐. 그러니 물가 상승이라는 장애물 앞에서 나는 멈출 수 없고, 이를 영리하게 뛰어넘어야 한다. 그 방법 중 하나는 부엌 하부장에서 잠자고 있는 재료들을 사용하는 것이다. 즉, 건나물의 때가 온 것이다. 엄마가 얼마 전에 가져와주신 건고사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고사리 하면 엄마가 해주시던 고소한 고사리 나물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엄마의 반찬을 그대로 따라 하고 싶지 않았다. 같은 방법으로 만든다고 하더라도 엄마의 요리는 엄마가 해주는 것으로만 먹고 싶다. 엄마의 손맛이 없는 엄마의 요리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만 크게 만들 뿐이기 때문이다.


    고사리 요리를 구글에 검색해 보면 나물 반찬 외에는 고사리 파스타를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파스타를 즐겨 먹지는 않기에 이것을 하고픈 마음이 선뜻 들지는 않았다. 그때 내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바로 내가 참 좋아하는 반찬 중의 하나인, 한식의 파스타, 잡채였다. 그렇게 난 첫 고사리 요리로 고사리 잡채를 만들게 되었다.


    건 고사리는 최소 5시간은 물에 잠겨 있어야 원래 상태처럼 통통하게 불어난다. 하지만, 고사리 요리를 처음 해 볼 생각에 들떠있던 나는, 고작 3시간 30분 정도만을 불리고 더 기다리지 못했다. '어차피 데칠 거니까 그때 더 불어나겠지?'라고, 그 당시의 나에게는 꽤나 일리 있어 보이는 생각이었다. 일리가 있기는 무슨, 펄펄 끓는 물에 오래 데쳤음에도 고사리는 여전히 질기고 뻣뻣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나의 조급함에 당면 또한 타격을 입었다. 원래는 당면을 불리고 끓는 물에 따로 데쳐야 하지만, 나는 꾀를 부려 데치는 과정을 생략해 버렸다. '물을 조금씩 넣으면서 볶으면 괜찮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이 요리의 결과는, 질겅한 당면과 뻣뻣한 고사리의 만남. 불행 중 다행으로 간은 나쁘지 않았기에 오랜만에 턱 운동을 하자는 심정으로 열심히 먹었다. 나의 주방에서 실패작이 나왔다. 그리고 나는 배웠다. '아, 요리는 기다림의 과정이구나.'



꾀를 부리지 않는, 정석의 레시피는 다음과 같다.

<고사리 잡채>
1. 건 고사리를 최소 5시간 불린다. (줄기의 굵기가 대략 3배 정도는 될 때까지 불린다. )
2. 당면은 최소 30분 불린다.
3. 불린 고사리를 물에 넣고 30~40분가량 삶는다.
3-1. 불을 끈 후, 바로 건져내지 않고 30분 정도 두면 조금 더 부드러운 고사리를 얻는다.
4. 불린 당면을 끓는 물에 10분간 삶는다. 이때, 오일을 한 스푼 넣어 당면끼리 붙지 않게 한다.
5. 다진 마늘과 양파를 볶다가 양파가 조금 노란 빛깔을 띄면 새송이 버섯을 넣는다.
6. 버섯이 어느 정도 구워졌을 때, 삶은 고사리와 잡채를 넣고 5분가량 더 볶는다.
7. 간장 반 스푼을 넣고 간을 본 후 취향에 따라 추가한다.
8. 불을 끄고 들기름을 한 스푼 넣어 섞어주면 완성이다.


나의 실패작. 고사리 잡채.


    다음날, 오늘은 기필코 맛있는 고사리 요리를 해 먹겠다는 마음으로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고사리를 물에 담가 놓았다. 약 5시간이 지났을까, 나의 고사리는 마침내 통통하고 유연해졌다. 하지만 잡채를 다시 하고 싶지는 않아서 새송이 버섯, 양파 그리고 고사리만을 달달 볶았다. 간은 잡채와 동일하게 간장 반 스푼과 마지막에 뿌려준 들기름으로 끝. 어제와 달리 자신의 줄기를 나의 손에 완전히 맡기는 고사리를 달달 볶으며, 그리고 그 향긋함을 맡으며, 먹기도 전에 나는 직감했다. 아, 오늘은 대성공이다.


    그 전날 우연히 만들게 된 김 두부 크림을 곁들였다. 얼마 전 '마이 리틀 마운틴'이라는 식당에서 '김 페스토 주먹밥'을 맛본 후, 김의 매력에 퐁당 빠져 만들게 된 크림이다. 고소한 고사리 볶음에 바다향이 가득한 부드러운 크림을 올려 첫 입을 맛보았을 때, 나의 몸속 모든 신경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이 소중하고 엄청난 맛을 천천히, 그리고 신중히 만끽하고 싶었다. 고사리 요리와 찰떡궁합을 이루는, 언뜻 보면 쿠앤크 아이스크림 같은 김 두부 크림의 레시피는 다음과 같다.

<김 두부 크림>

물에 푼 김 4장, 두부 150g, 구운 캐슈 40g, 들기름 2스푼, 올리브오일 1스푼, 레몬즙, 뉴트리셔널 이스트 1스푼, 소금과 후추를 믹서기에 넣고 갈면 완성이다.


 김 두부 크림을 곁들인 고사리 버섯 볶음.

    건고사리를 시작으로 건나물에 빠진 나는 곧바로 부엌 하부장에 있는 건취나물을 떠올렸다. 그래. 다음 주자는 너다. 취나물은 이전에 페스토(3화 참고)를 만들기 위해 불리고 데쳐 먹어보았기에 처음 다루는 재료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향기로움을 다시 만끽할 생각을 하니 군침이 절로 났다. 그렇게 난 또 새벽부터 남은 취나물을 몽땅 불려놓았다. 얼른 생기를 머금고 예쁘게 불어나렴.




    

    일반적으로 건나물은 생나물에 비해 영양가가 높다고 알려져 있다. 나물을 말리는 과정에서 영양분이 응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건나물이 내뿜는 향과 맛 또한 생 것에 비해 더욱 진하다. 딱딱하고 안쓰러울 정도로 얇게 말라있던 건고사리와 건취나물은 대략 5시간 만에 수분을 가득 머금고 생기가 가득해진다. 사람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인생이란, 우리를 바짝 마르게 하는 순간들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더 단단해진다. 마치 생나물이 마르면서 영양과 맛이 배가 되는 것처럼. 그리고, 우리에게는 반드시 다시 생기를 찾는 때가 온다. 물론, 단숨에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건나물들이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물을 천천히 빨아들여 생기를 되찾는 것처럼, 우리도 조급해하지 않고 천천히, 그리고 진득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며 기다리면 반드시 때가 온다. 조급해하면 질기고 뻣뻣한 고사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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